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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曺奎卨[2]
1912년[3] 3월 20일[4] ~ ?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5] . 독립유공자 조재만의 장조카이다.#
2. 생애
조규설은 1911년 경상북도 신녕군 지곡면 현고동(현 영천시 화남면 삼창리 현고마을)[6] 에서 태어났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분카가쿠인(文化學院)대학을 졸업하였다.
귀국 후 미주동지회(米洲同志會) 연락원을 지냈으며, 한때 국민혁명군에 가담하여 펑위샹 휘하에서 문화과원(육군 중위)를 지내기도 했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는 대구부 전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전동)에 합자회사 동일상회(東一商會) 사장으로서 실업에 종사하였다.##2
또 1940년대에 들어서는 춘추잡지사의 연락원을 지냈다.
8.15 광복 후 1947년 9월 숙부 조재만의 권유로 재단법인 산동학원을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고향 영천군 화북면(현 화남면) 삼창동에 재단 산하의 산동중학교를 개교하였다.#
1949년에는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읍에서 고려요업주식회사(高麗窯業株式會社) 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조선요업협회 부회장에 취임하는 등 본업인 실업에 종사하였다.
한편, 1948년 11월 4일에는 대한식량공사의 이사로서 부이사장 겸 총무부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12월 3일에는 이사장서리에 올라# 1949년 2월까지 대한식량공사의 이사장서리# 및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1949년 2월 감찰위원회에 의해 공금부정소비 이력이 적발되어# 체포되었다.#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어 조사를 받았으며, 공판에 회부되어 그해 10월 29일 조봉암 전 농림부장관과 함께 징역 1년을 구형받았으나# 최종 무죄판결을 선고받았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영천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정도영을 꺾고 당선되었다. 이때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임기 1달이 채 지나지 않아 6.25 전쟁이 발발했고, 곧 납북되었다.
납북된 이후 그는 인민군으로부터 국회의원들 중 '그리 저명치 않은 인사들'로 분류되었는데, 이 무리에 포함된 사람들은 조규설 외에 김장열·정광호·허영호·김우식·구중회·홍순옥·조종승·이종성·이구수·김경도·장연송·김의환(金義煥)·유익수(柳翼秀)·김용현(金用鉉)·최병주(崔丙柱)·정인식(鄭仁植)·신용훈(辛容勳)·최석홍(崔錫洪)·조옥현(趙玉鉉)·오택렬(吳宅烈)·조중현(趙重顯)·송창식(宋昌植) 등이 있었다.1962년 3월 31일 동아일보 - 납북인사 북한생활기 - 죽음의 세월 3회
1950년 말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할 당시, 병으로 평안북도 강계군 만포읍 별오리(현 자강도 만포시 별오동)의 어느 농가에 제헌 국회의원 출신 김우식과 함께 구금되었다.1962년 4월 13일 죽음의 세월 14회죽음의 세월 19회 그후 1951년 6월 병에 차도를 보이자 다른 납북인사들이 있는 평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죽음의 세월 27회
휴전협정 체결 후 조규설은 정광호 등과 함께 평양 시내의 파괴된 고층건물 정지작업에 동원되었으며 1954년 8월에는 정광호·김우식·최석홍·조옥현·송창식 등과 함께 황해도 은률군 과수원 분농장에 작업반으로 배치되었다.죽음의 세월 37회
이후 정규호(鄭圭好)와 함께 평양신흥섬유노동조합에 배치되어 일했다.죽음의 세월 53회
북한총람에 의하면, 그는 1956년 7월 재북 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을 지냈으며, 그해 10월 병으로 요양소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의 장남인 조영호(曺暎鎬)는 1968년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아드 스쿨에서 유학하였으며, 이후 1973년부터 템플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40년간 재직하다가 지난 2012년 5월 퇴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