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바시 켄타
1. 프로필
2. 소개
[image]
[image]'''いくぞㅡ!!!! (간다ㅡ!!!!)'''[5]
小橋建太
일본의 유명 프로레슬러. 더 화이팅에 등장하는 동명의 캐릭터는 이 프로레슬러에게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3. 커리어
고교 시절, 럭비, 유도를 하다가 1985년 고교를 졸업한 뒤는 교세라에서 평범한 직장인 생활을 했으나 2년 후 1987년 2월 14일 프로레슬링에 입문하기 위해 퇴사해서, 같은 해 12월 16일 코라쿠엔 홀 흥행의 배틀로열 경기에 참가함으로써 전일본 프로레슬링에 데뷔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경기로의 본데뷔는 1988년 2월 26일이다.
데뷔 당시 세대교체 시기를 맞이한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뛰어난 경기력,[6] 보는 사람을 식겁하게 만드는 불굴의 투혼으로 "전일본 4천왕"[7] 이라 불리며 정상급 프로레슬러로 군림했다. 미사와 미츠하루에 밀려 2인자의 위상이었지만 '닥터 데스' 스티브 윌리암스, '불침함' 스턴 한센, 카와다 토시아키 등과 명경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미사와 미츠하루의 자리를 넘보면서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1998, 1999년 올해의 경기에 이름을 올린다.
이후 전일본 선수 이탈사건이 터지며 프로레슬링 NOAH가 창설될 당시 미사와 미츠하루에 이은 주축 멤버로서 노아의 링에 섰다. 전일본 프로레슬링 때 입던 오렌지색 팬츠 대신 검은색 팬츠를 입고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1인자의 자리에 오른다. 2003년 3월 1일에 미사와 미츠하루를 1:1 싱글매치에서 이겼으며, 2004년에는 아키야마 준과 대립했고, 2005년엔 ROH에 원정을 가서 사모아 조와 경기했는데,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2003년, 2004년, 2005년 올해의 경기에 이름을 올린다.
[image]
2005년 7월 18일에 사사키 켄스케와 벌인 시합에서는 무려 300발이 넘는 춉이 나왔고, '''5분'''동안 춉만으로 정면승부한 것이 유명하다.
미국에서도 몇번 경기한 적이 있다. 2005년 10월 1일에 ROH의 링에서 사모아 죠와 경기를 가졌는데, 촙을 시전할 때마다 조의 땀이 사방으로 튀면서 임팩트가 굉장했다. 이 경기는 ROH를 북미 제3단체로 끌어올린 여러 전설급 경기들 중 하나다. 사모아 조가 스티브 오스틴의 팟캐스트에서 밝히길, 코바시 켄타는 미국 관중들이 자기를 모를까봐 자신이 외국인 악역의 역할을 맡으려고 했지만 사모아 조가 평소 스타일로 해도 된다고 만류시켰다. 그래서 코바시 켄타는 평소 스타일로 경기를 하게 되는데, 등장할 때 우렁찬 관중들의 환호를 듣게 되자 코바시는 깜짝 놀랐다. ROH의 관객들은 상당수가 일본 프로레슬링도 비디오 녹화 등으로 접한 사람들이었고, 이를 잘 아는 사모아 조의 조언이 맞았다.
2003년 3월 1일부터 2005년 3월 5일까지 735일 동안 GHC 헤비웨이트 챔피언을 지내는 등 절대왕자로 군림했지만 문설트를 많이 쓰다보니 무릎 상태가 좋지 않아 휴식을 가지기도 하고, 2006년에 신장암에 걸려 선수생활에 위기를 맞았지만 546일만에 복귀해서 많은 팬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팔꿈치 부상을 여러번 당하는 등 몸상태가 성하지 못한 상태에 이르러서, 미사와 미츠하루 사망 사고 같은 사태를 팬들이 우려했다.
[image]
2010년 6월 15일에 결혼을 발표해 프로레슬링 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신부는 전 아이돌이자 현 엔카 가수인 미즈키 마이로, 7살 연하라고 한다. 두 사람은 같은해 10월 2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2015년에 득녀했다.
그리고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프로레슬러를 그만둘 수밖에 없다면서, 2012년 12월 9일 흥행에서 은퇴를 발표한다. # 예매표가 5분만에 매진될 정도로 성황인 가운데 2013년 5월 11일 무도관에서 은퇴시합 'FINAL BURNING in Budokan'이 열렸다.
[image]
코바시 켄타는 메인 이벤트 시합인 8인 태그매치에 출전했다. 태그팀 멤버는 무토 케이지, 사사키 켄스케, 아키야마 쥰 등 같은 세대 최고의 선수들로 구성했다. 한편 상대팀은 KENTA, 시오자키 고, 카네마루 요시노부, 마이바하 타니구치 등 쟁쟁한 후배들이었다.
몸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파워 밤이나 버닝 해머 등 코바시의 한 방을 제대로 어필할 기술은 나오지 않았으나, 카네마루에게 '''문설트 프레스'''를 시전해 핀폴승을 거뒀다. 무릎 뿐만 아니라 온몸 어디 하나 성한 곳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기어코 피니쉬 무브를 문설트 프레스로 택한 점이 절대왕자다운 마무리였다.
프로레슬러 출신 국회의원인 하세 히로시가 코바시 켄타를 좋게 보고 있고, 은퇴 파티 때는 무려 전 총리인 간 나오토까지 와서 축배를 들어 정계 진출 루머가 돌기도 했지만 정치 쪽으로는 안 가고, 대학에서 교수를 하는 한편 1년에 한 번씩 자신이 프로듀싱하는 프로레슬링 흥행을 연다. 많은 단체에서 경기를 보고, 쓸만한 선수들을 매치시켜서 흥행을 여는데, 경기의 질이 높아서 많은 관객들이 관람하러온다. 또 프로레슬링 NOAH의 중요한 경기들을 중계하거나, 현역 프로레슬러들과의 대담을 하는 등 은퇴 후에도 프로레슬링과 관련된 활동을 한다. 참고
AKB48의 恋するフォーチュンクッキー 뮤직비디오에 케니 오메가와 함께 출연했는데, 쿠라모치 아스카가 광팬이라서 나왔다고 한다. 쿠라모치 아스카 졸업 콘서트에도 방문해 격려를 해주었다고 한다.
4. 사용 기술
문설트 프레스와 오렌지 크러쉬, 하프넬슨 수플렉스, 슬리퍼 스플렉스, 롤링 케사기리 춉, 래리어트#가 그를 대표하는 기술이며, 가뭄에 콩나듯 버닝 해머라는 봉인기를 사용한다.[8][9]
데뷔 초창기엔 문설트를 매 경기마다 쓰다가 무릎부상으로 병원신세를 지면서 오렌지 크러쉬, 풀 넬슨 바디 시저스, 켄타키 밤[10] , 다이아몬드 헤드[11] 등 피니쉬 무브를 여러번 바꾸다가 프로레슬링 NOAH에서 강완 래리어트로 완전히 정착했다. 근육량이 일반인의 3배라서, 두꺼운 팔뚝으로 사정없이 후려치는 래리어트는 브래드쇼의 '클로스라인 프롬 헬'에 필적하는 위력을 보여준다.
그 외의 주력기인 하프넬슨 수플렉스는 하프넬슨 상태에서 그대로 뒤로 던지는 수플렉스로, 고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접수자의 정수리가 바닥에 박히는 흉악한 기술이다. 쵸노 마사히로는 이 기술을 맞은 후 "머리에 혹이 나는 수플렉스는 처음이다"라며 감상을 밝혔다.
사람 죽겠다 싶은 강력한 기술을 몇번씩 얻어맞고도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투혼과,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맞은 이상으로 되갚아주는 화끈한 시합 운영 덕분에 현역 때 최고의 인기를 얻었다. 니코니코동화 프로레슬링 덕후들은 그의 테마인 GRAND SWORD를 국가(國歌)라고 할 정도(...)이며, 무한도전 WM7 9월 11일차에 오프닝으로 나왔다.
[image]
머신건 찹
머신건 챱은 코바시 켄타의 엄청난 근성을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기술 중 하나로, 미국에서 춉의 달인이 릭 플레어라면 일본에서는 코바시 켄타가 꼽힌다.
5. 에피소드
- 그가 톱 프로레슬러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전일본 프로레슬링 입단 당시부터 꾸준했던 엄청난 연습량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 연습생 시절 자이언트 바바의 심부름꾼으로서 하와이에 갔을 때 훈련만 거듭하고 있던 코바시 켄타를 보기가 힘들었던 바바가 '쉬는 것도 연습이니 쉬어라'라고까지 말했다고 하며, 코바시의 경기를 해설하던 도중에 '코바시는 취미가 연습'이라고 말할 정도였다.[12] 코바시 켄타의 과도한 훈련을 보고 한 중견선수가 비웃었던 적이 있었는데, 당시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간판 스타였던 텐류 겐이치로가 '너는 지금 웃고 있지만 곧 이 녀석(=코바시)에게 먹히는 날이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후배 아키야마 준이나, 제자 KENTA조차 코바시의 과도한 훈련량을 따라가지 못해 병원에 간 적도 있다. 2002년 무릎부상에서 복귀하기 전에 하와이 훈련에 동행했던 KENTA가 마지막날에는 '제발 오늘은 쉬게 해주십시오'라고 간청했던 적도 있다.[13]
- 엄청난 훈련량 때문에 근육량도 많아서, 신장암 수술을 받을 때 근육 때문에 평균 수술 시간의 두배 가량이 걸렸다고 한다. 2005년에 ROH 원정 경기를 뛰었을 때, 사모아 죠에게도 전혀 밀리지 않는 어마어마한 덩치를 자랑했다.
- 보통 선수들은 한번만 당해도 선수생활이 위태로울 몸의 이상(신장암, 무릎부상, 팔꿈치부상 2번)을 여러번 극복하고 복귀했으며, 현역으로 활동할 당시 보여줬던 엄청난 파이팅 때문에 철인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또한 '절대왕자'라는 별칭은 일본 프로레슬링 역사상 '최장기간, 최다횟수 타이틀 방어 기록'(13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붙었다.
- 대단한 인품의 소유자로, 전일본 프로레슬링을 이탈했을 때 코바시 켄타가 미사와 미츠하루를 지지해주지 않았다면 프로레슬링 노아는 미사와의 원래 계획대로 중소 단체가 되었을 것이다.[14] 팬서비스도 엄청나서, 경기 후 사인을 받으러오는 사람들을 사양하지 않고 다 해주었는데, 그의 제자였던 시오자키 고의 말에 따르면 한번은 100미터 가는데 1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내 파벌이나 정치에도 관심이 없어 미사와 미츠하루가 죽고, 프로레슬링 NOAH가 내란에 휩싸였을 때도 묵묵히 연습하고 있었다고 한다.
6. 둘러보기
[1] 다양한 엘보 기술을 사용한 미사와 미츠하루와 마찬가지로 가장 흔한 역수평 찹 외에도 다양한 찹을 사용했다.[2] 가장 대표적인 테마곡[3] 활동 초기에 사용했던 테마곡[4] 프로레슬링 노아 이적 후 사용한 테마곡. 그러나 이후 다시 Grand Sword로 변경[5] 자신의 피니쉬 무브인 버닝 래리어트를 시전하기 직전에 선보이는 퍼포먼스.[6] 프로레슬링 평론가인 데이브 멜처가 코바시 켄타의 경기에 두 번째로 많은 5성 만점을 줬다. 1위는 미사와 미츠하루.[7] 미사와 미츠하루, 코바시 켄타, 카와다 토시아키, 타우에 아키라 4명이다. 이후 아키야마 준이 가세하면서 5강(五強)이 되었다.[8] 아르젠틴 백브레이커(=토처랙) 자세에서 옆으로 몸을 기울여 상대를 머리부터 고각으로 떨어뜨리는 인버티드 데스벨리 드라이버[9] 버닝 해머는 코바시 켄타의 커리어에서 총 5번 나왔는데, 미사와 미츠하루가 3번, 프로레슬링 NOAH 창단 이후 최고 에이스였던 아키야마 준이 2번 맞았다. 시전하는 데 성공한 경기는 전부 승리했다. 변형 기술인 리스트 클러치식 버닝해머의 경우 전일본 프로레슬링 최강의 사나이었던 타우에 아키라 및 자기 제자이자 프로레슬링 NOAH의 주니어 헤비급 최강의 자리를 지키던 KENTA를 합처 딱 2번뿐이다. 즉 버닝 해머는 커리어 내내 10번도 안 쓴 기술이다. [10] 펌프핸들 자세에서 그대로 싯다운 파워밤으로 연결한다. 본인은 기술 이름을 짓지 않았으나, 어떤 프로레슬링 기자가 본인의 동의없이 이름을 붙인 것에 격분해 봉인했다.[11] 파워 밤 자세에서 사이드워크 슬램으로 연결하는 기술. 그러나 첫 시도 때 실수를 저질러 가네마루 요시노부의 늑골이 골절되자 그대로 봉인했다.[12] 자이언트 바바도 소싯적 연습량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정도로 연습을 많이 했는데, 그 바바가 쉬어라 할정도면...반면에 또다른 사천왕이였던 타우에 아키라는 연습량이 모자른 선수였는데 자이언트 바바는 '연습을 코바시의 반만이라도 했으면'이라는 말을 남겼다.[13] 그래도 kenta에게는 도움이 됐는지 전성기땐 몸무게가 50KG차이나는 모리시마 타케시에게도 고투슬립을 깔끔하게 날렸다. [14] 물론 미사와 역시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제일가는 마당발에 인격자라 그에게 신세진 사람도 많았다. 그렇기에 코바시도 미사와를 따라서 전일본을 나왔던 것.[★] 밑줄이 승리자. 다자간 매치의 경우 이름 옆 (O)가 핀폴자, (X)가 피핀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