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와다 토시아키
1. 프로필
2. 소개
미사와 미츠하루의 고등학교 1년 후배로 함께 레슬링부에 있었으며, 미사와를 따라 전일본 프로레슬링에 입단하였다. 이후 텐류 겐이치로가 전일본 프로레슬링을 떠나면서 동세대의 미사와 미츠하루, 타우에 아키라, 코바시 켄타 등과 함께 왕도 프로레슬링으로 대표되는 전일본의 황금시대를 이끌어나가는 주역이 된다. 전일본 프로레슬링 4천왕의 일원으로서 카와다 토시아키의 역할은 무적 선역인 미사와 미츠하루에 맞서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라이벌이었다. 1990년대에 미사와 미츠하루, 스턴 한센, 코바시 켄타와 싱글 매치로 맞붙는 한편 타우에 아키라와의 태그로 미사와 미츠하루 & 코바시 켄타, 미사와 미츠하루 & 아키야마 준 등을 상대해 많은 명경기를 만든다.
미사와 미츠하루에게 있어 필생의 라이벌로, 1990년대에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올해의 경기 10위 안에 여러 경기를 올린 유명한 퓨드였다. 특히 1994년 6월 3일의 삼관 헤비급 챔피언십 경기는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1994년 올해의 경기 2위에 이름을 올린 한편 데이브 멜처에게서 사상 처음으로 6성을 받았다. 1999년 1월 22일엔 상대의 정수리를 바닥에 내리꽂는 삼관 파워 밤을 미사와 미츠하루에게 처음 선보였다. 이 기술은 미사와 미츠하루에게 두 번, 무토 케이지에게 한 번으로 카와다 토시아키의 커리어 내내 세 번만 나온 극악한 기술이다.
자이언트 바바 사후 전일본 프로레슬링을 이탈한 이들이 프로레슬링 NOAH를 설립할 때 후치 마사노부, 타이요 케어와 함께 전일본에 남는다. 이후 무토 케이지 체제 하의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2005년까지 선수로 뛰는 한편 신일본 프로레슬링과 프로레슬링 NOAH 등의 링에서 전일본 시절의 동료와 타단체 소속인 이들을 상대로 경기를 뛴다.
전일본 프로레슬링 소속을 그만두고 프리 신분이 된 후 HUSTLE 등의 단체에서 이전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코믹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시기에 기존의 파워 밤이나 스트레치 플럼 대신 데인저러스 킥과 데인저러스 DDT를 피니쉬 무브로 민다. 하지만 미사와 미츠하루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카와다 토시아키는 더이상 "힘을 낼 수가 없었다"고 고백하며, 결국 2010년 이후 경기를 뛰지 않으면서 사실상 은퇴하였다. 후에 인터뷰에서 은퇴 선언을 해놓고 번복하는 게 싫기도 하고, 만에 하나라도 복귀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은퇴 선언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링을 떠난 후 <면져러스 K(麺ジャラスK)>라는 라멘 집을 운영한다. 공식 SNS
현역 시절에는 이시카리 타이치 등 여러 제자들을 육성했다. 프로레슬링과 거리를 둔 모습을 보이던 카와다 토시아키는 2018년 3월 13일에 기자회견을 가지면서, 본인이 프로듀스한 흥행인 'Holy War'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겠다고 발표한다.
왕도 프로레슬링의 정점이라고 할수있는 전일본 5강 중에서도 뛰어난 경기운영능력을 자랑하는 선수였다. 특히 상대의 프로레슬러로서의 기량이 떨어지더라도 명경기를 여럿 만들어낸것으로도 유명한데 대표적으로 유도가나 격투가로서는 괜찮았지만 프로레슬러로서는 함량미달이라는 평가를 받은 오가와 나오야와 후지타 카즈유키 같은 선수들과도 명경기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현역시절의 카와다 토시아키를 말해보자' (공국진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