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에타노 도니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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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니코 가에타노 마리아 도니체티(Domenico Gaetano Maria Donizetti)
(1797년 11월 29일 ~ 1848년 4월 8일)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오페라의 거장으로 올라서다
2.3. 파리
3. 가족관계
4. 주요 작품
4.1. 오페라


1. 개요


이탈리아작곡가로 19세기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다.

2. 생애



2.1. 초기


1797년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베르가모에서 가난한 전당포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잠시 합창단에 있었으며, 지휘자인 요한 마이어는 도니체티의 재능을 알아보고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또한 성년이 된 후에는 볼로냐의 유명한 대위법 선생이었던 마테이 신부에게 2년동안 음악을 배웠다.

2.2. 오페라의 거장으로 올라서다


1818년 부유한 애호가의 도움으로 돈을 내고 징집을 피했으며,(...) 직후인 1822년 작곡가로 데뷔하여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1822년 1월 23일 로마에서 초연된 《조라디아 디 그라타나(Zoraida di Granata)》가 성공을 거두며 로마, 나폴리, 밀라노 등지에서 활동하며 명성을 쌓아갔으며 1826년에는 일년에 네편의 오페라를 작곡하기로 계약하기도 했다. 1830년 오페라 안나 볼레나(Anna Bolena)를 발표하여 국제적으로도 알려지기 시작한다. 조아키노 로시니가 은퇴함에 따라 오페라계는 거의 도니체티의 독무대가 된 것이다.
이후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왔다갔다하며 활동한 도니체티는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사랑의 묘약' 등 벨칸토 오페라의 걸작품들을 발표하며 명성을 떨쳤으나 나폴리의 오페라 의뢰자들과 키배를 벌이다가 초연에 실패하였고 그의 아내였던 비르지니아가 콜레라로 사망하고 만다. 아이를 가졌으나 둘은 사산되고 셋째는 며칠밖에 살지 못하였다. 아내가 죽기 이전 해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기도 하고 성공적인 경력가운데 비극적인 일들을 연이어 맞이하였다. 또 《폴리우토(Poliuto)》가 성인순교장면을 그렸다는 이유로 상연이 금지돼버리고 결국 도니체티는 파리로간다.

2.3. 파리


프랑스 파리에서는 시내의 극장 4곳이 동시에 도니체티의 작품이 상연되는 등 인기몰이를 거두었다. 하지만 1845년 대뇌 척수 매독을 진단받으면서부터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으며 1847년에 이르면서 사실상 반신불수 상태가 된다.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가 결국 고향 베르가모로 실려온 도니체티는 1848년 4월 8일 세상을 떠난다. 사망 직후 베르가모의 공동 묘지에 묻힌 도니체티의 유해는 사후 27년이 지난 1875년 베르가모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으로 이장되어 안장된다.

3. 가족관계


그의 형인 주세페 도니체티(Giuseppe Donizetti, 1788 ~ 1856) 역시 작곡가였으며 서유럽에서 활동한 동생과 달리 주로 오스만 제국에서 활동해 코스탄티니예에 쭉 살았었다. 그는 특히 오스만 제국의 국가를 작곡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물론 예니체리들같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하진 않았고 사망 후에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가톨릭 성당[1]에 안장된다.

4. 주요 작품



4.1. 오페라



[1] Santa Espirit Klisesi Mezarligi. 사진일부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