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준(독립운동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여준은 본명이 여조현(呂祖鉉, 呂肇鉉)으로 1862년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죽릉리에서 아버지 여규필(呂圭弼)과 어머니 해주 오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어떻게 성장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외가인 해주 오씨가 용인 일대에서 상당히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가가 세운 서당에서 공부하며 기초적인 학문을 익혔을 것으로 추측된다.
훗날 그와 함께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허은이 집필한 <아직도 내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 따르면, 여준은 1906년 해주 오씨와 결혼했는데, 처음 본 색시가 바보같아서 돌아나오려 했지만 그래도 버리면 안될 것 같아 하룻밤을 잤고 아들을 갖자 아들의 이름을 운달(運達)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성인이 될 무렵, 여준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한 뒤 관직을 역임하고 있었던 재당숙 여규형(呂圭亨)의 소개로 이상설, 이시영 등 여러 유생들과 교제했다. 그리고 1885년에는 이상설, 이시영, 이회영 등과 함께 한문 뿐만 아니라 신학문도 섭렵했다. 여준은 1888년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을 대상으로 치루는 응제(應製: 임금의 명령에 따라 시문을 짓는 시험)에 응시해 급제했고, 1896년 성균관 관장이 된 이상설이 여준을 발탁하여 성균관 직원에 임명했다.
그러나 얼마 후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하고 친러 세력이 득세하는 등 정국이 혼란해지자, 여준은 이상설과 함께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여러 친우들과 교유하면서 외국의 신간서적을 구햅해 신사조를 더욱 연구하는 한편 개화 혁신을 통해 국가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새로운 방도를 준비했다. 또한 이준은 외국의 서적들을 번역, 배포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대중의 신 사상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고자 노력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감행한 일제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해 한국의 내정과 외교를 간섭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또한 일본 정부는 1904년 초부터 나가모리 토키치로를 통해 황무지 개척권 위임 계약을 추진해 한국정부와 비밀리에 협상했다. 그러나 이 협상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자, 일제는 6월 6일 주한공사 하야시 곤스케를 통해 대한제국 외교부에 황무지 개척권을 일본인에게 양여하라고 요구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6월 22일 당시 종2품 가선대부였던 이상설은 종3품 종정대부 박승봉(朴勝鳳)과 함께 연명으로 반대 상소를 올려 황무지를 외국인에게 일임해서 재원을 막는 것은 백성들에게는 여유가 없고 국가에는 해악을 미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나가모리의 요구를 절대 들어주지 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05년, 일제는 러일전쟁 승리 후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이에 이상설은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을사오적을 처형하고 조약 폐기를 선언하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준이 이 과정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지만 이상설 등과 만나며 신학문에 관한 책을 읽고 토론한 것을 보면 이상설과 비슷한 생각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2.2. 애국계몽운동
1906년 4월, 이상설은 한반도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그들은 황달영, 정순만, 김우용, 홍창섭 등을 만나 함께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짓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는 한인 자제들을 가르쳤다. 여준이 언제 연해주에 가서 서전숙에 참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여준은 1907년 헤이그 특사 중 한 사람인 이준이 뒤늦게 연해주에 들어왔을 때 그를 안내하여 이상설과 합류하게 했다고 한다. 또한 이관찬(李觀稙)의 <우당 이회영 실기>에 따르면, 이회영은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가게 되면서 서전서숙을 떠나게 되자 여준을 만주로 보내 서전서숙의 운영을 맡겼다고 한다. 이로 볼 때 여준은 1907년 4월 이후에 서전서숙에 합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준은 서전서숙의 숙장(塾長)으로서 운영을 전담했지만 이상설의 헤이그 특사 여비를 학교 재정에서 충당했기 때문에 곧바로 재정난에 빠졌고 통감부 간도파출소의 감시와 방해에 시달리다가 결국 스스로 폐교해야 했다. 이후 그는 이동녕, 황공달(黃共達) 등과 함께 귀국하여 신민회에서 활동했고 1907년 12월 이승훈이 오산학교를 설립할 때 참여했고 교원에 발탁되었다. 그는 자신이 평소 탐독하던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주변에 설명하며 널리 읽게 했으며, 오산학교에서 음빙실문집을 교과서로 사용한 것엔 그의 의사가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여준은 교원으로서 수신, 역사, 지리, 산술, 대수, 국가학, 법학통론, 한문, 헌법대의 등을 맡아 가르쳤다. 이광수는 훗날 여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당시 이승훈은 마산도자기회사 사장 겸 신민회 평안북도 총감을 맡고 있을 때여서 평양, 서울 등지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학교 일은 여준이 맡아서 수행했다. 당시 오산학교에 재학했던 김기홍은 <삼천리>에서 여준이 오산학교 교장이었다고 기술했다. 이는 당시 학생들이 여준을 교장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그가 교무 업무를 총괄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럴만도 한 것이, 여준은 오산학교라는 학명을 손수 써서 새기고 그 아래 영어로 Five Mountain School'로 적었으며, 학생들이 쓰는 모자를 제정해 검은 모자에 두르는 흰줄을 착용하게 했으며, 교가를 짓고 학생들이 모일 때마다 애국가와 교가를 부르게 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기 때문이다. 이때 여준이 지은 교가의 첫줄은 아래와 같다.내가 오산학교에 부임했을 때 교원 중에서 가장 어른 되는 분은 여준이었다. 그는 백발이 성성한 노학자로서 키는 작고 목소리는 크고 야무졌으며 높은 식견을 가진 애국지사로서 학생들에게 많은 감회를 주었다.
오산학교 1회 졸업생인 김도태의 <남강 이승훈 전기>에 따르면,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안중근에게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여준은 전 교생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고 한다.뒤 뫼의 솔빛은 항상 푸르리
비에나 눈에나 변함없이
이는 우리 정신 우리 학교로다
사랑하는 학교 오산학교
1910년 7월 1일, 여준은 오산학교 제1회 졸업식에서 11명의 졸업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지금 남강 선생이 하신 말씀과 같이 우리의 원수 이토는 죽었다. 이토가 죽었다고 우리가 안심할 수는 없다. 이토 대신 또 나올 놈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니 우리는 윤청년[1]
의 뒤를 이어 제2, 제3의 윤씨를 모으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등박문은 우리 나라를 먹으려 하지 않고 우리나라를 계발시켜 동양 3국이 서로 붙들고 나아고 서양의 백인족 나라들과 대항하려는 원대한 이상을 가진 위대한 정치가라고 선전하는 자들도 있으나 우리는 그 자들의 모략에 속아서는 안된다. 우리가 그 모략에 속지 않는 것도 원수를 죽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이토가 우리나라를 빼앗으려 왔다는 증거로 말하면 러일전쟁이 끝난 다음에 배상금을 받지 못하였다고 동경시민들이 히비야 공원에 모여 폭동을 일으켰을 때 이토가 일본정부를 대표하여 그들 앞에 나타나 "우리가 배상을 못 받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익을 얻은 것을 국민들은 모르는가. 즉 한국에 대한 우월권을 우리가 가지게 된 것은 한국을 우리 마음대로 요리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내가 여러분 앞에서 맹세하는 바이거니와 내가 한국에 나아가 그 영토를 우리 일본 제국의 영토 안에 집어넣고야 말 터이니 여러분은 안심하고 돌아가라."라는 연설을 하지 않았는가. 무엇이 한국을 위한다는 말인가.
그 자가 우리나라에 와 5조약, 7조약을 맺은 것이 모두 우리나라를 자기네 수중에 넣고자 하는 행동이었다. 그 자는 도리어 우리가 모르는 중에 스루스루 집어넣자는 계획이었다. 다시 말하면 구렁이 닭알 훔쳐먹듯이 남 모르는 동안에 먹어버리겠다는 심사로 무슨 동양삼국이니 이웃나라끼리 도와나가야 한다는 등의 거짓말을 만들어 어리석은 우리 국민을 속이려는 것이다. 우리는 깨어야 한다. 일어나야 한다. 속지 말고 우리나라 민족을 위하여 일로매진하자.
한편, 여준은 신민회 회원으로서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에 파견되어 교육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상동청년학원은 당시 신민회의 자강운동의 일환으로 건설된 교육기관으로, 여준은 오의선과 함께 이 학원의 교사로 일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고향인 원산면에 삼악학교(三岳學校)를 세웠다. 삼악학교는 초등 과정 정도의 학교로, 산술, 체조, 지리, 역사, 수신 과목을 가르쳤다. 하지만 여준은 이 학교의 운영을 오태선과 오용근에게 맡겼고 자신은 1911년 오산학교 교원을 그만두고 자신의 가족과 형의 가족을 대동해 압록강을 건너 간도 일대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나는 내가 생각한 바를 다 가르쳐 보내지 못하는 것이 큰 한이다. 그러나 배운 것만이라도 그대로 실행하여라. 천만가지 재주를 배웠더라도 실행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니 우리가 4년 동안에 나라를 사랑하라, 민족을 구하여라 하는 말은 남강선생 이하 여러 사람이 귀가 아프도록 말한 것이니 그것만 실행하여 준다면 아무 근심이 없노라.
2.3.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간도로 건너간 여준은 1912년 합니하(哈泥河)에 도착한 뒤 그곳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에서 교육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우선 재정난에 시달리던 신흥무관학교를 지원하기 위해 이탁(李鐸) 등과 함께 신흥학교 유지회를 구성하고 서간도 각 지방에서 차출해 운영비를 충당하게 했다. 또한 신흥무관학교에서 영어 등을 가르쳤고 1913년에는 이상용(李相龍)의 뒤를 이어 교장에 취임해 학교 운영을 담당했다.
그는 신흥무관학교 경영에 전력을 기울였다. 1916년 음력 10월 17일 양기탁이 안창호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이탁과 여준 두 형님이 학교 일을 주관하고 있다"고 했으며, 허은은 <아직도 내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여준의 학교에서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여준씨가 이 학교의 영어선생이었다. 그는 체구는 작았지만 다부지게 생겼다. 추위를 안 타서 다른 이들은 털모자를 쓰고 다녀도 그는 안 썼다. 큰 오빠 말로는 신흥무관학교에 다닐 때 여준 선생이 그렇게 모질다고 했다. 벌을 세워도 매섭게 세운다고 했다.여준은 1915년에서 1916년 사이에 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민단(扶民團)에서도 활약했다. 부민단은 만주 땅 부여의 옛 영토에서 부여 유민의 부흥 결사를 세운다는 의미로 명명된 것으로, 이들은 이주민들을 지켜 부양하면서 일제에 의해 망해버린 한국을 만주에서 부활시키려 했다. 여준은 류허현(柳河縣) 방면에서 이 단체의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했다.
이후 여준은 1917년 12월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그만두고 정안립(鄭安立) 등과 함께 동성한족생계회를 조직해 국내에서 만주로 이주한 동포들에 대한 구제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가 독일과 평화조약을 맺었으니 독일과 중국의 평화가 성립되면 독일, 러시아, 중국이 연합하여 일본에 대한 군사행동을 벌일 것이라 예상했다. 이에 그는 세 국가에 일본의 군사적 정보를 제공하면 독립운동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요원을 양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본 총독부에게 간파당했고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여준은 이후에도 길림을 중심으로 동성한족생계회에서 활동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했고, 1919년 2월에는 길림에서 조소앙 등과 함께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정령(正領)으로 추대되었다. 지산 정원택의 <지산 외유일기>에 따르면, 1919년 2월 27일 길림성 여준의 자택에서 여준, 박찬익, 황상규, 김좌진, 정원택, 정운해 등이 모여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했고 다음날 긴급회의를 열고 앞으로 할 일을 의논해 가까운 여러 곳과 구미에 독립선언서를 보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후 대한독립의군부는 1919년 3월 초 조소앙이 기초한 <대한독립선언서>를 3월 11일에 각지에 배포했고, 이 과정에서 여준은 주도적 역할을 했다. 또한 여준은 박찬익 등과 함께 길림에서 길림군감독부를 조직해 항일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 단체는 대한독립의군부의 후신으로 무장투쟁을 주창했다. 김좌진, 조성환, 박성태 등의 대종교 교인이 다수 가담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나중에 서일의 대한정의단과 합세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결성했다.
한편, 여준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담해 부독판(副督辦) 직책을 맡았고, 1919년 10월에 윤세복과 함께 급진단(急進團)을 조직하고 그 단장으로 취임해 한국인 독립지사를 규합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으며, 이를 위해 장백산 부근에 사무소를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 또, 그는 하얼빈에서 러시아를 통해 군용총 500정을 구입했으며, 당시 급진단이 있는 화진현(樺甸縣)에 모여진 군용총은 3,000정에 달했다고 한다.
1920년 12월 4일 임시정부 간서총판관부 설치에 관여한 여준은 총판(總辦)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만주 일대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안창호가 임시정부 내에서 주창한 외교론에 반발해 무력 항쟁론을 역설했기 때문에, 임시정부와 이들간의 연대는 잘 이뤄지지 못했다. 또한 임시정부는 1920년 10월에 벌어진 간도 참변에 무기력하게 대응해 만주 일대의 독립운동 세력에게 실망감을 안겨줬다. 그래서 서간도의 여준 이하 3명과 북간도의 박재눌(朴載訥) 외 13명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보>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들어 임시정부를 비판했다.
결국 서로군정서는 1921년 4월 베이징에서 개최된 군사통일회의에 참석해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해 5월 26일,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액목현(額穆縣)에서 회의를 열어 임시정부를 개정하고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 임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여준은 이벽(李沰), 김동삼(金東三), 곽문(郭文), 김진삼(金震三) 등과 함께 결의서를 작성해 서간도 출신 의원이자 의정원 의장이었던 윤기섭에게 발송했다.1. 우리의 독립운동을 가치 없게끔 세계에 선전하는 자료에 증거를 만든 일
2. 우리의 독립운동이 확실한 실력이 없다는 것을 폭로하여 일본의 대타격을 받은 동삼성 동포의 인심을 다시 모으기 어렵게 한 일
3. 다수 생명을 희생한 각 단체에 대하여 비평한 일
4. 우리의 파리 평화회의 대표를 허위 날조하여 세계에 알리게 한 일.
5. 정부는 재미 국민회의 성의만을 인정하고 타 단체원에 반감을 느끼게 한 일.
그러나 임시정부의 개정이 기대에 못 미치자, 여준은 신흥무관학교에 돌아와 교육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신흥무관학교를 액목현 황지강자(潢池崗子)로 옮겨 검성중학교(儉成中學校)를 세웠으며 자신은 검성중학교(금성중학교) 교장으로 선임되었다. 허은은 검성중학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본인 등은 시국에 대한 고충과 개탄과 갈망으로 본월 26일 액목지방의 비공식회의에서 이유 및 조건을 다음과 같이 결의했으니 양해가 있기를 원함.
조항
1. 현재의 간서대의사(間西代議士)중개하여 임시의정원에서 정부를 개조하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제안함.
2.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이 확실한 이상 이 행위의 주창자는 즉시 물려나도록 명령할 것.
3. 의정원에 제출한 개정의안이 채택되지 못할 때에는 현재 서간도 대표를 소환한다.
4. 위 의안(議案)이 결정되기 전에 본 기관 대표의 명의로써 정부를 파괴하려는 제3 단체의 참가를 허가하지 말 것.
5. 서방에 대한 제의 또는 권고가 무산될 때에는 간서는 간서 자체를 스스로 물러날 것임.
6. 위 항목 실행을 희망하며, 이진산(李震山)을 특파하는 바 자세한 것은 특파원의 구술에 위임함.
여준은 이 학교에 7~80명, 많게는 100여 명의 학생들을 모아 조선어, 영어, 수학, 지릐등을 가르쳤고 군사훈련을 병행했다. 또한 그는 이곳을 서로군정서의 새로운 산실이라고 생각하고 둔전제를 실시해 장기 항일 투쟁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금성중학교가 남만청년동맹에 침투로 의해 사회주의에 물들자, 여준은 관계를 끊고 1930년 7월 북만주 위하현가(葦河縣街)에 위치한 김광택(金光澤)의 집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고문으로 참여했다.남만주의 난리 후에 신흥무관학교는 길림성 액폭현 교하에 옮기고 금성중학교로 이름을 고쳤다. 교장에 여준 선생님, 평교사에 오광선 선생님이 맡았다. 오광선씨는 여준 선생의 처족조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동안 남만청년동맹의 청년들이 금성중학교를 점령하려 했지만 홀홀히 그들 뜻대로 물려줄 리가 없었다.
2.4. 최후
만주사변이 발발했을 때, 여준은 우창시에서 살다가 1932년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허은의 증언에 따르면, 여준의 독자인 여운달이 중국 병사들에게 잡혀가자 자기 아들이 죽으면 자신도 죽겠다고 하며 집에 불을 질러 아내와 함께 불타 죽었다고 한다. 또한 <오산학교 80년사>에 따르면, 여준이 일본군에 의해 아들이 잡혀가자 부인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고, 여준이 일본 관헌에게 아들을 보게 해달라고 해도 들어주지 않자 자기 집에 불을 질러 불타 죽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여준은 중국 군대에게 모진 매를 맞고 죽었다고 한다.
그가 죽었을 때 아들 여운달은 중국군에게 피살되었고 아내 또한 같이 죽었으며, 친척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그의 유해가 묻힌 곳이 어디인지는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았으며 후손도 남아있지 않다. 그저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단에 위패가 모셔졌을 뿐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여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또한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2012년에 삼악학교 터 표석을 설치해 그의 독립정신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