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아키노 안토니오 로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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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키노 안토니오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 1792-1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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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3년 전인 1865년에 찍은 사진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
2.2.1. 소년 작곡가 로시니
2.2.2. 세비야의 이발사
2.2.3. 전성기: 세미라미데
2.2.4. 프랑스 시기: 기욤 텔
2.3. 40세 이후의 로시니
3. 여담
4. 주요 작품
4.1. 오페라
4.2. 종교음악
4.3. 가곡
4.4. 기악


《기욤 텔》 서곡(Overture) 중 피날레. 지휘자는 정명훈. '''마성의 BGM.'''

1. 개요


19세기 초반에 활약했던 이탈리아의 작곡가. 여러 분야에 작품을 남겼지만 그의 진가는 역시 젊은 시절에 작곡한 오페라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주로 오페라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오페라는 이후 가에타노 도니체티/빈센초 벨리니 - 주세페 베르디 - 자코모 푸치니의 계보로 이어지는 이탈리아 낭만파 오페라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한편으로는 벨리니와 더불어 벨칸토 창법을 활용한 마지막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오페라 가운데 세비야의 이발사는 현재까지도 가장 많이 공연되는 오페라 중 하나이다. 하지만 세비야의 이발사를 비롯한 몇몇 오페라를 제외한 그의 많은 오페라들이 20세기 후반이 될 때까지도 의외로 많이 공연되지 않았는데, 낭만주의 시대 이후 카스트라토가 사라지고 벨칸토 창법도 명맥이 끊기면서 그가 추구했던 벨칸토창법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가수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벨칸토 창법을 사용한 다른 바로크/고전파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그의 오페라도 20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다시 공연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현재에도 그의 오페라를 공연할 때 주연급에 어울리는 가수들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으며 로시니가 작곡한 오페라 아리아들은 가수들에게 극한의 어려움을 선사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한편으로 그는 젊은 시절에 큰 부를 축적한 갑부 음악가이자 이야깃거리를 많이 남긴 작곡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커리어는 한창 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39살에 갑자기 중단되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당사자가 정확하게 밝히지 않은 관계로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오페라 작곡을 중단한 이후 로시니는 프랑스 파리에 머물면서 미식가(goumand)이자 예술애호가로 유명해졌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에는 '알라 로시니'라는 로시니 취향의 요리법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으며, 심지어 아직까지도 그의 이름을 내건 요리대회가 개최되고 있을 정도.

2. 생애



2.1. 초기


로시니는 1792년 당시 교황령으로 있던 이탈리아의 페사로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부친은 금관악기 연주자이자 도축업 감시원이었으며 모친은 가수였다. 그의 부친 주세페 로시니는 페사로에 진입한 나폴레옹의 프랑스 혁명군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1799년 오스트리아에 의해 감옥에 갇혔는데, 이 때 로시니와 모친 안나 로시니는 볼로냐로 이주하였으며 모친의 가수활동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듬해 풀려난 부친이 볼로냐에 합류했으며 로시니의 부모는 함께 음악활동을 했다. 이 시기 로시니는 몇몇 음악인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는데 나름 재능을 보여서 12세에는 6곡의 현을 위한 소나타를 작곡하기도 했다.[1] 한편 작곡뿐만 아니라 연주에도 재능을 보였는데, 변성기 전에는 교회나 오페라 무대에서 (아역) 가수로 공연에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부친의 영향을 받아 호른 연주도 뛰어났다고 한다.
로시니는 1805~6년에 최초의 오페라인 디메트리오와 폴리비오(Demetrio e Polibio)를 작곡하였다.[2] 14살에는 볼로냐의 콘세르바토리오(Conservatorio di Bologna)에 입학하여 첼로를 전공했으며 프란체스코파 성직자이자 작곡가/음악교육자였던 스타니슬로 마테이(Stanislao Mattei, 1750-1825)에게 작곡법을 배웠다. 하지만 로시니는 마테이의 엄격하고 보수적인 대위법적 성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로시니 입장에서 마테이의 가르침은 오히려 반면교사가 되어 버렸다. 대신 그는 모차르트하이든 등 독일계 고전파 거장들의 관현악곡이나 현악 합주에서 나타나는 화성적이고 유려한 선율처리를 독학으로 공부하여 자신의 작품에 적극 반영하였다. 예를 들어 16세에 작곡되어 그에게 볼로냐 콘세르바토리오에서 주는 상을 안겨준 칸타타 Pianto d'Armonia sulla Morte di Orfeo[3]를 들어보면 관현악 수법에서 비인 고전파 거장들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4] 이런 작곡 성향은 나중에 그가 작곡한 오페라에서 크게 빛을 발하게 된다.

2.2.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



2.2.1. 소년 작곡가 로시니


이처럼 일찍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던 로시니는 볼로냐에 있던 카발리 후작(Marquis Cavalli)의 후원을 받아 18세였던 1810년, 그의 최초의 공식 오페라 결혼보증서(La cambiale di matrimonio)를 베니스에서 초연하였다. 이 작품은 대박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탈리아 오페라계에 소년작곡가 로시니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렸다. 이듬해에는 볼로냐에서 터무니없는 오해(L'Equivoco stravagante)를 공연하였고, 20세가 되던 1812년에는 베니스, 밀라노, 로마, 페라라에서 무려 6개의 오페라를 공연하였다.[5] 이 초기 오페라들은 대체로 규모가 크지 않은 코믹 오페라나 멜로드라마였으며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 문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관현악 수법에서는 이미 상당한 독창성이 나타나고 있다.
21세가 되는 1813년부터는 좀더 심각하고 복잡한 스토리를 가진 오페라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1813년에 작곡되어 베니스에서 상연된 비극 탄크레디(Tancredi)와 드라마 지오코소 [6] 알제리의 이탈리아인(L'italiana in Algeri)은 본격적인 '대박'급 성공을 거두었으며 21살의 청년 작곡가 로시니의 이름은 이제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렇게 이른 나이의 대성공은 음악계 천재의 대명사인 모차르트조차도 누려보지 못한 수준.[7]
이 성공에 고무된 로시니는 계속해서 팔미라의 아우렐리아노(Aureliano in Palmira), 이탈리아의 터키인(Il turco in Italia)을 작곡했는데 탄크레디만큼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며 뒤이어 작곡된 시기스몬도(Sigismondo)는 사실상 실패에 가까운 결과를 얻었다. 이에 낙담한 로시니는 자신의 삶의 터전인 볼로냐로 돌아갔는데, 이 때 로시니의 재능을 알아본 나폴리의 극장주(impresario) 도미니코 바바야(Domenico Barbaia)가 로시니에게 엄청난 제안을 했다. 바바야는 로시니에게 월 200 두카트의 월급에 나폴리 2개 극장의 음악감독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으며 1년에 1개 이상의 오페라 작곡을 부가조건으로 걸었다. 거기에 덧붙여 극장의 별실 사교장(ridotto)에 마련된 도박장에서 나오는 수입의 일정부분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바바야가 로시니에게 제안한 급여조건은 당시 어떤 음악가도 누려보지 못한 파격적인 수준이었으며 이 바바야 덕분에 로시니는 이후 '재벌급 음악가'가 될 수 있었다.[8]

2.2.2. 세비야의 이발사


로시니는 당연히 바바야의 제안을 수락했고 곧바로 나폴리로 가서 오페라 작곡에 착수하였다. 1815년 10월에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타(Elisabetta, regina d'Inghilterra)[9]가 나폴리에서 상연되어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이 작품으로 그간의 슬럼프를 한 방에 날려버렸다. 게다가 이 작품의 주연을 맡았던 소프라노 가수 이사벨라 콜브란(Isabella Colbran)과는 후에 결혼하였으니 이 오페라는 로시니에게 여러 모로 의미가 있는 작품인 셈이다. 엘리자베타가 공연된 지 2달 후에는 로마에서 그의 다른 오페라 토발도와 돌리스카(Torvaldo e Dorliska)가 상연되어 역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과장을 좀 섞어서 이제까지의 작품들을 예비작에 불과했다고 여겨도 될 정도로 엄청난 작품이 1816년 2월에 상연되었는데, 이 오페라가 바로 로시니의 최고 걸작이자 인기작인 세비야의 이발사(Il barbiere di Siviglia)이다. 단 3주만에 씌어졌다는(로시니 본인은 10일만에 썼다고 주장했다!) 이 기념비적인 작품은 정작 초연 당시에는 온갖 우여곡절 끝에 제대로 상연되지도 못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세비야의 이발사는 원래 프랑스의 극작가 피에르 보마르셰(Pierre Beaumarchais)가 쓴 희극으로 당시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으며 각색되어 오페라 무대에도 자주 올려졌다.[10] 로시니가 활약할 당시에는 로시니보다 한세대 앞선 오페라 작곡가 조반니 파이지엘로(Giovanni Paisiello, 1740-1816)의 세비야의 이발사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으며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이었다.[11]
그간 파이지엘로 외에도 여러 작곡가가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지만 인기로 보나 작품성으로 보나 파이지엘로의 작품에 필적할 만한 작품은 없었다. 그런데, 파이지엘로보다 무려 52살이나 어린 풋내기 작곡가 로시니가 감히 같은 작품을 가지고[12] 대작곡가의 아성에 도전하려고 했던 것이다. 파이지엘로의 팬들은 이런 신예 작곡가의 무엄함을 용납할 수 없었고, 공연 전부터 로시니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었다. 공연측에서는 이들의 분노를 감안하여 초연 당시오페라의 제목을 알마비바(Almaviva)로 수정했지만 그럼에도 파이지엘로 팬들은 요지부동이었으며, 이 팬들은 세비야의 이발사의 초연때 단체로 몰려가 온갖 방해공작을 펼쳤다. 관객석에서 야유와 휘슬불기는 기본이었고 여가수가 아리아를 부를 차례가 됐을 때 무대에 쥐를 풀어놓아 가수가 혼비백산하게 하는 등 각종 무대사고를 일으켰다. 이런 난장판이 벌어진 탓에 결국 초연은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다만 파이지엘로가 이 소동을 사주했다는 일각의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당시 파이지엘로는 심한 병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결국 초연 후 몇 달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즉, 이 소동은 파이지엘로 팬들의 빗나간 팬심 때문에 벌어진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13] 다행히 특별한 소동 없이 제대로 치러진 두 번째 공연은 초연과 달리 엄청나게 성공했는데, 이 작품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초연된지 1달도 되기 전에 영국에서 상연되기 시작했고 여기서도 대성공을 거둔 이후 본격적으로 유럽 각지에서 공연되기 시작했다. 조직적으로 방해공작까지 했던 파이지엘로 팬들의 염원이 무색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파이지엘로의 작품의 상연횟수가 줄고 그 자리를 로시니의 작품이 차지하였으며, 불과 몇 년 후에는 파이지엘로 작품은 사실상 잊혀졌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밀려 버렸다. 21세기 현재에도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는 역대 오페라 가운데 가장 자주 공연되는 오페라 중 하나인 반면 파이지엘로의 세비야의 이발사는 음악 전문가와 소수의 클래식 팬을 제외하고는 존재 여부조차 알려지지 않은 듣보잡이 된 상황.
혹시나 이런 결과만 보고 파이지엘로의 작품을 잠깐 인기를 끌다 사라진 B급 오페라 정도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파이지엘로의 세비야의 이발사도 상당 기간 유럽 전역에서 널리 상연되었을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다. 다만 파이지엘로는 로시니보다 한 세대 이전의 작곡가이기 때문에 좀더 보수적이고 고풍스러운 작법을 따르고 있었고, 이런 점이 로시니 작품과의 인기 경쟁에서 불리하게 작용되었다. 이 파이지엘로의 세비야의 이발사에 대해 현재에도 공연가치가 충분한데 너무 강력한 경쟁자를 만난 나머지 억울하게 묻혀버렸다고 아쉬워하는 전문가들이 많다.[14]

2.2.3. 전성기: 세미라미데


이처럼 세비야의 이발사로 겨우 24살의 나이에 대선배의 아성까지 넘어버린 로시니는 이제 거리낄 것이 없었다. 세비야의 이발사 이후 8년간 그는 20개의 오페라를 썼는데, 이 중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오텔로(Otello, 1816)에서 오페라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비극적이고 복잡한 스토리와 진지한 성격묘사는 이후 벨리니 - 베르디 - 푸치니로 이어지는 이탈리아 비극 오페라의 효시격으로 평가받고 있다.[15] 또 1817년에 상연된 신데렐라(La Cenerentola)는 거의 세비야의 이발사에 필적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16] 로시니의 명성은 이미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으며 로시니의 오페라는 더 이상 성공여부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흥행의 보증수표가 되었다.
30세가 되던 1822년에는 스페인 출신의 유명 소프라노 가수이자 자신의 중요한 오페라의 프리마돈나를 담당했던 이사벨라 콜브란과 결혼하였다.[17]
결혼 직후 자신의 음악이 큰 인기를 끌고 있었던 고전음악의 중심지 비인을 방문해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신데렐라와 젤미라(Zelmira) 등의 오페라를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심지어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실세 메테르니히의 초대를 받기도 했다고. 또 이 시기에 베토벤을 만났는데, 당시 베토벤은 귀가 완전히 멀어서 통역의 중개로 필답을 주고받아야 했다. 이 때 베토벤은 로시니에게,

아, 로시니 선생, 당신이 바로 세비야의 이발사의 작곡가이군요. 축하드립니다. 이태리 오페라가 계속되는 한 계속 공연될 오페라인 듯 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희가극(오페라 부파)만 쓰세요. 다른 장르의 오페라는 당신의 스타일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소.

분명 칭찬같은데 그냥 덕담으로 듣기에는 뭔가 가시가 돋힌 듯한, 지극히 베토벤다운 충고를 했다고 한다. 로시니를 만나기 전 베토벤은 분명 세비야의 이발사 공연을 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미 귀머거리가 된 그가 과연 이 오페라를 제대로 즐겼을지는 의문. 그러다 보니 이처럼 어정쩡한 덕담밖에 해 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로시니는 로시니대로 이 거장 음악가가 허름한 하숙집에서 볼품없는 옷차림으로 지내는 것을 보고 베토벤을 위한 모금운동을 제안하기도 했다는데 실제로 모금활동이 행해졌다는 기록은 없다.
비인에서 이런 저런 이슈를 남긴 로시니는 이탈리아로 돌아온 후 베니스의 페니체 극장(Teatro La Fenice)을 위해 비극 세미라미데(Semiramide)를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이탈리아에서 상연된 그의 마지막 오페라가 되었다. 이 세미라미데의 서곡을 들어보면 저음부의 비중을 높여서 한층 장중한 음향을 구현하고 있으며 나름 복잡한 전개부가 있고 조용하게 진행하면서 긴장을 고조시키다가 갑작스러운 클라이맥스로 이 긴장을 극대화시키는 등, 이 오페라에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세심한 오케스트레이션을 구현하고 있다.[18]
관현악법과 별도로 이 세미라미데는 오페라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오페라 세리아(정가극) 양식으로 작곡된 최후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19] 더 놀라운 것은 이런 명작을 겨우 33일만에 작곡했다는 것.

2.2.4. 프랑스 시기: 기욤 텔


1823년, 로시니는 영국 왕립극장(King's Theatre)의 초청을 받고 런던에 가서 큰 환영을 받았으며 5개월의 체류기간 동안 오페라 공연으로 큰 돈을 벌었다. 런던에 있는 동안 상연을 목적으로 이탈리아의 왕 위고(Ugo, re d'Italia)를 작곡했으나 미완성으로 끝났다. 돌아오는 길에 프랑스에 들렀는데 여기서도 환영을 받았다. 그는 당시 프랑스왕 샤를 10세로부터 파리의 이태리 가극장(Comédie-Italienne) 감독직을 제안받았으며, 이듬해인 1824년에 정식으로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1825년에는 랭스에서 열렸던 샤를 10세의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오페라 랭스로의 여행(Il viaggio a Reims)을 작곡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최초의 프랑스어 오페라 코린트 포위공격(Le siège de Corinthe)를 작곡하였다. 이후 몇 곡의 프랑스어 오페라를 더 작곡했으며 1829년 그의 마지막 오페라 기욤 텔(Guillaume Tell)[20]을 작곡하였다. 기욤 텔은 로시니 오페라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극의 구성이나 관현악법 등에서 본격적인 낭만주의 성향이 나타나고 있다.[21] 그런데 이처럼 본격적인 양식상의 변화와 실험을 추구하던 로시니는 이상하게도 이후 더 이상 오페라를 쓰지 않았는데 이유는 후술.
기욤 텔을 완성한 이후 그는 잠시 고향인 볼로냐에 머물렀는데, 이듬해인 1830년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발발하고 샤를 10세가 퇴위하는 바람에 재계약이 지체되었다가 1830년 말이 되어서야 다시 이태리 가극장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이 시기에 새 오페라 파우스트(Faust)를 구상하였으나 실제 작곡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1832년 종교음악 분야의 걸작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를 작곡하였는데, 전체 12곡 가운데 6곡은 자신이 작곡하고 다른 6곡은 지오바니 타돌리니(Giovanni Tadolini)라는 작곡가에게 맡겼다.[22]

2.3. 40세 이후의 로시니


젊은 시절에 이미 거부가 된 로시니는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경력을 끝낸 후 주로 프랑스에 머물면서 미식가이자 파리의 명사가 되어 유명 예술인들과 교류를 하면서 살았다. 1845년 아내 이사벨라 콜브란이 사망했으며 이듬해에 프랑스의 모델 올랭프 펠리시에(Olympe Pélissier)[23]와 재혼하였다. 재혼 후 이탈리아로 돌아갔는데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상황이 복잡하여 볼로냐를 떠나 피렌체에 머물기도 했다. 1855년부터는 완전히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였으며 1868년에 폐렴이 악화되어 죽을 때까지 재혼한 아내와 파리에서 살았다.
비록 기욤 텔 이후 오페라는 더 이상 작곡하지 않았지만 전술한 스타바트 마테르를 비롯하여 종종 이런저런 음악을 작곡했는데, 특히 그의 말년에 죽기 직전까지 작곡된 Péchés de vieillesse(노년의 과오)가 유명하다. 이 노년의 과오는 14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로 피아노 독주곡이고 종종 성악이나 다른 악기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로시니 특유의 유창한 멜로디라인이 돋보인다.

3. 여담


  • 전술했다시피 엄청난 속필과 빠른 작곡속도로 유명했다. 음악사의 대표적인 천재였던 모차르트멘델스존 등과 달리 76세까지 꽤 장수한 탓인지 상대적으로 천재라는 이미지가 약한데, 로시니도 이미 10대 초반부터 독창성이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18세에는 수준급 오페라를 작곡한 만만찮은 재능의 소위 "신동" 작곡가였다. 이 점은 소년 시절부터 재능을 보인 모차르트나 베토벤과도 비슷하다.
  • 한편으로 작곡속도가 빨랐던 것은 천재성에 기인한 것도 있지만 로시니 특유의 빈둥대는 성격도 한몫 하였다. 실제로 그는 '오늘 할 일을 내일도 아니고 모레로 미뤘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느긋하게 여유부리다가 마감이 다가올 때가 돼서야 비로소 작곡을 시작했는데, 가장 유명한 일화로 그를 고용한 극장장이 그를 오페라하우스 사무실(다락방)에 가둬두고 오페라를 작곡하게 한 뒤 지키고 있던 하인들에게 제 시간에 완성을 못 할 경우 창 밖으로 던져버리라고 한 일화가 있다. 이런 탓에 아이디어가 떨어진다 싶으면 중요한 부분만 신경써서 작곡하고 세세한 부분은 날림으로 처리하거나 기존에 작곡했던 곡으로 적당히 땜질해서 메꾸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즉, 헨델처럼 자기 작품들을 조금씩 바꿔 우려먹는 자기복제를 서슴없이 했다. 심지어는 다른 선·후배뻘 작곡가가 쓴 곡의 일부 선율을 몰래 차용한 다음 알아보지 못하게 변주시켜 자기 곡에 적용하는 만행도 밥먹듯이 행했다고 한다. 그래도 나이를 먹고 오페라 경력 후기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순수한 창작 비중이 늘어갔고 작곡 스타일이 더 세심해지기는 했다.
  • 로시니가 왜 작곡가로서 최전성기인 30대 후반에 갑자기 오페라 작곡을 중단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대체적인 의견은 로시니가 낭만주의가 본격 도래한 이후 자신의 음악양식이 환영받기 어렵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절필을 했다는 것이다. 로시니의 음악양식은 대체로 고전기와 낭만주의 사이의 과도기의 양식에 해당되는데, 그의 음악에는 분명 낭만주의를 예견하는 음악수법이 많이 나타나지만 기본적으로 로시니는 벨칸토 창법과 오페라 세리아, 오페라 부파 등의 고전기의 작법에 충실했던 작곡가였다. 게다가 1820년대가 지나면서 자신의 아내이기도 했던 이사벨라 콜브란처럼 벨칸토 창법에 충실한 가수들이 점점 사라졌던 것도 그가 오페라계를 떠나게 만든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본격적으로 낭만주의로의 전환을 모색한 작품이 바로 그의 마지막 오페라인 기욤 텔이었는데, 그 이후 작품을 쓰지 않은 것을 보면 이 새로운 음악양식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의 말년 작품인 '노년의 과오'를 들어보면 베토벤/쇼팽 등의 영향이 많이 느껴지지만 고전주의 양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고 있는데, 죽을 때까지도 전통 작법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것을 보면 기본적으로 보수성향을 가진 작곡가로 볼 수 있다.
  • 한편으로는 그가 너무 일찍 큰 돈을 벌었던 것도 이른 시기에 음악을 그만두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기본적으로 로시니처럼 속필에 다작을 하는 작곡가는 급진적인 성향을 추구하기 힘들다. 새로운 것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고 성공할지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스타일이 충분히 양식화, 정형화가 되어 있는 상황이라야 다작과 속작이 가능한 것이다. 기욤 텔을 작곡한 후 로시니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머리에 떠오르는 선율을 그저 손으로 옮기기만 하면 됐지만, 이제는 수고스럽게 찾아다녀야 하게 됐네."
즉 기욤 텔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음악을 작곡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익숙해져 있던 자신의 틀을 깨뜨려야 하고 이는 상당한 노력과 창작의 고통을 수반하게 된다. 자고로 예술은 배고픔과 인생의 상처 속에서 탄생하는 법인데, 이미 큰 부자가 된 로시니는 굳이 그런 고통을 감내하면서 작곡에 매달릴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자기 작품 중에 세비야의 이발사나 신데렐라처럼 스테디셀러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 여럿 있어서 이미 작곡가로서의 명예도 충분히 얻은 상황이었으니 더욱 빨리 힘든 음악가 생활을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 그의 작품 가운데 인기 측면에서만 보면 단연 세비야의 이발사와 체레넨톨라(신데렐라)가 압도적이다. 그래서 종종 로시니를 코믹 오페라 작곡가로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로시니는 원래 희극 작품보다 정가극(오페라 세리아)이나 서정 비극(뜨라제디 리리끄, tragédie lyrique)에 주안점을 둔 작곡가였으며, 특히 세미라미데, 코린트의 함락, 기욤 텔 등의 후기의 대작들은 작품성 측면에서도 정점을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후기작품들이 자주 연주되지 않는 것은 전술했다시피 제대로 공연하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정가극 성향의 오페라 쪽에서는 베르디푸치니와 같은 걸출한 후배 작곡가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이들보다 이전세대에 속한 로시니의 오페라가 상대적으로 밀리는 측면도 있다. 그래서 20세기 중반까지도 그의 심각한 오페라들은 주로 서곡과 몇몇 아리아만 연주되었는데, 다행히 20세기 후반부터 여러 가지 공연상의 난점을 극복하고 전체 오페라가 종종 공연되고 있다.
  • 역대 서양의 음악가 가운데 가장 운이 좋은 작곡가이기도 했는데, 일찌감치 자신의 재능을 알아본 음악계의 인사들 덕분에 젊은 나이에 큰 돈을 벌 수 있었고 그 덕에 일찍 음악인생을 접어도 평생을 돈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 일찌감치 신동으로 각광받았으나 이후 한참동안 묻혀 있다가 20대 후반이 돼서야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던 모차르트나 뛰어난 음악성에 비해 큰 돈을 벌지 못했던 바흐와 베토벤 등의 음악가에 비하면 정말 금수저를 인생에 걸고 태어난 행운아라고 볼 수 있다. 그나마 로시니 수준의 금수저라면 태어날 때부터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펠릭스 멘델스존 정도가 있지만 70이 넘게 장수한 로시니에 비해 멘델스존은 단명했다.
  • 로시니는 두 번 결혼을 했음에도 자식을 낳지는 못했는데, 사망시에 그가 남긴 재산이 250만 프랑, 현재 시세로 따지면 수백억 원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망 당시 자식이 없었던 관계로 그는 유언을 통해 재산의 일부는 둘째 부인에게 주고 친척들에게도 조금씩 나눠준 후 남은 돈은 모두 파리시 당국에 기부했는데, 파리시에서는 이 돈으로 그의 이름을 붙인 음악학교와 각종 재단을 설립했으며 이들은 현재까지도 남아 활발히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으로 로시니의 출생지인 이탈리아의 페사로에도 그의 기부금으로 로시니 음악학교가 세워져서 음악학도를 교육하고 있다.
  • 그가 평생 풍파 없이 편하게 살 수 있었던 배경에는 타고난 재복 외에도 둥글둥글하고 느긋한 그의 성격이 한몫을 했으며 재테크로 재산을 관리하는 데도 능했다고 한다. 바흐, 헨델,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바그너 등 인생 내내 크고 작은 풍파를 겪다가 간 음악사의 천재들이 모두 남들과 타협할 줄 모르고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유쾌한 성격까지 복을 받은 셈. 팟캐스트 이지클래식에서는 아마도 그가 그렇게 유쾌하고 둥글둥글한 성격의 사람이었기에 그가 제작한 오페라들이 히트했을 것이라고 했다. 제 아무리 팔기 위한 음악을 작곡했어도 그가 우울하고 괴팍한 성격이었다면 관객들이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라 하였다.
  • 요리를 배워 요리책을 쓰는 등 엄청난 미식가였는데 유렵의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로시니 스테이크" 라는 것도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송로버섯을 매우 좋아했는데 자신은 일생동안 단 세번을 울었는데 자신의 오페라가 최초로 공연에 실패했을 때, 어린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었을 때, 파리의 센강에서 보트를 타다가 송로버섯을 곁들인 칠면조 요리를 빠뜨렸을 때(...) 였다고 한다. 우스갯소리지만 항간의 소문에 의하면 송로버섯을 찾는 암퇘지 사육때문에 은퇴한 것이라고도 한다. 송로버섯 참조. 또한 미식가 못지않게 대식가이기도 했는데, 어느 가정집에서 점심 식사 대접을 받았을 때 자기 기준으로 워낙 양이 적었던지라 뚱해 있던 차에 "괜찮으시다면 나중에 이런 자리를 다시 마련하겠습니다."라는 주인장의 인사에 대놓고 말하길, "괜찮으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라고 대꾸했다는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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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사로의 올리비에리 마키렐리 광장에 있는 로시니 동상
  • 생일이 2월 29일인 탓에 4년에 한 번씩 생일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말년에 에두아르트 한슬리크[24]가 로시니를 만나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실제 나이보다 4분의 1로 줄여 말했다고 한다. 물론 심각하게 말한 것은 아니고 그저 상술한 바와 같이 그의 유쾌하고 농담하기 좋아하는 성격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어느 도시에 그의 동상(석상)을 세운다는 소식이 들리자 로시니는 "아유, 그냥 내가 동상 기단부 위에 하루마다 서 있으면 될 텐데, 차라리 그 건립비를 나한테 주셔~"라고 드립을 치기도 했다.
  • 쾌활했지만 의외로 미신 등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면도 있었는데, 일례로 13일의 금요일을 두려워하여 그 날이 되면 하루 종일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고 생활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기일이 바로 13일의 금요일...

4. 주요 작품



4.1. 오페라


  • 영국 여왕 엘리사베타
  • 기욤 텔
    • 기욤 텔 서곡(윌리엄 텔 서곡)[25]
  • 세비야의 이발사
  • 시뇨르 브루스키노
  • 이탈리아의 터키인
  • 렝스로의 여행
  • 체네렌톨라
  • 호수의 여인
  • 오리 백작
  •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
  • 마오메토 2세
  • 이집트의 모세
  • 세미라미데
  • 탄크레디
  • 결혼보증서
  • 도둑 까치
  • 오델로
  • 아르미다
  • 비단 사다리[26]

4.2. 종교음악


  • 스타바트 마테르
  • 소 장엄 미사곡

4.3. 가곡


  • 저녁 음악회(총 12곡)
  • 노년의 과오 중 1~3, 11권


4.4. 기악


  • 6개의 현악 소나타(1번 G장조, 2번 A장조, 3번 C장조, 4번 B플랫 장조, 5번 E플랫 장조, 6번 D장조)
  • 클라리넷과 관현악을 위한 서주와 주제, 변주곡
  • 첼로와 더블베이스를 위한 이중주
  • 바순 협주곡 내림나장조
  • 교향곡 D장조 '콘벤텔로'
  • 클라리넷과 관현악을 위한 변주곡
  • 피아노곡 노년의 과오 중 4~8, 10, 12권
  • 13~14권: 가곡과 피아노 작품이 섞여있음

[1] 초기 작품이지만 나름 중요한 작품이며 현재에도 종종 연주된다. 곡 전반에 모차르트나 하이든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며 나중에 자신의 오페라에 많이 사용하는 선율 처리 방식도 엿보인다. 원래는 2 바이올린, 첼로, 더블베이스 4개의 악기를 위한 작품인데 현재는 주로 현악합주 형태로 연주된다.[2] 다만 이 오페라는 1806년 당시에는 완벽하게 공연 가능한 형태로 작곡된 것은 아니었으며 6년 후인 1812년이 되어서야 대폭 개작되어 무대에 올려졌다.[3] 16세때의 작품인데도 이미 성악에서 로시니 특유의 극적이고 유창한 창법이 엿보인다. 제목을 굳이 번역하면 '오르페오의 죽음에 대해 화성적으로 표현한 절규' 정도의 의미가 되는데, 곡명이 괴랄한 탓인지 다른 언어로 잘 번역하지 않는다.[4] 참고로 로시니의 칸타타들은 그의 오페라에 가려져서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생애 동안 18곡이 작곡되었으며 심지어 그가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커리어를 마감한 후에도 종종 작곡되었다. 오페라에 나타나는 그의 창법이나 관현악 수법 등이 이 칸타타에도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전문가들에게는 로시니 연구에 상당히 중요한 음악장르로 평가받는다.[5] 6개의 오페라 중 하나는 14세에 작곡했던 데메트로와 폴리비오의 개작이며 로마에서 초연되었다.[6] 드라마 지오코소는 기본적으로는 오페라 부파에 속하지만 코믹함과 희극성으로 일관하는 일반적인 부파에 비해 좀더 심각하고 비극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굳이 한국말로 번역하면 '희비극' 정도에 해당된다. 대표적인 드라마 지오코소로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가 있다.[7] 다만 이러한 비교는 어디까지나 대중적인 성공을 기준으로 한 것이지 음악성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다. 이런 사안을 가지고 모차르트와 로시니의 재능을 단순 비교하는 일은 없기 바란다.[8] 한편으로는 이 파격적인 제안이 로시니의 음악 커리어를 망친 측면도 있다. 로시니는 39살이라는 한창 나이에 오페라 작곡가의 커리어를 마감해 버렸는데, 너무 이른 시기에 부를 축적한 탓에 머리 아프고 피곤한 오페라 작곡에 흥미를 잃어버린 것이 한 원인이 되었다.[9] 바로 알아차렸겠지만 영국의 그 유명한 엘리자베스 1세가 맞다.[10] 보마르셰의 또 다른 유명한 희곡으로 '피가로의 결혼'이 있다. 이 작품으로 유명한 오페라를 작곡한 사람이 누군지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11] 1782년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크 궁전에서 초연되자마자 유럽 각지에서 공연되었고, 이후 1787년에 3막으로 축소 개작한 작품이 더 큰 인기를 끌면서 이후 로시니가 등장할 때까지 30년 동안 유럽 각지에서, 심지어 오페라가 생소했던 미국에서도 공연되었다. 이 인기는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가 발표된 이후에도 어느 정도 지속되어서 한동안은 로시니의 작품보다 더 많이 공연되었다.[12] 다만 같은 보마르셰의 희곡을 바탕으로 하긴 했지만 각색을 맡은 대본작가는 달랐다. 실제로 두 오페라는 내용과 대사가 여기저기 다르다.[13] 공교롭게도 로시니와 파이지엘로 둘 다 76살까지 살았다.[14] 그나마 최근에 재발굴돼서 종종 연주되기는 한다.[15] 이 오텔로는 결말 부분이 원작처럼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와 해피엔딩에 가깝게 끝나는 경우 두 가지 버전이 있다. 로시니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아무리 내용이 비극적이라도 처참한 결말로 끝나는 오페라를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오텔로 항목 참조.[16] 오늘날에도 이 신데렐라는 로시니 오페라 가운데 세비야의 이발사 다음으로 자주 공연된다.[17] 이사벨라 콜브란은 로시니 음악을 연주하기 어렵게 만드는데 일조를 한 가수이기도 하다. 콜브란은 기본적으로 화려한 벨칸토 창법을 구사하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였지만 한편으로는 초고음으로부터 거의 메조소프라노 수준의 낮은 음까지 구사할 수 있었을 정도로 음역이 넓었고 그만큼 감정표현도 뛰어났다. 로시니의 주요 오페라의 프리마돈나 배역은 모두 이 콜브란의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작곡되었으며, 그런 탓에 이 콜브란이 맡았던 배역은 21세기의 A급 가수들도 상당히 힘들어 할 정도로 음역이 넓다.[18] 이 세미라미데의 꼼꼼한 관현악 수법은 베토벤의 영향 때문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19] 다만 이 세미라미데는 너무 길고 연주하기도 매우 어렵기 때문에 뛰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자주 연주되지 않는다. 그간 서곡만 연주되다가 20세기 후반이 돼서야 비로소 다시 공연되기 시작했는데, 가수들에게 극한의 능력을 요구하는 오페라로 악명이 높다.[20] 한국에서는 영어식 이름인 '윌리엄 텔'이나 독일어식 이름이 '빌헬름 텔'로 알려져 있으나, 이 오페라는 프랑스어로 작곡되었으므로 프랑스어식으로 '기욤 텔'로 부르는 것이 맞다.[21] 기욤 텔과 같은 큰 규모의 오페라를 따로 그랜드 오페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이 기욤 텔의 큰 규모는 오늘날까지 이 오페라가 자주 상연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초연시 공연시간이 6시간에 육박했다고 하며 휴식시간 등을 빼고 순수한 공연시간만 4시간이 훌쩍 넘어간다. 수십곡의 초고난도의 아리아를 부르면서 이 긴 시간을 견뎌낼 수 있는 가수는 정말정말 드물다. 그래서 오늘날 공연시에는 주로 일부분을 생략한 축약 버전으로 연주한다. 다만 기욤 텔 서곡만은 그의 관현악곡 중에 가장 자주 연주되는 작품이 되었다.[22] 그런데 로시니는 타돌리니의 곡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1841년에 타돌리니가 작곡한 부분도 자신이 다시 작곡하여 발표하였다. 오늘날에도 타돌리니가 작곡한 음악은 잘 연주되지 않는다(일단 작곡가의 인지도부터 격차가 심하다).[23] 화가들의 모델, 특히 누드 모델이었다. 참고로 로시니도 자신의 파리 저택에 화실을 만들어 놓고 종종 그림을 그렸다.[24] 당대 '비평의 교황'이라 불리며 빈 음악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브람스와 친하고 바그너, 브루크너, 말러 등에게 적대적이었다. 우리나라에는 그의 책 가운데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가 번역되어 나와 있다.[25] 마성의 BGM 맞다![26] 그의 오페라 중 거의 유일하게 흥행에서 폭망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다만 서곡은 지금까지도 종종 연주되는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