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만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정양필은 그의 아들이다.
2. 생애
정순만은 1873년 3월 3일 충청도 청주목 서강외이하면(현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6년 3월 이승만, 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 창립에 참여하였으며,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 도총무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이승만, 유근, 나철, 안창호, 남궁억, 양기탁 등 367명과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02년부터 1904년 사이에 이승만, 박용만과 의기투합해 의형제를 맺고 독립운동을 함께 하기로 했다. 세상은 그런 그들을 가리켜 '삼만(三萬)'이라 불렀다.
이후 만주로 망명한 정순만은 간도 용정에서 이상설, 이동녕, 여준 등과 함께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학생들에게 민족교육과 독립사상을 주입시키고자 노력했다. 또한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으며, 1907년에는 안창호, 김구, 이동녕, 이동휘, 양기탁, 이회영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했다. 또한 헤이그 밀사의 여비 1만 8천 원을 교포로부터 모금하여 이상설에게 전달했으며, 한인거류민회의 총무 겸 서기로 있으면서 국내와 연해주 한인 사회를 잇는 가교 역할도 맡았다.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 위하여 〈해조신문〉을 발행하였고, 논설 지면을 통해 교육 특히 여성 교육을 강조하였다.
1908년 〈대동공보〉에 가담해 윤필봉, 미하일로프와 함께 주필을 맡았으며, 1908년 11월 15일 공립협회에 가입하고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 지방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08년 5월경 항일 의병을 추진하기 위한 의병 결사 단체인 동의회(同義會)의 창립에 참여했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암살하는 걸 돕기도 했다.
그러나 1910년 1월 23일, 그는 같은 독립운동가인 양성춘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후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1910년 11월 초 3개월 금고형 및 정교회 사원에서 참회하라는 판결을 받았다.(자세한 내용은 양성춘 문서 참조) 1911년 2월 8일 풀려난 그는 엄인섭, 윤일병, 홍범도 등과 함께 국내 진격을 위한 의병 부대 창설을 논의했지만 1911년 6월 21일 양성춘의 아내 전소사에게 살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정순만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