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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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조재만(曺再萬)
이명
조용찬(曺瑢燦)·조충환(曺忠煥)
자 / 호
봉헌(奉憲) / 백농(白聾)
본관
창녕 조씨[1]
생몰
1906년 10월 26일 ~ 1990년 5월 5일
출생지
경상북도 신녕군 지곡면 현고동
(현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삼창리 현고마을)[2]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조규설 전 국회의원은 그의 장조카이다.

2. 생애


조재만은 1906년 10월 26일 경상북도 신녕군 지곡면 현고동(현 영천시 화남면 삼창리 현고마을)에서 아버지 조병국(曺秉國)과 어머니 풍산 류씨(豊山柳氏)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23년 조부 조한승이 설립한 고향의 사립 백학학원(白鶴學院)을 졸업한 후 대구공립보통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924년 졸업하였다.# 대구공립보통학교 졸업 후에는 상경하여 경성부 원정(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에 거주하였으며,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1925년 그는 고향 영천에 들렀다가 북경을 다녀온 이정기(李定基)를 만나게 되었고, 그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어려운 상황을 전해들었다. 이에 그해 9월, 그는 대구에서 장진홍·이육사·이원기(李源祺)·이원유(李源裕) 등과 함께 일제 주요시설 파괴를 목적으로 비밀결사 암살단(暗殺團)을 조직, 단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휘문고등보통학교 3학년이던 1926년, 친일교장을 배척하는 격문을 쓰고 시위를 주도하다가 제적당하였다. 그해 6월 순종황제 국장일에 6.10 만세 운동이 거국적으로 전개되자 비록 제적은 당했으나 배후에서 중앙고등보통학교 및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결탁하여 적극 참여하는 한편, 백학학원 동문을 비롯한 부유한 영천 출신 유학생들을 규합, 재경영천학우회를 조직하여 비밀 지하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1926년 10월경 이정기·이육사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임시정부 요인 및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수시로 접촉하면서 강력한 무력 투쟁만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조선인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군관학교 설립을 계획하였다.
1927년 8월 군관학교 설립을 위한 자금 모금을 위해 귀국한 그는 중국으로 망명하기 직전 조직한 재경영천학우회를 중심으로 모금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27년 10월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이육사·이원기·이경식(李京植)·김형갑(金炯甲)·조우제(趙佑濟)·강진규(康鎭奎)·마석현(馬錫鉉)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기려수필, 장진홍(二) 정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1928년 1월 대구지검으로 이송된 그는 소위 폭발물 취체벌칙 위반·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치안유지법 위반· 협박·살인미수·사기 등의 혐의로 2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1929년 12월에 있을 예심에 면소되어# 그해 5월 4일 보석으로 출옥하였다.#,
출옥 후 1931년 봄에는 이육사와 함께 다시 베이징으로 망명을 시도하였으나, 도중에 발각되어 3개월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나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지역민들의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 계몽사상 교육에 앞장섰으며, 8.15 광복 후인 1947년 9월 조카 조규설과 함께 재단법인 산동학원을 설립하여 그해 11월 산동중학교를 개교하였으며, 조규설이 납북된 후에는 스스로 재단을 운영하면서 1952년 산동고등기술학교(현 영천전자고등학교)를 개교하였다.#
1990년 5월 5일 별세하였다. 슬하에 1남을 두었으며, 손자로 조승용 전 고려대학교 교수와 조중용 모건스탠리 싱가포르 한국 영업대표가 있다.#
199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24세손 '''환(煥)''' 섭(燮) 열(烈) 항렬.[2] 인근의 귀호리·금호리와 함께 창녕 조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조병화, 조규설·조규창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