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 철수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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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진행
3.1. 피난민을 태운 주요 선박
4. 후일담
5.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흥남 철수
5.1.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
5.2. 김동리의 소설 흥남철수
5.3. 빌 길버트의 르포 기적의 배
5.6. 미국 드라마 Timeless
6. 관련 문서


1. 개요




興南撤收 / Heungnam evacuation
6.25 전쟁 중인 1950년 12월 15일부터 12월 26일까지 흥남에서 미군 10군단과 대한민국 국군 1군단 그리고 피란민 10만여명이 철수한 작전

2. 배경



실제 흥남 철수 당시를 기록한 영상.[1]
그 날 아침의 배는 6시 15분에 닿았다. 눈바람을 무릅쓰고 얼음판 위에서 밤을 새운 군중들은 배가 부두에 와닿는 것을 보자 갑자기 이성을 잃은 것처럼 와~ 하고 소리를 지르며 곤두박질을 하듯이 부두 위로 쏟아져 나갔다. (중략) 부두 위는 삽시간에 수라장이 됐다. 공포가 발사되고 호각이 깨어지고 동아줄이 쳐지고 해서 일단 혼란이 멎었으나 그와 동시에 이번에는 또 그 속에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 쌀자루를 떨어뜨린 남편, 옷보퉁이가 바뀐 딸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서로 부르고, 찾고, 꾸짖는 소리로 부두가 떠내려 가려는 듯했다. '''그들은 모두 이 배를 타지 못하면 그대로 죽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김동리의 소설 <흥남 철수> 중에서 인용)
1950년 11월 말, 북진통일을 눈앞에 뒀다고 생각한 UN군은 서부전선을 담당하던 미 8군이 중공군한테 괴멸적인 대패를 당하자 11월 30일 동부전선에서 호기롭게 북진 중이던 미10군단에게 함흥-흥남 지역으로 후퇴할 것을 명령했다. 그와중에 미 10군단 산하 미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 일대에서 중공군 9병단의 포위에 걸려 미 10군단 전체가 중공군에게 포위섬멸당한다는 위협이 현실로 다가왔고 최종적으로 UN군은 12월 8일 흥남 철수 명령을 내렸다. 12월 15일 미 제1해병사단을 시작으로 미 10군단 전 병력이 흥남으로 집결, 해상을 통해 부산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이것이 1.4 후퇴의 시작이었다.
육로로 철수하지 못하고 흥남을 통해 해로로 철수해야 했던 이유는 철수 당시 함흥-흥남 일대를 제외한 함경도 전역이 중공군 수중에 넘어간 상태였으며 12월 9일에 중공군이 원산까지 점령하면서 퇴로가 끊겼기 때문이다. 즉, 배로 철수하는 것 빼고는 함경도 등지에 위치한 병력과 피난민이 남쪽으로 내려갈 방법은 없었다. 따라서 UN군 사령부는 해상 철수가 이루어지는 흥남항 부두를 중심으로 A구역부터 F구역까지 방어선을 설정하고, 동해에 위치한 미 해군의 함포 사격의 도움을 받으며 UN군과 한국군은 철수를 준비한다.

3.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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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내려가겠다고 흥남부두에 모여든다. 그러나 미군 지휘부는 피난민을 데려가는 것을 꺼렸다. 피난민을 태우느라 시간을 지체할수록 미군의 희생이 늘어나는 데다 병력과 장비, 물자를 싣는 데만도 수송선이 넉넉하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피난민 사이에 스파이가 침투하여 파괴 공작을 하게 되면 큰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군 지휘관들은 '''"피난민을 버리고 가느니 차라리 우리가 걸어서 후퇴하겠다!!"'''며 극렬 반발했고,[2] 미 10군단 사령관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의 고문이었던 현봉학 박사, 1군단장 김백일 장군 등이 끈질기게 설득하고 요청을 하자 마침내 "병력과 장비를 싣고 남는 자리가 있으면" 피난민을 태우기로 동의한다. 그 결과 약 10만 명의 피난민이 흥남 부두에서 배를 타고 남으로 피난을 올 수 있었다.
다음은 정일권 장군의 수기에 나오는 김백일 군단장과의 대화

우리야 군인이니까 민간인 배를 타고 빠져나갈 수 있겠지. 여기 북한 동포들은 어디로 가나, 산으로 가나 바다로 가나. 모두들 아우성이야. 울면서 제발 이남으로 데려가 달라는 거야. 북괴놈들이 무지막지하게 보복을 하고 있다는 거야. 알몬드는 군대 수송이 먼저라고 하겠지. 나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동포들을 배에 태우겠네. 그러니까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거든 잘 수습이나 해주게


끝까지 미군과 교섭을 벌여야 한다. 수십만 명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정 못 하겠다고 하면 그 사람들 앞에서 배라도 갈라야 한다. 정 안 되면 차라리 우리 총으로 쏴 죽이는 편이 낫다. 어차피 북괴놈들에게 당할 테니 말이다. 최악의 경우 우리가 피란민들을 직접 데리고 가야 한다.

12월18일 철수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알몬드 장군이 불러서 갔습니다. 장군은 함남지사와 어느 목사 등 3명의 민간인만 데리고 가라고 하는 겁니다. 나는 아연실색했습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적어도 10만 명은 데리고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문제로 알몬드 장군과 옥신각신했습니다. 나는 나와서 곧바로 김백일 장군에게 보고했습니다. 김백일 장군은 '미국이 영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 국군 1군단이 피란민을 엄호하면서 육로로 후퇴하자'고 말했습니다. 참모들이 모두 동의했습니다. 19일 다시 알몬드 장군 측을 만났더니 '3000명까지만 허용하고 그 이상은 절대로 안 된다' 고 했습니다. 우리는 육로로 가겠다고 하자 '노, 노' 하며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짓더군요. - 유원식 중령의 증언(민족의 증언: 중앙일보)


처참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북한 피란민들이 선창에 떼를 지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레로 나르거나, 들것, 혹은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들의 옆에는 놀란 병아리들처럼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뒤에는 그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하려는 중공군이 있었고, 그들 앞에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 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장 레너드 라루

보잘것없는 살림살이를 든 많은 피란민들이 우리 군인들과 뒤섞여 있었다. 육군과 해병대는 이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 공산 정권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는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해졌다. 항구에 정박 중인 미국 배를 향해 수만 명의 피란민들이 차가운 바닷물을 헤치면서 걸어갔다 - 공군 대위 헤이그의 수기 중

그때 수송선(LST)의 앞 쇠문이 닫혀지고 있던 순간이었다. 피란민들은 필사적으로 닫히는 쇠문에도 매달렸다. 쇠문에 끼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쇠문을 잡으려고 팔을 뻗쳤다가 바닷물에 곤두박질하는 피란민도 있었다. 그러한 참상을 전해 들었을 때 나는 그만 통곡을 하고 말았다. 착잡한 심정에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2700t 온양호에 수천 명을 태우고 나왔습니다. 사람이 포개서 앉을 정도였습니다. 부두에는 배를 타지 못한 사람들이 아우성이었습니다. 선두 쪽의 문을 닫을 때는 미처 배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피란민이 문 사이에 끼여 허덕이다가 바다에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배에 탄 미군들이 배를 빨리 떼라고 허공에 총을 막 쏘았어요. 우리 배가 출항하자마자 흥남 시내가 불바다가 됐는데 철수선을 타지 못하고 부둣가에서 아우성 치던 그 많던 피란민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 LST 실습 항해사 황호채의 증언

출처

문 :역시 군단장님의 공이 큰 거지요?

답 :그렇지요.그때 미군들은 안 된다고 그러고 …

문 :혜산진에는 들어갔어요?

답 :나는 못 들어갔어요.군단장님도 못 들어갔어요.

문 :민간인들은 어디에다가 상륙시켰습니까?

답 :거제도, 제주도, 그 다음에 일부 포항, 묵호에도 조금 내리고. 그런데 주력은 역시 거제도와 제주도.

- 김득모 (당시 국군 제1군단 헌병대장,소령)의 증언

다음날 오후에 우리는 부산에 닻을 내렸다.안심? 모든 얼굴이 빛을 발했다. 그러나 이것이 여행의 종착역은 아니었다.

장교가 다가왔다.

“여기 14,000명의 피난민이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어디다 그들을 내려놓을까요?”

그러나 나는 그들의 대답에 어이가 없었다. “여긴 안돼요.” 그들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해양적 군사적 이유를 수없이 들었지만, 우리의 황당함이란! 그리고 우리의 피난민들이 아직도 더 악몽같은 항해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놀라움은 상상할 수 있겠는가?

“거제도로 가시오.” 라고 그들은 말했다. “남서쪽으로 50마일만 가면 돼요.”

-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편,『로버트 러니와 흥남부두』pp.7~ 11

더 자세한 상황과 증언은 여기 연구자료을 참고하자.
6.25전쟁시 흥남철수 작전에 관한 연구용역
이 결정으로 12월 19일부터 민간인 철수가 시작되어 24일에 마지막으로 배가 떠났다. 10만의 피란민을 태운 상선과 LST는 목적지인 부산항으로 갔으나 전국에서 몰려든 피란민으로 인해 입항이 거부되고 남쪽으로 더 항해하여 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란민들을 하선시킨다. 또 이미 부산에 도착한 피란민들 5만명도 거제도로 이동시켰다.[3]
이 중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2월 23일에 출항한 상선으로[4] 가장 많은 피란민을 태운 것으로 유명하다.
'''Guiness World Rec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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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rgest evacuation from land by a single ship
(단일 선박으로서 가장 큰 규모의 구조 작전을 수행한 배)'' '''

'''기록자'''
'''장소'''
'''규모'''
'''시일'''
'''SS Meredith Victory'''#
대한민국, 흥남
14,500 명
1950년 12월 25일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건조된 지 5년 정도 된 7,600t급 빅토리급 수송선으로, 철수 직전 가장 마지막에 남은 상선들 중 하나였다. 이 배는 일본을 출발할 때 항공유를 잔뜩 싣고 왔는데, 흥남에 짐을 내릴 수 없자 부산으로 갔다가 배가 부족한 바람에 짐을 덜 내린 채 12월 21일에 다시 흥남으로 온 상태였다. 메레디스 빅토리호의 화물이 무엇인지를 안 다른 배들은 절대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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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꼭 피난민을 태워야 할 의무는 없었다. 적재한 화물의 위험성 등을 강조하여 그냥 가버려도 상관없었으나,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태울 수 있는 만큼 피난민을 태우기 시작했다. 배에는 아직 300t의 항공유가 실려 있었으나[5] 1만 4천여명의 피난민과 경호를 위한 17명의 육군 헌병이 승선한 뒤 12월 23일에 흥남을 떠날 수 있었다.
이들은 아무 일 없이 24일에 무사히 부산항에 도착했으나, 국군과 UN군으로 포화된 탓에 하선이 거부되고 거제도로 더 항해하여 장승포항에 하선하였다. 3일간에 걸친 이들의 항해 결과 메레디스 빅토리 호는 '단일 선박으로서 가장 큰 규모의 구조 작전을 수행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으며, 이 비좁은 배에서 5명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도 했다.[6]. 참고로 19대 대통령 문재인의 부모는 이 배가 아니라 미군 상륙함인 LST를[7] 타고 거제로 피란했다.#
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 철수 작전이었으나, 193척의 선박을 동원한 미군한국군은 거의 피해 없이 철수하는 데 성공했으며, 여기에 10만 명의 피난민까지 함께 구해내는 기적을 일구어냈다. 게다가 작전이 종료되어 마지막 수송선인 온양호와 호위 전투함이 흥남을 떠난 날짜는 놀랍게도 12월 24일, 즉 '''크리스마스 이브'''였다.[8]
10군단이 미처 배에 다 싣지 못하고 항구에 남겨둔 여러 물자는 중공군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 12월 24일 14시 36분에 마지막 배가 흥남을 벗어나는 순간 흥남 부두의 항구 시설과 함께 모두 폭파되었으며, 군인들과 피난민들은 그 폭파의 현장을 보면서 흥남을 떠났다. 그리고 12월 25일 아침 중공군 27사단이 흥남을 점령했다. 단 하루 차이로 철수에 성공한 것이었다.[9]
이후 미 10군단은 철수 동안 수상/잠수함이나 기뢰 등 어떠한 종류의 공격도 받지 않고 부산항에 도착하는 데 성공한다.
이 작전의 결과, 최종적으로 철수한 인원과 물자는 다음과 같다. 흥남 철수는 됭케르크의 경우처럼 몸만 빠져나온 철수는 아니었다.
  • 한국군과 유엔군을 합쳐 병력 105,000명
  • 북한 피난민 98,100명
  • 각종 차량 17,500대
  • 각종 물자 350,000톤
그런데 국가보훈처에서 2005년 발행한 '6.25 전쟁 미군 참전사'에서 배에 탑승한 피난민들의 숫자는 10만여 명, 그리고 타지 못한 피난민들의 숫자 역시 그와 비슷했다고 나와있다. 다른 여러 자료에서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철수했다고 나오는 것과는 상반되는 내용인데, 그 이유는 피난민의 종류가 '''2가지'''였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미 해병대에서 대표적인 전투로 손꼽는 장진호 전투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자세하게 살펴보면 방어진 구성시 방어진 안에 있었으며, 얼마 뒤 배속된 한국 경찰의 조사를 받아 신원이 확실한 피난민은 철수 시에도 미군이나 국군과 같이 행군하며, 차량에 탑승하기도 하는 등 최대한 편의를 봐주었다.
하지만 방어진 바깥에 있으며 중공군이나 북한군과 접촉이 가능한 피난민의 경우에는 방어진 구성시에는 방어진 내부로 출입을 금지시켰으며, 철수시에도 반드시 철수하는 군대 후미에서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는 것을 금했다.
이것만 본다면 매우 비정한 행위라고 볼 수 있지만, 아래와 같은 이유로 인해 어쩔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 피난민의 신원을 검증하기 어려웠다. 확실한 신원 검증의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외모만으로 그 사람의 국적, 소속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이다. 이는 훗날 베트남 전쟁에서도 미군한국군을 괴롭히는 주된 요인이 되었다. 일단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매우 힘들어지니.
  • 피난민으로 가장하고 방어진 내부에 들어와서 파괴 활동이나 사격 관측을 하는 스파이 행위가 6.25 전쟁 중에는 매번 있는 일이었다. 이미 개전 초기부터 이런 것 때문에 진지 내부에서 저격을 받거나, 적의 포탄이 정확하게 탄약고를 명중시킨다든지, 야전병원이 습격당하는 일이 잦았던 UN군의 입장에서는 신원이 보장되지 않은 피난민은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10]
이런 이유로 인해 흥남 교두보가 형성되기 전에 교두보 내부로 들어온 피난민들은 최대한 구출하였으나, 교두보 형성시 바깥에 있던 피난민들은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스파이 침투시 철수 중 교두보의 붕괴로 대량 피해가 발생할 것을 우려한 UN군이 애당초 교두보에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 게다가 흥남 교두보의 경계선에서는 육해공의 전 화력을 기울인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으므로, 들여보내고 싶어도 못 들여보내는 이유도 있었다. 당장 아수라장의 격전이 벌어지는데, 피난민이라고 주장하는 정체불명의 사람들을 전선 내부로 들여보내면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비슷한 이유에서 피난민끼리도 반목이 있었던 비극이 있다.
결국 이런 이유가 겹쳐서 흥남 교두보 내부에 있던 피난민들은 대부분 구출되었으나, 외부에 있던 피난민들은 교두보 외부에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 흥남 철수 작전으로 9만 8천명을 구출 하였는데, 교두보 밖에 있어서 미군을 따라 피난 온 인원도 그정도 있었다고 한다. 이 엄청난 인원은 결국 탈출에서 제외되어 흥남에 남게 되었다. 흥남에 남았던 피난민 중에서 이후에 탈북을 성공한 피난민의 증언에 따르면 고향에 돌아가도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탄압을 받고 행방불명 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엄청난 인원들이 탈출한 이유중 하나는 흥남 일대에 핵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 같지만, 실제로 맥아더는 흥남 일대에 핵공격을 해서라도 미10군단을 구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대통령등 지휘부에서 확전을 우려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해 없던 일이 된 것이다. 다만 생존자들에 의하면 국군이 각 집마다 문을 두둘기며 핵 공격이 있을 것이니 대피하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때문에 이념 여부에 상관없이 몇 십만이나 되는 피난민이 발생 하였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래와 같은 경우도 있었다.

피난민과 학도병, 국군을 가득 실은 목선은 남으로 뱃머리를 돌려 험한 파도를 뚫고 달렸다. 뱃머리에서 부서진 파도가 튀어들면서 얼어붙어 온 몸에 얼음조각을 뒤집어 썼다. 엄마 품에 안겼던 아이가 새파랗게 얼어 죽기도 했다. 그 때 피난민 한 사람이 벌떡 일어섰다. 아이를 업고 있던 30대 중반의 젊은 여자를 노려보더니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에미나이 남편이 빨갱이다이. 악질 빨갱이가 무슨 낯짝이 있서 이 배를 탔슴."'''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주위 사람들이 악바친 목소리로 아우성쳤다. "저년 죽이라우. 배에서 끌어내우다!" 새파랗게 질린 여자는 주르르 눈물을 쏟더니 이를 악물었다. 아이를 업은 채 배에서 뛰어내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커다란 파도가 아이와 여자를 꿀꺽 삼켰다. 그냥 있었어도 맞아죽었을 것이다. - 자유기고가 김용삼, 「아비규환의 겨울 부두」, 『한국 현대사 119 대사건』, 101.p, 월간조선 엮음, 조선일보사, 1993


3.1. 피난민을 태운 주요 선박


  • 메러디스 빅토리호: 14,500명
  • 버지니아 빅토리호: 14,000명
  • 레인 빅토리호: 7,000명[11]
  • 마다케츠호: 6,400명
  • 토바츠 마루호: 6,000명
  • 요나야마 마루호: 3,000명
  • BM 501: 4,300명
  • LST 074: 3,500명[12]
  • LST 081: 4,000명
  • LST 661: 9,400명
  • LST 666: 7,500명
  • LST 668: 10,500명
총 98,100명##(삭제됨)[13]

4. 후일담


  •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취임 후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며 6월 28일(현지시각) 미국 장진호 전투 기념비에서 헌화식을 가졌는데, 기념사에서 자신의 가족이 겪었던 흥남 철수 에피소드를 언급하며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천명하였다. 또한 빅토리 호의 1등 항해사인 로버트 러니를 직접 만났다.
>"그 때 메리디스 빅토리 호에 오른 피난민 중에는 저희 부모님도 계셨습니다...[14] (중략) 지금 아흔이신 제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항해 도중인 12월 24일, 미군들이 그 배 속의 피난민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사탕을 한 알씩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비록 사탕 한 알이지만 그 참혹한 전쟁통에 그 많은 피난민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누어 준 그 따뜻한 마음씨가 저는 늘 고마웠습니다. 존경하는 장진호 전투 용사와 후손 여러분! 대한민국은 여러분과 여러분 부모님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감사와 존경의 기억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 한편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은 전쟁 이후 가톨릭 수도회베네딕토회에 입회하여 수도자가 되었고, '마리너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마리너스 수사는 수도회 입회 전에도 미국 가톨릭 해양선교단체인 '바다의 사도'에서 회원으로 활동한 신자였다. 그는 생전 흥남 철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피난민들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형상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배에 태울 수 있었습니다. 1만 4,000명의 목숨을 구하면서 소중한 생명의 가치를 깨달았고, 그 때문에 수도회에 입회하게 되었습니다.
마리너스 수사는 평생동안 흥남 철수와 관련된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고 조용히 수도생활에 매진하다가 2001년에 선종했고, 선종 후에야 뒤늦게 그의 행적이 알려지며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마리너스 수사가 지내던 미국베네딕토회 수도원은 2000년경 경영난으로 폐쇄될 뻔했는데,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 위치한 성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지원해서 복구했다고 한다.기사. 그도 그럴 법한 것이, 왜관 베네딕토회 수도원은 원래 원산 옆에 있는 덕원에 위치했으니까. 이 사연은 공지영 마리아 작가의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의 소재로 쓰이기도 했다.[스포일러] 2017년부터 마리너스 수사에 대한 시복(복자품에 올림) 절차가 미국 가톨릭교회에서 진행되고 있다.#
  • 성심당의 1대 창업자인 임길순 역시 이 당시 가족들과 함께 메러디스 빅토리 호를 타고 대한민국으로 오게 되었다.
  • 미군을 설득해 수많은 피난민을 구한 김백일 중장은 1951년 대관령 인근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사후 중장으로 추서되고 무공훈장 태극장을 수여받았다.
거제 포로수용소에 흥남 철수 작전 기념비가 있으며, 10만의 목숨을 구한 6명의 영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 아이러니한게 흥남 철수의 공이 있는 알몬드는 명장이기는 커녕 졸렬한 지휘로 악명이 높았다. 장진호 전투 때 미군이 큰 피해를 입은 것에는 알몬드의 실책도 컸다. 게다가 전장에도 사치를 부려서 루이스 풀러 등 그와 식사를 한 동료 장교들은 '전장에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치', '차라리 트럭 조수석에서 식은 전투식량을 씹는게 마음이 편할 것'이란 평가를 남겼다.

5.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흥남 철수



5.1.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



가수 현인이 부른 가요로, 1953년 대구시의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발매되었다. 흥남에서 여동생 금순이와 헤어지고 혼자 부산으로 피난 온 실향민이 여동생을 그리면서 남북통일이 될 때까지 굳세게 살아달라고 바라는 내용의 가사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철의 장막 모진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의 너와 난데 변함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남북통일[15] 그날이 되면
손을 잡고 울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춰보자
(강사랑(박시춘의 친구) 작사 / 박시춘 작곡)
국민가요급의 큰 인기를 끌었고, 이후 이 노래를 다시 부른 트로트 가수도 대단히 많다. 1962년에 이 가사의 내용을 토대로 동명의 영화도 제작되었다. 이후 같은 제목의 영화나 드라마가 등장했지만, 가사 내용과는 관계 없이 제목만 빌려왔다.
해병대의 군가 중에서 비공식 군가인 '굳세어라 해병대'가 이 노래를 개사했다.
강산에의 노래 '라구요'의 2절에 이 가사의 일부분이 들어가 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현대적 감각으로 리메이크한 곡이 삽입곡으로 들어가 있다.

5.2. 김동리의 소설 흥남철수


흥남 철수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소설로, 전쟁이라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 인간애가 어떻게 생기는지 보여주고 있다.

5.3. 빌 길버트의 르포 기적의 배


원제는 <Ship of Miracles: 14,000 Lives and One Miraculous>. 2000년에 나와 국내에는 자운각을 통해 2004년 번역되었다가 절판되고 영화 국제시장 개봉 이후 2015년에 재출간되었다. 주로 승무원과 피난민의 증언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당시 상황을 거의 그대로 느낄 수 있다. 2004년 번역판은 제목부터 선장 레너드 라루의 수도명[16]인 마리너스에서 따온 <마리너스의 기적의 배>로 출간되었는데, 그래서인지 책의 종교적 색채가 너무 강해져서(번역이 아니라 편역이라 되어 있다) 평범하게 번역된 개정판 쪽이 더 낫다는 평가.

5.4. 영화 내가 마지막 본 흥남


제목 자체에서 흥남이 언급되기도 하고 영화 자체도 흥남 철수로 이산가족이 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흥남 철수 및 폭파 장면을 80년대 기준으로 꽤 큰 스케일로 묘사하고 있다.

5.5. 영화 국제시장


흥남 철수에서 영화가 시작된다. 주인공 윤덕수는 흥남 철수 당시에 아버지 및 여동생과 이별하고, 피난으로 내려온 부산 국제시장에서 수입품 잡화점을 운영하면서 서독에 광부로 파견을 가고,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하는 등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경험하게 된다. 흥남 철수 부분은 영화 전반의 완성도와 비교해 봐도 꽤 잘 만든 편이다. 현봉학 박사[17]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에게 배에 피난민들을 태워달라고 설득하는 장면에서부터, 마음을 바꾼 알몬드 장군이 레너드 P. 라루 선장이 몇 명이나 더 탈 수 있냐고 묻는 장면 등이 나온다. 주인공 가족도 타게 되는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등장, 철수 후 폭파되는 흥남 부두의 상황까지 자세히 나온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물을 타고 배에 오르다가 바다에 떨어지면서 동사해 물 위로 둥둥 떠다닌다든지, 떨어지다가 나룻배에 머리를 박고 사망한다든지, 그물을 타고 힘겹게 올라가는 어린아이 등에 업힌 더 어린아이를 뒤에 올라오던 사람이 그물인 줄 알고 끌어당겨 가해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추락한다든지[18], 배에 매달린 고드름이 떨어져 맞는 상당히 잔혹한 장면도 나온다.
다만 역사적인 사실과는 좀 다르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철수 작전의 기함이 아니었고[19], 따라서 현봉학 박사와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이 타고 있지도 않았으며, 이들이 라루 선장과 직접 대면한 적도 없다. 또한, 부산이 아니라 거제도에 피란민들을 하선시켰다.
이 이야기는 KBS 스펀지 314회 방송분에 소개되기도 했다.

5.6. 미국 드라마 Timeless


NBC에서 방영한 미국드라마 Timeless 시즌 2의 11~12화에서 이 흥남 철수를 다룬다. 이 드라마는 시간 여행을 통해서 역사를 바꾸려는 범죄자를 잡는 내용인데 이 화에선 흥남 철수를 전후로 한 시기에 범죄자를 추적한다. 시간여행으로 흥남 철수가 진행 중인 북한에 도착한 직후 "배에 탈 피난민 중 중요 인물이 누가 있죠?''라고 질문하자 "미래의 남한 대통령인 문재인의 부모님이요."(Parents of future South Korea President MOON JAE IN)라고 대답한다. 다만 드라마의 소품 등의 고증은 다른 미국 드라마/영화들처럼 썩 좋지는 않다. 피난민들이 몰고 가는 소가 한우가 아닌 동남아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물소라든가 하는게 그 예.

6. 관련 문서



[1] 쇄도하는 중공군에 맞서 포 사격으로 후퇴를 엄호하는 병력들과 후퇴하는 UN군 및 민간인들, 파괴되는 흥남 부두의 모습이 전부 담겼다.[2] 남으로 후퇴할 육로는 중공군이 강원도 언저리까지 내려오면서 차단된 상태였다. 그러니까 말만 저렇지 사실상 "피난민 버리면 우린 단체로 자살할 것임" 이라고 말한거와 다를게 없다.[3] 당시 원산에서 피란했던 이근용 씨는 거제도로 가야 정부가 월남한 피란민 대우를 해주었다고 하여 부산에서 거제로 다시 이동한다.[4] 가장 마지막에 출발한 배는 LST 온양호로 12월 24일에 출발했다.[5] 승선한 피난민들 중 일부가 이 항공유 드럼통 위에서 불을 피우는 바람에 승무원들이 식겁하기도 했다. 자칫하면 '''14,000명이 한순간에 날아가는''' 전무후무한 규모의 해난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참고로 단일 선박에서 일어난 최악의 인명 피해인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격침 사건의 비공식 사망자 수가 10,000명을 조금 넘었으므로 항공유 폭발로 피난민 전원이 폭사했다면 이 기록을 6여년 만에 갈아치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6] 당시 선원들은 이 아기들을 '김치'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중 '김치5'였던 이경필 씨는 거제 장승포에 거주 중이다.[7] 문재인 어머니인 강한옥 여사의 기억에 따르면 부두가 폭파되는 광경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날은 12월 24일이다. 24일 흥남부두가 폭파되기 전 마지막에 출발한 수송선에는 LST 온양호가 있고 여기 타고 있던 실습 항해사 황호채가 말한 흥남시내가 불바다가 되었다는 목격담과 상황이 일치한다. 메러디스빅토리호는 전날인 23일에 흥남을 떠났다.[8] 때문에 보통 역사와 관련하여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하면 해외에선 대부분 1차 세계대전의 크리스마스 정전을 가리키지만, 한국에선 이 흥남 철수를 가장 먼저 언급한다.[9] 그렇다고 해도 급박한 상황은 아니었다. 당시 중공군은 한미연합군을 흥남에 몰아 넣을 수는 있었으나, 그동안의 전투 과정에서 피해가 막심하여 한미연합군을 섬멸할 능력은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포위 후 한미연합군이 철수하기를 기다린 것.[10] 6.25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수 차례 벌어진 이유 중에 하나도 이것이다. 민간인을 가장한 게릴라들의 습격과 파괴 행위에 시달리던 미군들이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에서 언어, 인종, 문화가 다른 민간인들과 사소한 의견 차이(혹은 오해)가 벌어지면 그냥 쏴 버린 것이다. 최근의 이라크 전쟁이나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도 마찬가지다.[11] 레인 빅토리 호는 12월 8일 원산에서 출항하여 부산으로 이동한 것으로 12월19일~24일 사이에 피란민을 태워 거제로 이동한 흥남철수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이 인원을 빼면 91,000명이 된다.[12] LST는 미 해군 상륙선[13] 보통 91,000명으로 많이 알려져 있었으나, 원산에서 철수한 인원도 합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흥남철수 91,000명의 인원도 어린아이는 제외한 숫자라고 한다.[14] 다만 이 기억에는 혼동이 있다. 자서전 운명에서는 미군상륙함인 LST를 탔다고 되어있다. 아마 흥남철수에서 가장 유명한 배를 언급함으로서 의미를 부각시키려는 의도였을것이다.[스포일러] 주인공 정 요한 신부의 할머니가 함경남도 덕원 출신으로, 흥남 철수 때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남쪽으로 피난 오던 중에 정 요한 신부의 아버지를 낳았다. 그리고 훗날 정 요한이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여 수사신부가 된 후, 미국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보존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15] 최초 가사는 '북진통일'.[16] 수도회에 입회한 후 새로이 받은 이름.[17] 해당 인물을 연기한 고윤김무성의 아들이라 화제가 잠깐 된 적이 있었다.[18] 여기서 그물을 타고 올라가는 어린아이가 주인공인 윤덕수이고, 덕수 등에 업힌 어린아이가 여동생 윤막순이다. 작중에서는 뒤따라 올라오던 사람이 막순이를 일부러 끌어당긴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장면 자체가 피해자의 회상씬인 데다가'''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회상이라고 해도 기껏해야 초1~2 정도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이라면 70줄 들어서까지 기억이 객관적으로 남아 있길 바라는 것도 무리다.[19] 기함은 아이오와급 전함 3번함 미주리였다. 흥남 앞바다에서 모든 배가 철수할 때까지 지원 사격을 실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