시멘트
1. 정의
건물을 짓는데 들어가는 혼합물로서 건축계의 필수요소. 현대에 들어와서는 단순히 집을 짓는 재료를 넘어 시멘트 벽화, 시멘트 두상 등 예술작품의 재료로까지 사용되며 사랑받고 있다. 10여년전부터는 '''아토피'''나 '''새집 증후군'''의 대표적인 원인으로 손꼽히는 등 오해를 받았다. 하지만 시멘트는 무기물로 새집증후군이나 아토피의 주 원인인 휘발성유기화합물과는 다른 물질이다. 한자로는 양회(洋灰)라고도 한다.
시멘트는 "잘려진 돌" 또는 "부서진 돌" 을 의미하는 라틴어 '''Cementum'''에서 유래한 말이며, 19세기 후반부터는 "다른 물질과 결합하는 것"이란 의미로도 사용되어 왔다.
오늘날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시멘트는 '''포틀랜드 시멘트(Portland Cement)'''인데 넓은 의미로서의 시멘트는 "물을 섞어 반죽하였을 때 경화하는 무기접착재료(Inorganic Cementing Material)"를 의미한다. 대한민국 공업규격 중 포틀랜드 시멘트(KS L 5201)에 대한 규정에 따르면
라고 규정되어 있다.
2. 역사
시멘트가 인간 사회에 등장한 것은 약 5000여년 전이며, 시멘트를 사용한 공사로서 지구상에 현존하는 최초이자 최고의 것으로는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유적이 제일 유명하다. 이때 사용한 시멘트는 주로 석회 (주성분 탄산칼슘)와 석고 (주성분 황산칼슘)였다.
이후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에서는 석회에 모래를 혼합한 모르타르를 사용했으며, 나아가 여기에 화산재 성분을 첨가하면 수경성의 더 단단한 모르타르가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시기에는 포졸란 석회를 소성하기 위하여 수직형로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석회와 화산재를 이용하는 방법을 최초로 발견한 것이 누구였는지는 알려져있지 않으나, 고대 크레타의 미노스 문명에서도 그러한 시멘트를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증거가 나온다. 하지만 보다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대 마케도니아에서 부터였으며, 산토리니섬에서 채취된 화산재를 주로 사용했다. 이러한 방식의 "포졸라나 시멘트"와 이를 이용한 콘크리트는 고대 로마시대에 이르러 한층 더 광범위화게 사용되어 판테온,콜로세움 그리고 수도교등 로마시대를 대표하는 여러 대형 건축물들의 주재료로 사용되었다. '포졸란'이라는 단어 역시 당시 시멘트 원료로 쓸 화산재를 채취되던 주요 산지의 하나였던 나폴리, 베수비오 화산 인근의 포추올리 지방의 지명에서 유래한 것.[2] 당시엔 석회에 화산재를 섞어 바닷물로 반죽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런 식으로 만든 로마시대의 시멘트 방파제는 2000년이 지나도 유지될 정도로 견고하다.[3]
이러한 포졸라나 시멘트 기술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상당부분 쇠퇴하게 된다. 건축술을 포함하여 로마시대의 기술과 문화 상당부분을 이어받은 동로마 제국에서조차, 서로마 제국 멸망 이전처럼 시멘트와 콘크리트를 직접 건축물의 '구조재'로 사용하는 건축술은 쇠퇴했고, (온전한 '포졸라나 시멘트'라기 보다는) 석회 모르타르 혼합물을 건축물의 외장재나 벽돌이나 석재를 붙이는 용도 등에 활용하는 정도였다. [4] 중세시대의 서유럽에서도 로마시대의 시멘트 기술이 계속 보존되었다고 입증할만한 문헌자료는, 1414년 로마시대의 시멘트 제조법을 담은 문서가 재발견 되기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명시적인 문헌상의 자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중세 서유럽에서도 일부 석공들이나 군사 기술자들은 여전히 같은 혹은 유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수경성 모르타르를 수로나 요새, 항구와 조선소 등의 건설에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애초 이런 방식의 시멘트의 핵심이 화산재라는 자연적으로 얻어지는 특수한 재료의 활용에 있었던만큼, 독일의 라인란트 지역 같은 곳에서는 역시 인근 지역에서 얻어지는 화산토('트래스Trass')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로마시대의 '포졸란 시멘트'와 비슷한 수경성 모르타르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동양에서도 석회를 구워 건축 자재로 사용했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학자 송응성(1587-1648)이 남긴 천공개물(天工開物)에서는 "석회는 불로 태워 만드니 청색이 가장 좋고, 황백색이 그 다음이다. 질이 가장 좋은 것을 광회라 하고, 가장 나쁜 것은 요재회라 부른다"고 쓰여있다. 조선시대에도 석회 수요가 많아 궁궐이나 관아, 무덤[5] 을 만들 때 썼다. 충북 보은군에는 조선시대 때 석회를 만들던 가마가 무더기로 발굴되기도 했다.
아무튼 로마시대 이후 과거의 시멘트에 관한 기술이 얼마나 보존되고 지속적으로 활용되었는가의 문제와는 별도로[6] , 시멘트가 다시 건축과 건설의 주 재료로 부상하는 것은 1700년대 중엽에 들어 근대적인 방식의 대규모의 산업적인 시멘트 제조법이 연구되면서이다.
1756년 영국의 존 스미턴(John Smeaton)은 에디스톤(Eddystone) 등대 건설공사를 할 때 수중공사에 적합한 시멘트를 만들고자 석회, 화산재등을 검토하였으며, 이에 점토분이 있는 석회석을 소성하면 좋다는 '''수경성 석회(Hydraulic Lime)'''를 발명하였으나 석회에 점토분을 혼합하면 좋은 효과가 나는 이유는 밝히지 못했다.
다시 40년후인 1796년 영국의 제임스 파커(James Parker)에 의하여 점토질 석회석을 더 높은 온도로 소성하면 보다 좋은 시멘트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이 시멘트와 물을 5:2의 비율로 혼합하면 1시간 이내에 응결 경화되는 급결성 시멘트를 발명하여 이를 후에 '''로만 시멘트(Roman Cement)'''라 부르게 되었다.
1811년 영국의 프로스트(Frost, j.)는 석회와 점토를 2:1 비율로 섞어 시멘트를 제조하여 '''Frost Cement'''라 하였으며, 1818년 프랑스의 루이스 조제프 비카트(Vicat, L. J.)는 석회석과 점토질 암석을 혼합, 소성하여 '''인공포졸란(천연시멘트)'''을 발명하였다.
1824년에는 영국의 연와공 조지프 애스프딘(Aspdin.J.)이 석회석과 점토를 혼합하고 융제(Flux)를 사용해서 융점을 낮추어 제조하는 시멘트를 만드는 방법을 발명하여 특허를 얻었다. 이 시멘트가 영국의 포틀랜드 섬에서 산출되는 석재와 그 색이 비슷하다 하여 '''포틀랜드 시멘트(Portland Cement)'''라 명명하였다 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시멘트의 기원이 되었다.
이후 1851년 런던 공업박람회에서 그 품질의 우수성이 널리 알려지자 그 후 시멘트 제조방법이 전세계로 전해지게 되었고,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시멘트 공업은 영국을 넘어 세계 각국에서 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1862년에는 독일에서 고로 슬래그를 혼합한 '''고로 슬래그 시멘트'''가 제조되어 혼합 시멘트 제조의 시초가 되었다.
1867년 프랑스에서 콘크리트가 처음 발명되었다.
1907년 경 프랑스와 미국에서 석회석과 보크사이트(Bauxite)를 원료로 하는 '''알루미나 시멘트'''가 제조되었으며, 1936년에는 시멘트의 수축성을 보상하는 '''팽창 시멘트'''가 발명되는 등 20세기에 들어와 시멘트의 종류도 다양화하기 시작했다.
각국의 시멘트 제조연대는 영국 1825년, 프랑스 1846년, 독일 1855년, 미국 1871년, 일본 1873년이며, 한국은 개화기 시절 서양인들이 들여와서 건축 재료로 쓰다가 1919년 일본 오노다(小野田)시멘트에 의하여 건설된 평안남도 승호리 공장에서 생산한것이 처음이다.
시멘트 산업은 전형적인 원료 지향성 공업에 속한다. 원료인 석회석을 채굴하는 광산 인근에 곧바로 생산 공장을 짓는 편이다. 지하 자원이 많지 않은 한국에 그나마 많이 매장되어 있는 자원이 석회석이라, 60년대부터 당시 국가산업으로 육성되어 현대시멘트, 쌍용양회, 한일시멘트, 성신양회, 고려시멘트, 한라시멘트 등이 설립되었고, 세계 7대 시멘트 생산국이자 5대 시멘트 소비국이다.
관동지방과 영동지방, 충청북도 제천시 등지에 시멘트공장이 많이 있는데, 주로 중앙선과 영동선 등지에 많이 있다. 도담역, 입석리역, 쌍룡역, 삼화역, 삼척역, 옥계역에 있는 시멘트 화차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래서 이들 역들은 여객 수요는 거의 없는 반면 화물은 전국 철도역 중에서도 손꼽히는 물량을 소화한다.
3. 시멘트 회사 목록
- 쌍용양회
- 한일시멘트
- 한일현대시멘트 홈페이지 - 현대시멘트가 한일시멘트에 인수되어 사명 변경
- 삼표시멘트 - 동양시멘트가 삼표에 인수되어 사명 변경
- 성신양회 홈페이지
- 아세아시멘트
- 한라시멘트 홈페이지 - 아세아시멘트에서 인수
- 고려시멘트 홈페이지
- 대한시멘트 홈페이지 - 쌍용양회에서 인수
- SPM 홈페이지
- 유니온 홈페이지
- 한국씨엔티 홈페이지
4. 유해성 논란
'''① 발 단 '''
'99년 시멘트 소성로가 폐기물 처리시설로 인정된 이후 폐타이어등 폐기물을 시멘트의 부원료와 보조연료로 재활용 시작(해외기술 도입)
'''② 유해성 논란 제기'''
'05년 국립환경확원은 국회 우원식 의원의 요청으로 ‘시멘트 소성로에서의 대기오염물질 배출실태 및 시멘트의 유해중금속 농도 등 조사’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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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논란확대'''
'06년 다음 블로그에 환경운동가(최병성)가 시멘트의 유해성을 재차 주장하여 시멘트 유해성 논란을 재점화 하였으며, 이어서 방송과 국정감사를 통해 시멘트 유해성 논란이 확대됨
'''④ 규제 강화'''
'06∼'08년 환경부는 시멘트 유해성 논란 해소를 위해 『1차 시멘트 민・관 정책협의회』를 구성하여 시멘트 안전 관리기준을 마련한다.(논란을 제기한 당사자들 위원으로 모두 참여)
- '09년 6가크롬 관리기준 마련(자율관리기준:20㎎/㎏ 설정)
'09년 환경부『2차 시멘트 민・관 정책협의회』 추가 운영- 일본 시멘트공장 방문
- 시멘트 중금속 정밀분석 실시
- 시멘트 소성로 제도개선 방안 마련
- 시멘트 소성로 대기 배출허용기준을 소각로와 동일한 수준으로 법제화
'11년 폐기물 관리법 시행규칙 개정- 시멘트 중금속 정밀분석 실시
- 시멘트 소성로 제도개선 방안 마련
- 시멘트 소성로 대기 배출허용기준을 소각로와 동일한 수준으로 법제화
- 폐기물 사용기준을 법제화, 폐기물처리업 허가제 전환
- 시멘트 소성로 검사기준 법제화
[image]- 시멘트 소성로 검사기준 법제화
'''⑤ 기타논란(수입석탄재)'''
발 단
'19년 국내 시멘트사들이 일본 발전사로부터 석탄재(폐기물)을 수입해 크게 이슈가 됨
일본의 대한국 반도체 소재 수출금지 조치로 일본에 대한 국내 여론이 악화된 상황에서
일본의 폐기물을 수수료를 받고 수입하고 있는 사실이 언론을 타면서 국회와 국민들로부터 집중포화를 당함
논란의 해결
시멘트업계 환경부, 산업부, 발전사와 민관협의체를 운영하여, 단계적으로 수입을 줄이기로 함
(협의체 구성이후 54% 수입 감소)
일부 언론에서 국내 석탄재가 남아도는데 석탄재를 수입한다는 지적이 있었으나
사실은, 2000년대 초반 국내 발전사에서 석탄재를 정제하여 레미콘업계에 유상판매(약 3만원/톤, 시멘트 대체제로 사용)하게 되면서 시멘트사에 공급되는 석탄재 부족으로 2002년부터 일본 석탄재 수입, 사용해오고 있는 것이 밝혀짐
현재 원주지방환경청에서 수입되는 모든 석탄재에 대한 방사능과 중금속 전수조사를 실시하여 환경부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음
전문가들 의견으로는 석탄재가 점토질 원료보다 시멘트 원료로 더 좋다고 함
'''⑥ 사후관리'''
1. 정부의 시멘트 중금속,방사능 모니터링 및 정보공개
환경부(국립환경과학원)에서는 매월 시중의 시멘트를 채취하여 방사능, 중금속을 분석하여 국립환경과학원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다.
https://www.nier.go.kr/NIER/cop/bbs/selectNoLoginBoardList.do?bbsId=BBSMSTR_000000000012&menuNo=14001
2. 시멘트 각사 홈페이지에 중금속 폐기물 사용량, 중금속 분석결과등 실시간 공개
5. 기타
- 주차장 등지를 지나갈 때 자동차나 옷 등에 시멘트 물이 떨어져 많은 이들을 화나게 하곤 한다. 시멘트가 석회질이라 물에 녹아 흘러내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는 티슈나 거즈에 식초를 흠뻑 묻혀 5~10분 가량 해당부위에 올려놓으면 말끔히 사라진다고 한다.
- 시멘트 가루는 강알칼리성을 띠기 때문에 반드시 취급시 장갑과 보안경을 끼는 등 보호조치를 취해야 한다. 또한 오래된 시멘트는 수축 팽창을 하는 과정에서 미세한 금이 가는데, 이 경우 시멘트 내부에 있던 유해물질 + 강 알칼리 시멘트 가루가 미세먼지화 해서 나오므로 호흡기 및 피부질환에 유의해야 한다.
- 시멘트 포대는 보기엔 그냥 가벼워 보일 것 같으나 근본적으론 돌가루인 물건이기 때문에 포대당 40kg을 자랑한다. 만만하게 보고 인력 사무소에서 한번 날라 보겠다고 했다간 그 다음날 온몸에 알이 배겨서 집에 꼼짝없이 누워있는 신세가 된다. 물론 이것을 나르는 일은 유경험자가 아니면 다치기 때문에 경력이 안 되는 사람들은 들고 나르는 일을 잘 시키지는 않지만 말이다. 최근엔 아예 시멘트 포대에 이렇게 들라고 방법을 그려놓기도 한다.
- 철물점이나 건자재점에서 구입할 시 시멘트인지 몰탈인지 잘 확인하는 게 좋다. 몰탈은 시멘트에 모래가 섞여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물만 부어 잘 섞으면 바로 사용할 수 있고 몰탈의 가격이 약간 더 싸다.
- 공구리작업이나 단순 바닥 방통작업 시 맨손으로 만지지 않는게 좋다. 피부에 침착돼서 잘 지워지지도 않을뿐더러 시멘트가 굳을때 피부탈수를 일으켜 상처가 생긴다.
- 시멘트 화물이 의외로 코레일에서 KTX 다음 가는 수입원이다.[7]
- 시멘트재질의 천장 내부에 새는 파이프가 있으면 석회성분으로 인해 종유석을 발견할 수도 있다.
- Windows CE, Windows ME, Windows NT 4.0을 합해서 CEMENT로 불린다(...)
6. 해외 사례
미국, 일본, 유럽 등 거의 모든 국가에서 천연자원 보호 및 환경부하저감 등을 위해 시멘트 생산에 순환자원을 사용하고 있고 지속적으로 증가 추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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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문서
[1] 놀랍게도 설탕도 포함된다. [2] 물론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했으므로 산토리니 등에서 나오는 화산재도 계속 시멘트의 재료로 사용되었다.[3] 화산재를 이루는 응회암이 골재와 모르타르 사이의 광물적 합생이 균열이 퍼지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현대의 포틀랜드 시멘트에 쓰이는 골재는 표면이 불활성이어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균열이 커진다.[4] 여기에는 단지 지식과 기술의 보존의 문제만이 아니라, 5세기 이전 로마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경제적, 정치적 환경의 차이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특수한 산지에서 생산되는 재료를 대량으로 수급하여 대량의 시멘트를 제조하고, 그것으로 전근대 사회로서는 상당히 단시간에 대규모 공공 건축물들을 지어 올리던 로마시대의 대규모 건설작업들은 당연히 지중해 일대를 석권하던 로마제국의 경제력과 행정력 운송망 등 말 그대로 '인프라'와 무관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동로마 제국 시대에는 과거 판테온이나 콜로세움을 세우던 시절과는 크게 다른 사회적, 정치적 환경 속에 있었고, 때문에 과거처럼 대규모 공공건축물들을 빠르게 지을 역량이 축소되었을 뿐 아니라, 애초 그래야할 (주요하게는 정치적) 필요성 자체가 크게 감소했다고 볼 수 있다.[5]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관 위에 대량의 석회를 부었다. 시간이 지나면 강철만큼 단단해 진다.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를 도굴하는 데 실패한 것도 이 때문. 더구나 굳는 과정에서 열이 발생하고 미생물과 잡균을 죽여버리면서 밀폐되기에 시신이 미라로 변하기도 한다.[6] 물론 포졸란 시멘트와 같은 기술이 본질적으로 비교적 제한된 산지에서 자연적으로 얻어지는 재료에 크게 의지하는 것이라는 한계 또한 분명하다.[7] 일반적으로 운수업종에서 채산성은 여객보다 화물 운송이 대체로 더 높은 편이다. 물론 화물의 종류나 여러 환경 등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