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기계화보병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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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육군 제7기동군단 수도기계화보병사단예하 '''제26기계화보병여단'''. 별칭은 '''혜산진부대'''. 경기도 가평군에 위치하고 있다.
2. 상세
한국 전쟁 당시 한반도 최북단지역인 혜산진까지 진격한 부대여서 혜산진 부대라는 별칭을 얻었다. 원래는 제3보병사단 소속으로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 때 38선을 최초로 넘은 부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1950년 12월 15일 흥남에서 철수할 때 수도사단 18연대와 배를 바꿔타고 말았다. 게다가 철수의 난잡함 속에서 원대복귀를 위해 서로 목적지를 바꿀 수도 없어서 결국 연대를 맞교환 하는 식으로 수도사단에 예속되었다. 그런데 3보병사단에선 23연대에게 명칭을 계승시켰다.
참고로 이 여단만 사단 내 다른 여단과 편제가 다른 탓에 이 여단 예하의 기보대대에 배치된다면 남들보다 좀 더 신나는 군생활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전차대대 머리수는 기보대대의 절반도 안 되는 탓에 자기네 대대 관리하기도 손이 모자라는 데다가[1] 그나마 있는 전차대대는 조금 애매한 곳에 위치해 있다. 고로 경계근무도 두 배, 제설 등 각종 작업도 두 배, 대대까지 내려오는 불시검열도 두 배 . 훈련 시에도 보병이 부족하다보니 다른 여단 보병들이 한 걸음 뛰는 동안 두 걸음 뛰어야 한다. 야 신난다(...)
원래 이 부대는 평범한 기보여단이었지만 수기사에서 차량화보병대대가 폐지되면서 다른 여단은 기보대대로 편제가 바뀌고 이 여단만 전차대대로 개편되어 3개 여단 중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다. 즉, 26여단 예하였던 제203차량화보병대대가 다른 여단의 201/202 대대가 기보대대로 개편될 당시 (1987년) 유일하게 35전차대대로 해체 편성되어 26여단이 수기사에서 유일하게 2개 전차대대가 있는 막강 화력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이는 사단내에서 26여단의 작전 임무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K-1전차는 수기사 내에서 가장 먼저 1986년에 수령 및 전투배치하였으며 '87 T/S 훈련 시 성공적인 임무 수행을 실시하고 당시 대통령에게 87년 9월 승진훈련장에서 화력시범과 함께 88전차라는 별도의 애칭을 받게 되었다. K1전차의 수령에 대해 우선 순위 이야기가 나오곤 하는데 60여단에 32전차대대가 창설되고 이때 와전되고 있기에 수정합니다. 8전차대대 후에 기갑수색대대가 수령하였으며 그 후에 17, 18전차대대가 수령하였으며 한참 후에 35전차대대가 수령하게 된다.
3. 편제
- 여단 본부 및 본부 중대, 직할 중대
- 제8전차대대 기드온
- 제35전차대대 승호
- 제103기계화보병대대 노도
- 군수지원대대
3.1. 여단직할대
- 본부대
3.2. 제26기계화여단 군수지원대대
3.3. 제8전차대대 기드온
[2]
3.4. 제35전차대대 승호
3.5. 제103기계화보병대대 노도
예하대대인 103대대는 이라크 전쟁 때 파병한 자이툰부대의 모체 부대이다.(자이툰 부대의 장갑차 기동타격대 부대가 여기 부대에서 파병된 부대이다.) 여담으로 국방부장관, 국가안보실장을 역임한 김관진 실장이 여기에서 여단장(기계화보병여단이어서 타부대 보병 연대 위치 정도 보면 된다.)을 했다.
4. 과거부대
5. 출신인물
5.1. 여단장
5.2. 장교/부사관
5.3. 병
6. 기타
6.1. 근무환경
6.2. 훈련
7. 사건사고
- 1983년 8월, 승진훈련장에서 주요 인사들이 참관하는 가운데 예하의 1개 대대가 최초의 '야간기동제병협동훈련'을 선보였다. (야간전술에 주력하는 북한군에 대응하기 위한 것.) 제병협동이라는 것 자체가 말 그대로 온갖 병과가 동원되고 실제 사격까지 하는데 앞에 '기동'이 붙으면 수십 대의 장갑차량이 동원되므로 그만큼 더 위험하다. 전차 1개 중대의 지원을 받는 1개 기계화보병대대(약 60대)가 투입된다. 거기에 '야간'까지 들어가면? 이는 훈련 교리를 세우기 위한 최초의 훈련이었고, 결국 사고가 발생했다. 전차(M48A3K)가 장갑차(M113)에 M2 Cal.50 기관총을 오인 사격한 것이다. 야간 훈련이므로 진로 양옆의 산자락에 불빛을 표적으로 설치해 놓았는데 장갑차의 후미등을 그것으로 착각한 것. 워낙 기복이 많은 지형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있는 차량의 불빛과 표적을 혼동했을 것이다. 사상자 3명이 발생했고 사망자 2명은 "준 전시 상황"에 의거 '전사'로 처리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 사망자 중 소대장은 서울 동작동, 전령이었던 상병은 대전에 안장.
- 부상자인 중대장은 오른팔 어깨 가까운 부위를 맞아 불구가 되어 사실상 군인으로 남을 수 없었지만 공훈을 인정받아 후방 근무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전방 근무를 청해서 결국 되돌아'왔'는데, 하필 바로 옆 중대의 중대장을 맡게 되었다. 오른팔이 불구가 되었지만 정말 정신력, 의지력은 대단했던 양반. 또한 당시의 중대장치고는 권위적이지 않고 무척 소탈했다.
[1] 덕분에 보병 쪽에서 복무하던 장교가 기갑으로 바꿔서 오면 두 배로 힘들어진다. 손 많은 보병부대에 익숙하다보니 일손은 생각 않고 일단 시키고 보는 습관 때문. [2] 최초 수령은 32전차대대가 86년 8월로 11월인 8전차보다 3개월 빠르게 수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