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자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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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tih 1453
1. 개요
2. 줄거리
3. 비판
4. 터키 정부와 정치권의 밀어주기


1. 개요


2012년터키에서 만들어진 1453년콘스탄티노플 함락에 관한 영화. 터키에서 2012년 흥행 1위를 차지했다.

2. 줄거리


줄거리는 일단 거의 천년 전 예언자 무함마드(얼굴이 안 나온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을 예언한다. 메흐메트 2세가 태어난 해에 오스만 제국에서는 과일나무에 과일이 무성히 열려 가지가 휘어지고, 말은 쌍둥이 망아지를 낳으며, 밭에서 이모작이 가능해지는 길조가 나타나는 반면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선 일식이 일어난다.
기술자 우르반은 똑똑한 여자를 양녀로 삼고 있는데, 이 여자는 이슬람교도로 어릴 때에 십자군의 학살로 부모를 잃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노예로 팔리다 이를 불쌍히 여긴 우르반에게 양녀로 들어간 사정이 있다. 덕분에 기독교 국가를 매우 싫어한다. 동로마 제국의 재상 노타라스는 우르반에게 대포를 주문하지만 우르반은 무기를 만들고 싶지 않다고 거부한다. 그러자 노타라스는 밤중에 군사를 보내 우르반을 죽이려는데 오스만 제국의 군사가 이를 구출해내고 우르반은 고맙다며 양녀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킬 대포를 만든다.
메흐메트 2세는 권력 기반이 불안정하고 적들에게 유약한 군주라며 얕보이는 상황에서 동로마와 내통하는 할릴 파샤[1]와 반기를 들었던 카라만공국을 용서해주는 대인이다. 꿈 속에서 오스만을 건국한 오스만 1세를 만나고 신이 자신에게 사명을 주었다는 생각 끝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공격한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지 않고 공방전이 길어지자 좌절하여 천막에서 수일 동안 나오지 않지만, 위대한 백색의 이맘에게 격려받은뒤 배를 산으로 옮기고 대공세를 펼친 끝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다. 죽은 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를 로마인 방식대로 장례를 치를 것을 허가해주고, 하기아 소피아에 들어가 공포에 질린 동로마 민간인들에게 자유를 보장하고 활짝 웃으며 여자아이를 안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2][3]

3. 비판


터키 기준에서만 만들어진 영화라 역사왜곡에 찌든 부분이 있는데 전반적으로 메흐메트 2세는 무슨 관대한 해방자로 그려지는데 비해 동로마 황제와 귀족들은 교활하게 정치공작을 일삼고, 향락에 젖어있으며, 절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지 않는다는 오만함에 찌들었으며 동로마 민간인들은 가톨릭의 약속을 믿느니 술탄의 관용을 믿는 것으로 묘사된다.[4] 동로마 병사들은 도발하기 위해 투르크 포로들을 모욕하고 성벽에 목매달아 죽이는 등[5]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오스만군이 함락 이후 도시를 약탈하는 장면은 나오지도 않는다.
또한 우르반에 대한 것도 동로마 제국도 우르반을 포섭하려고 했으나 자금 지불을 못해서 우르반이 가격을 더 부르는 오스만으로 간 것으로 영화처럼 노타리스가 동로마 병사들을 보내서 체포하려고 했다거나 우르반이 거절한 것은 아니다. 단지 동로마 제국 국고로써는 감당이 안됐을 뿐.[6] 이밖에 해군으로서 콘스탄티노플 방어에 적극 협력했던 베네치아군의 모습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거나, 일개 시파히 부대장에 불과했던 울루바틀르 하산(Ulubatlı Hasan)이 메흐메트의 절친으로 나온다거나 등등.
그래도 제국 재상 노타라스는 통찰력이 좋은 것으로 묘사되며, 황제도 능력은 부족하지만 최후의 순간에 노타라스의 도망 권유를 받고도 명예를 지켜야 한다며 도망가지 않는 것으로 연출되는 등(죽는 순간이 나오지는 않았다) 터키인기준으론(...) 나름 공평하게 표현하려 애쓴 것으로 보인다.
멸망 직전의 동로마 제국이 여는 전차경주가 정말 웅장해 과연 이 나라가 멸망 직전의 그 나라 맞나 의심케 한다. 멸망 직전에 문화적으로 화려한 모습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실제 역사의 동로마 제국보다는 차라리 오스만 제국의 또다른 적국이었던 티무르 제국의 멸망 직전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7]
영화 자체는 그냥 킬링타임용 영화다.

4. 터키 정부와 정치권의 밀어주기


상영 당시 에르도안과 터키 정부가 이 영화를 지원을 했고 터키 정치권에서는 영화를 칭찬, 두둔하는 발언을 하면서 대놓고 밀어주면서 흥행 몰이를 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민간에서 제작해 방영한 사극 드라마 위대한 세기에 대해서는 에르도안이 이슬람교와 오스만 제국 술탄의 위엄을 깎아 내린다며 비난하는 이중적 잣대를 들이댔다.
당연히 나올 때 정복된 당사자이자 현대에 와서도 비잔티움 제국과 마케도니아 왕국에 열광하는 그리스와 오스만 제국의 지배와 침략을 받았던 헝가리, 루마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아르메니아, 이라크, 시리아, 쿠웨이트 같은 동유럽/중동 국가들과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은 것과 동시에 섬 영토 절반이 오스만 제국의 후신인 터키군에게 점령당한 키프로스에서는 역사왜곡물이라며 당시 해당국가의 네티즌들이 치를 떨며 이 영화를 비난했다.

[1] 실제로는 포위를 풀고 퇴각할 것을 여러 번 주장했을 뿐 내통한 사실은 없었다. 그러나 정복 사흘 만에 이를 구실로 숙청당했다.[2] 실제로는 3일간 약탈당했으며 하기아 소피아에 들어간 민간인들도 학살당하고 여성들은 강간당했으며 생존자들은 인질 또는 노예로 끌려갔다. 메흐메트 2세는 여기를 수도로서, 자신들의 종교적 건축물로 쓰기 위해 훼손될까봐 성당의 건축물에 흠집을 내지 말라는 것만 명령했다. 나중에 상황이 안정되자 메흐메트 2세는 이를 모두 금지시켰다.[3] 그리고 동로마 제국 사람들 가운데 몇 무리들은 배를 타고 도망가 서유럽으로 갔고 르네상스의 문화를 꽃피우게 만들어 준다... 라는건 한참 옛날 학설이고, 이미 14세기 말부터 서유럽은 플랑드르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비잔티움에 뒤지지 않는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포위전 이전에 구원을 요청하러 이탈리아로 간 비잔티움 사절단들이 그곳의 최신 문화에 눈이 휘둥그래졌을 정도(Harris, 2010).[4] 이건 '''절반은''' 사실이었다.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동로마 제국 내에서는 가톨릭에 대한 반감이 몹시 심해졌으며 실제로 교황의 관보다 술탄의 터번이 차라리 더 났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 메흐메트를 정식으로 인정한 총대주교 게나디우스도 그런식으로 생각했다.[5] 실제로는 오스만군이 동로마군을 도발하기 위해 동로마 포로들을 공개처형한것에 대해 분노하여 그 보복으로 동로마군이 오스만 포로들을 처형했다.[6] 그 당시에 만든 우르반 거포는 현대 탱크보다 더할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발산하는데 그만큼 주조 비용이 컸다. 한 마디로 건물 3층 높이 이상의 거포인데 그러려면 얼마나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가? 아직 신생으로 다시 세운 동로마 제국상 이걸 살 수 없으니 거절한 거다. 우르반은 그냥 돌아다니다가 메흐메트 2세에게 언플로 비용을 받아 제조한 것 뿐이다. [7] 실제로 멸망 직전의 티무르 제국은 문화적 역량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