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평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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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3세기 중반인 기원전 260년 전국시대 막바지에 벌어진 최대의 전투이자 진(秦)나라가 조나라를 개박살낸 전투. 기록상으로 조나라 병사 '''약 40만 명이 참수(斬首)''' 당했다. 당장 사기백기왕전 열전에 백기가 조나라 포로들을 갱살(阬殺)했다고 한 다음 구절에 '前後'''斬首'''虜四十五萬人'라고 해서 포로로 잡힌 45만 명을 전후로 모두 '''참수'''한 것이라고 나온다. 따라서 갱살이긴 한데 생매장이 아니라 죽여서 묻은 것이다.[3] 또 구덩이 갱자를 쓰는 바람에 일반적으로는 생매장으로 해석되지만 근래에 갱살은 생매장이 아니라는 반론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我固當死。長平之戰,趙卒降者數十萬人,我詐而盡阬之,是足以死。」
나는 죽어 마땅하구나. 장평 땅의 싸움에서 항복한 조나라 병사 수십만 명을 내가 속이고 모두 구덩이에 파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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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백기왕전열전에서 소양왕의 명령으로 자결하는 백기의 유언
물론 고대 기록 특유의 과장일 가능성이 있어 기록을 그대로 신뢰하긴 어렵지만 이 전투에서 조나라군이 심대한 타격을 입고 국력을 상실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당시 진나라의 제도는 '목 하나를 베어오면 일계급 승진'이어서, 이미 장평대전 이전에도 한(韓)나라의 15만 병사를 참수한 사건, 한나라와 위나라의 연합군 24만 명을 참수한 사건 등 무자비하고 잔혹하기로 악명을 떨쳤다.
2. 장평대전의 배경
기원전 262년 조효성왕이 꿈을 꾸니 좌우가 다른 색깔의 편의를 입고 하늘을 날다가 땅에 떨어지니 금으로 된 금산과 옥으로 된 옥산이 있었다. 꿈에서 깬 조효성왕은 해몽을 잘하는 숙부 조숙과 서사 감을 불러 해몽하게 하였다.
그쯤에 진은 6국에게 '성 안 내놓으면 쳐들어 간다'는 식으로 말도 안되는 공갈협박을 일삼았다. 겁을 먹고 성을 주면 좋고, 반항하면 그걸 꼬투리 삼아 짓밟아버리고 성을 빼앗는 식으로 실속을 챙겨왔다. 자연히 6국은 서로 힘을 합쳐 진에 대항했으니, 바로 유명한 합종책(合縱策)이다.조숙:좌우색깔이 다른 옷을 입은 것은 둘이 하나가 된다는 뜻이고 땅에 떨어진 것은 영토를 얻는다는 뜻이며 금산과 옥산은 많은 재물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서사 감:좌우색깔이 다른 옷을 입는 것은 하나가 둘로 갈라지는 것을 의미하고 땅에 떨어지는 것은 중간에 일이 그르친다는 뜻이며 금산과 옥산은 보기는 좋으나 쓸수 없으니 이는 흉몽입니다.
한편 진나라는 자칫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합종 연합군이 단숨에 함곡관까지 밀고 들어올 태세였다. 결국 매번 죽기살기로 싸워야 했으며, 6국을 각개격파할 궁리를 하니 바로 유명한 연횡책(連橫策)이다.
합종연횡에 이어 진나라의 대외 전략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있었는데, 바로 진 소양왕(昭襄王)이 범수를 승상으로 앉힌 것이다. 범수가 제창한 '''원교근공'''(遠交近攻)책[4] 을 국시로 삼아 제나라 공략을 보류하고 인접한 한나라와 위나라를 주적으로 설정한다.
기원전 265년 진은 명장 백기를 보내 한을 공략했고, 한은 영토가 남북으로 두 토막나 북쪽 상당(上黨) 지방[5] 이 고립되었다. 그러자 상당 태수는 진에게 땅을 뺏기느니 조(趙)나라에게 준다고 덜컥 조에 항복해버렸고, 효성왕(孝成王)은 좋다고 받았다. 그러자 당연히 진나라는 빡돌았다.[6][7]
이때 평원군은 한나라의 성을 받는 것을 찬성했으나 군사적 역학관계를 이해하고 있던 염파는 반대했고 인상여는 병으로 회의 참여 자체를 못하게 된 상태였다. 그런데 결국은 효성왕이 지도를 받음으로써[8] 진과 조의 전쟁이 시작된다.
3. 장평대전의 전개
- 이하의 내용은 소설 열국지의 내용과, 전후사정에 대해서 독자 연구가 포함된 문서다. 장평대전의 경과가 기록된 사서는 백기왕전열전으로, 사서의 기록만 읽고 싶은 사람은 링크를 참고하자.
그 사이 조나라에서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진나라에게 화해를 청하는 한편, 위나라 그리고 초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사절단이 진나라의 첩자들에게 발각되었고, 진나라는 위나라의 수도인 대량을 한나라의 땅인 원옹을 이용하여 수몰시키겠다고 협박해 위나라와 초나라의 연합계획을 중단시켰다.[10]
양 군세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해서 원활하게 병력을 보충하고 충분한 보급을 받는 조나라에 비해 진나라 군대는 왕흘의 지휘 아래에서 치러진 수 차례 공세의 실패로 인하여 병력소모가 막심해 전투력이 낮아져 있었다. 장평까지 늘어진 보급선이 한나라나 위나라에 인접해있어 다른 육국에 공격받기 쉬운데다가, 초나라까지 이어진 넓은 전선은 진나라에 병력 집중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11] 반면 조나라의 선택지는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방어전으로 진나라가 자멸하거나 철수할때까지 버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조나라의 전군을 총동원해 지친 진나라군을 요리하는 것이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진나라의 패배가 확실한 상황이었다.
만일 여기서 진나라가 물러난다면 조나라를 필두로한 삼진의 반격은 기정사실이었고 이것은 여태까지 진나라가 쌓아올린 공적이 물거품이 되어 조나라 침공을 기획한 진나라 재상 범수는 실패의 책임을 피하기 힘들 것이었다. 자신의 몰락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범수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승률이 낮은 도박수를 던진다. 조나라군이 두번째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범수는 조나라에 첩자를 보내 지구전을 펼치는 염파를 비방하고 진나라가 두려워하는 것은 마복군 조사의 아들 조괄뿐이라는 소문을 내어 효성왕과 염파 사이를 이간질하고 조나라로 하여금 장평의 굳건한 진지에서 나오게 하려 했다. 동시에 몰래 장평 진나라군의 총사령관을 자신의 정적이지만 당시 진나라 최고의 명장이라는 평가를 받던 백기로 교체하고 왕흘을 부사령관으로 하여 이를 발설하는 자는 참수에 처하게 하도록 했다.
염파의 방어전으로 전황이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조 효성왕은 내심 염파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해를 넘기는 총력전은 조나라의 재정에 엄청난 부담이었고, 일방적으로 방어만 하고 진나라군과 싸워 물리치지 못하는 염파가 못마땅했다. 이로 인해 진나라에 저자세로 외교를 해야했기 때문에 자신의 권위가 실추된다고 생각했다. 효성왕은 염파가 나가 싸워 진나라군을 물리치길 바랐지만 염파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를 파악한 범수는 조나라에 염파가 진나라에 투항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후 진나라 첩자가 흘린 유언비어가 조나라에 퍼지자 효성왕은 이를 핑계로 염파를 해임하고 단기결전을 주장해왔던 조괄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조괄이 똑똑하기는 하나 경험이 없습니다. 이는 거문고 줄을 아교로 고정시키고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처럼 현실에선 응용할 줄 모르니 염파 장군을 그대로 두십시오. 아군의 2배나 되는 진나라 군세를 보면 잘 지키는 게 이기는 일입니다.
인상여
총사령관을 실전경험이 전무한 조괄로 교체하는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조괄은 당시에 뛰어난 젊은 인재라는 평을 듣고 있었고 효성왕의 의지가 강했기에 결국 실행되었다. 효성왕은 초기의 예봉이 다 꺾이고 극심한 병력소모로 약해진 진나라군이 손쉬운 먹잇감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진나라와 장평의 보급선은 멀고 조나라와는 가깝기 때문에 보급의 시간차를 이용해 조나라가 군대를 총동원하여 장평으로 보낸다면 조나라군이 상당한 숫적 우위를 지니게 되어 진나라군을 제압할 것이라 보고 효성왕은 조나라의 동원 가능한 장정을 모두 동원하여 조괄에게 25만의 군사를 주고 장평으로 향하게했다.제 아들은 종이 위에서 공부만 했지 자질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제 남편(조사)도 아들에게 미관말직도 주지 않았습니다. 부디 제 아들이 나라에 해를 주는 일은 막아주십시오.
조괄의 모친
문제는 장평이 장기간 빗물에 의해 침식이 일어난 황토고원지대로 협로와 골짜기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 매복과 포위가 쉬운 지형이었다는 것이었다. 조나라군의 공격을 예상한 백기는 이를 이용해 미리 견고한 방어 시설들로 이루어진 U자형의 포위망을 건설한 후 조나라군을 끌어들일 계획을 세웠다. 조괄은 새로 징집한 25만 군사와 장평에서 대치 중인 20만 군사를 합쳐 진나라군에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맞서는 진나라군은 염파의 지구전으로인한 손실이 누적되어있는 상태였다. 백기는 조나라군에 거짓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며 몇번의 전투에 연이어 패배하는 모습을 보이며 군사를 후퇴시켰다. 무안군 백기가 아닌 왕흘 따위는 쉽게 이길 수 있다고 공언하던 조괄이었고 총사령관이 백기로 바뀐 것을 몰랐던 조괄은 자신감을 얻고 진나라군에 총공격을 개시하며 진나라군을 추격했다.[12]
승리감에 취한 조괄은 계속해서 병력을 장평의 협곡안으로 진군시키며 진나라군을 추격하였고, 이에 주변에서 위험을 경고했지만 조괄은 무시했다. 진나라군은 조나라군의 진격에 계속 후퇴하며 포위망의 종심까지 조나라군을 끌어들였고 포위망의 양 날개에 매복군을 남겨 포위망을 형성하였다. 조나라군의 공격이 진나라군이 계획한 포위망의 끝단까지 다달았을때 전열을 정비한 조나라군은 진나라군을 맹렬히 공격했다. 그러나 묵가로 대표되는 건축기술자들을 진나라가 대대적으로 영입했던 덕택에 진나라의 야전건설 기술은 당대 최고였고, 그것을 적극 활용한 백기는 공격해오는 조나라군을 미리 세워놓은 장평의 험지와 연계한 보루들로 강력한 방어를 할 수 있었다. 이후 조나라군의 공세가 한계에 달하고 전열이 느슨해졌을 즈음 백기는 당시 보병이 대부분이었던 조나라군에 강력한 5000기의 기병을 출격시켜 조나라군의 방진을 갈라놓고 보병을 뒤따라 진입시켜 조나라군의 지휘체계를 끊어버리고 전투의 방향을 진형전투가아닌 분대전투로 바꾸어버렸다. 법가의 엄격한 규율과 군공수작제, 수많은 전투로 다져진 진나라군 개개인의 역량은 조나라군의 그것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고, 지휘체계가 끊어진 조나라군은 서서히 분대단위로 사냥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나라군의 후방에 매복시켰던 25000의 군사로 한왕산(韩王山)을 기습적으로 점령하여 조나라군의 퇴로를 차단한다. 그 사이 놀란 조나라 군대는 일단 보루를 세우고 전열을 정비해 진나라 군대의 공격을 막아낸 후 퇴각하려 했으나 퇴각로를 막아놓은 진군의 방어를 뚫지 못하여 결국 진나라군에 포위당하게 된다.
하지만 진나라의 병력의 배에 달했던 조나라 군대였기에 쉽게 쓰러지지 않았고 조괄은 수차례 포위망 돌파 시도를 하며 본국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그리고 포위는 했으나 조나라 군대의 대부분이 온전한 상태고 조나라가 소수의 구원병이라도 보내서 장평의 조나라군과 함께 진나라군의 얇은 포위망을 벗겨낸다면 전황이 단숨에 역전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백기도 본국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장평대전의 승부는 이제 진, 조 양국의 행정, 동원 능력에 달리게 되었는데 여건상 장평과 가까운 조나라가 빠르게 지원병을 보내 장평의 포위망을 풀어낼 것이라 보였지만 조나라는 장평에 동원 가능한 장정의 거의 모든 수를 보낸 상태인데다가 법가로 지배되는 진나라의 우수한 행정, 동원 능력으로 인해 장평에는 진나라의 지원군이 먼저 도착하게 된다.[13]
진나라의 소양왕은 백기가 조나라의 40만 대군을 장평에서 포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즉각적으로 전국 15세 이상의 장정들에게 작위 1계급 특진을 내림과 동시에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자신은 장평과 가까운 하내에 행차해서 일단 하내의 장정들을 장평에 보낸 이후 장평에 수십만의 지원군을 보내고 조나라의 보급로를 모두 차단했다. 결국 장평이라는 요새에 스스로 갇히게 된 조나라군은 진나라의 포위망을 뚫을 수 없었고 포위된 46일 뒤 식량과 물이 고갈되어[14] 속수무책이 된 조괄은 포위망을 뚫어보기 위해 최후의 공격을 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조괄은 화살을 맞아 고슴도치가 되어 죽었다.
4. 포로 학살
조괄이 죽자 지휘관을 잃은 40만의 조군은 항복하였고, 진군은 포로 45만 명을[15] 잡았다. 허나 진군은 45만 명의 포로를 먹여살릴 수도, 돌려보낼 수도 없었고, 결국 이들을 '''전부 참수하고 갱살했다'''. 자비랍시고 15살이 안 된 애들을 살려줬는데, 사기에 따르면 고작 24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진나라군의 피해도 적은 것은 아니어서 십만 단위의 사상자가 나왔다.
이 대학살의 원인은 고대 중국은 당대 서양과 달리 노예시장같은 게 없어서 노예시장에 팔아넘기거나 하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고려대상이 아니었고 수십만을 진나라에 포용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며 조나라로 돌려보내면 적을 고스란히 보내주는 꼴이 되기에 전부 죽인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또한 진나라의 군공수작제에 따르면 죽인 적의 수급을 갖고 가야 신분 상승이 되는터라, 잡은 포로들을 풀어주는 순간 신분 상승의 길이 막힌 진나라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전부 죽였다는 설도 있다. 이 의견을 뒷받침 하는 것으로 백기왕전열전에는 "먼저 포로의 목을 '베고' 매장했다." 라는 대목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백기의 포로학살은 흔히들 생각하는 피에 굶주린 학살자들과 달리,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저지른 홀로코스트와 같은 성격의 학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단 위에 기록된 추측을 떠나, 열전에 기록된 바로는 백기는 이러한 이유를 들어 학살을 저질렀다고 한다.
또한 눈여겨볼 점은, 호왈백만으로 불린 숫자일 가능성이 크지만 무려 45만에 달하는 포로를 백기의 뜻으로 학살했다는 것이다. 즉 당시 왕이었던 소양왕이나, 재상 범수의 허락을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벌인 학살인데, 학살에 대해서는 왕과 범수도 문책하지 않았으며[16] 사서에서는 '진나라 사람들이 백기는 죄가 없었다 여기며 제사를 지냈다'는 대목이 나올 정도로 진나라 사람들은 백기의 행동에 문제가 없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당대 진나라 지도부와 사람들의 마인드는 전선 지휘관이 수십만명을 학살해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잔인했다'''고 말할 수 있다.「前秦已拔上黨,上黨民不樂為秦而歸趙。趙卒反覆。非盡殺之,恐為亂。」
「예전에 진나라가 상당 땅을 점령했을 때, 상당의 백성은 진나라에 속하는 것을 싫어하여 조나라에 의탁했다. 조나라 병사는 줏대가 없어 언행을 이랬다저랬다 한다. 모두 죽여버리지 않으면 난을 일으킬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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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사기 백기왕전열전
전설에 따르면 조사는 생전에 아들 조괄이 장군이 된다면 필시 군대를 파멸시킬 것이라 염려했었고, 조사가 사망한 후 조괄의 어머니도 조왕(趙王)에게 조사의 말을 전하며 조괄을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왕은 뜻을 굽히지 않자 조괄의 어머니는 어떤 결과가 나와도 자신의 가문에는 죄를 묻지 않는다는 약조를 얻어내어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조나라에 삼군을 이끈 장수가 패적하면 일족까지 처벌한다는 법이 있었다고.
5. 장평대전의 결말
장평대전 직후 백기는 바로 조나라 수도인 한단으로 쳐들어가 멸망시키자고 주장했지만 범수는 정적인 백기가[17] 공을 세움으로써 자신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게되어 장차 있게될 정치적 보복을 염려했고 결국 조나라의 세객인 소대[18] 의 설득에 넘어가 백기가 공을 쌓지 못하게 소양왕을 설득해 몇 달 이후 한단을 공격할것으로 결정했다.
당시의 상황은 사기 백기왕전열전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몇 달 이후 진나라 군대는 장평대전의 피로로 병이 든 백기 대신 왕릉을 총사령관으로 한단을 공격했지만 한단의 백성들의 필사적인 저항에 오랫동안 한단을 함락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신릉군이 위나라에서 지원군을 훔쳐오고, 평원군은 모수의 재치로 초왕에게 지원군을 받아 올 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신릉군, 평원군, 모수 항목 참조.)韓、趙恐,使蘇代厚幣說秦相應侯曰:
한나라와 조나라가 두려워하며 소대(蘇代)에게 후한 예물을 주고 진나라 재상 응후 범수를 설득하게 했다.
「武安君禽馬服子乎?」
「무안군이 마복군의 아들을 잡았습니까?」
曰:
응후 범수가 말했다.
「然。」
「그렇소.」
又曰:
또 소대가 말했다.
「即圍邯鄲乎?」
「곧바로 한단(邯鄲) 땅을 포위할 것입니까?」
曰:
응후 범수가 말했다.
「然。」
「그렇소.」
「趙亡則秦王王矣,武安君為三公。武安君所為秦戰勝攻取者七十餘城,南定鄢、郢、漢中,北禽趙括之軍,雖周、召、呂望之功不益於此矣。今趙亡,秦王王,則武安君必為三公,君能為之下乎?雖無欲為之下,固不得已矣。秦嘗攻韓,圍邢丘,困上黨,上黨之民皆反為趙,天下不樂為秦民之日久矣。今亡趙,北地入燕,東地入齊,南地入韓、魏,則君之所得民亡幾何人。故不如因而割之,無以為武安君功也。」
「조나라가 망하면 진왕은 천하의 왕이 되고, 무안군은 삼공(三公)이 될 것입니다. 무안군이 진나라를 위해 싸워서 이기고 70여 개의 성을 공격해 빼앗았으며, 남쪽으로 언 땅ㆍ영 땅ㆍ한중 땅을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조괄의 군대를 모두 사로잡았으니, 비록 주공(周公)ㆍ소공(召公)ㆍ태공망(太公望)의 공적도 이것만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조나라가 망하고 진왕이 천하의 왕이 되면 무안군은 반드시 삼공이 될 것인데, 그대는 그보다 낮은 자리를 참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 밑에 있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진나라가 일찍이 한나라를 공격해 형구(邢丘) 땅을 포위하고 상당 땅을 곤궁하게 했을 때, 상당 땅의 백성들은 모두 조나라로 갔으니 천하가 진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싫어하게 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조나라가 망하면 북쪽 땅은 연나라로 들어가고, 동쪽 땅은 제나라로 들어가며, 남쪽 땅은 한나라와 위나라에 들어갈 것이니, 그대가 얻을 백성은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조나라의 땅을 나누어 받고 무안군이 공을 세우지 못하게 하는 쪽이 낫습니다.」[19]
於是應侯言於秦王曰:
이에 응후 범수가 진소양왕에게 말했다.
「秦兵勞,請許韓、趙之割地以和,且休士卒。」
「진나라 병사는 지쳤으니, 한나라ㆍ조나라의 땅을 나누어 받고 화친을 맺어 우선 병사들을 쉬게 하십시오.」
王聽之,割韓垣雍、趙六城以和。
진소양왕은 이를 받아들이고 한나라의 원옹(垣雍) 땅과 조나라의 성 6개를 나누어 받고 화친했다.
正月,皆罷兵。
정월, 병사를 모두 불러들였다.
武安君聞之,由是與應侯有隙。
무안군이 이를 듣고 이 일 때문에 응후 범수와 사이가 나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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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백기왕전열전
평원군은 한단에 초나라의 지원군보다 먼저 도착해서 자신의 공을 자만하며 한단 밖에선 전쟁이 벌어지는데도 사치를 벌이고 있자 한문객이 조나라가 멸망하면 평원군도 무사하지 못할텐데 어째서 그러느냐고 간언했다. 이에 평원군은 자신의 처첩들을 전부 전쟁의 뒷바라지를 하게 하고 전재산을 풀어 3천 군사을 조직해 진나라의 군대가 한단을 정복하는 시간을 늦출 수 있었다.
이때 진나라에선 왕릉이 한단 공략에 번번이 실패하자 소양왕은 백기를 불러들였으나 백기는 병을 핑계로 이를 매번 거절하였다. 위나라와 초나라의 군대가 조나라를 구원하자 진나라의 군대는 격파당했고, 범수는 자신이 가장 신용하는 측근이었던 정안평[20] 에게 3만병사를 보내 진나라 병사를 돕게 하였지만, 그 측근은 조, 위, 초 3개국의 군사의 포위를 당해 3만 병사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게 되었다. 연합군은 태행산맥을 넘어 하동까지 진군을 추격했고, 서로의 시체로 분수가 메워질 정도로 싸웠다. 중국 위키에선 진군의 8할이 사상했다고 기록한다.
6. 장평대전의 후일담
수십만을 참수하고 파묻은 이 때의 원한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남아서 산시 요리 중에는 '백기를 삶아 먹고 싶다'라는 뜻의 츠바이치(吃白起), 혹은 바이치러우라는 음식이 있다. 물론 백기의 고기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고 두부 요리다. 한국사에서 개성시 사람을 탄압하고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를 개성 사람들이 원망해 해먹은 성계탕과 비슷한 유래.
결국 이렇게 애를 쓴 덕분에 조나라는 멸망의 길에서 잠시 벗어났지만, 인구가 수백만에 불과한 나라에서 중요한 노동력인 수십만 장정들이 증발하여 재기하지 못하고 쇠락하고 만다. 이후 조나라는 국력을 짜내어 약 30년 정도 버텼지만 결국 기원전 222년에 멸망했다.
이 싸움에 얽힌 명장 두 사람도 '''뒤끝이 좋지는 못했다.'''
염파는 망해가는 나라 좀 살려보겠다고 연나라를 박살내다가,[21] 왕이 간신배인 곽개[22][23] 의 헛소리를 듣고 자기를 해임해버리자, 빡돌아서 후임장군 악승을 공격하고 위나라로 망명했다.
그러나 위에서 무겁게 쓰이지 않고 조왕도 다시 자기를 불러들이려고 하니 귀국하려 했는데, 또 이 간신배 곽개의 농간으로 퇴물 취급을 받고 귀국하지 못했다. 결국 염파는 이후 초나라에서 쓸쓸히 죽었다.
장평대전에서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백기는 장평전투 직후 바로 한단을 공격하자는 백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과 자신의 측근이 바로 항복해버린 것 때문에 범수에게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었고, 결국 범수에게 모함을 받았다. 그 때문에 소양왕의 눈밖에 나서 승산이 없는 전쟁에 출전하라는 억지 명령을 거부하다가 끝내 두우에서 자결했다. 이때 백기는 유언으로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참회했다.
범수 또한 자신이 낙하산으로 꽂았던 왕계와 정안평이 이어진 한단 공성전에서 갖은 추태를 벌인 끝에 패배하게 되자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사서에는 채택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안락하게 생을 마무리했다고 전해지나, 20세기에 발굴된 죽간에 의하면 왕계와 연좌되어서 처벌했다는 기록이 있다."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다.)나는 죽어 마땅하구나. 장평 땅의 싸움에서 항복한 조나라 병사 수십만 명을 내가 속이고 모두 구덩이에 파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죽어야 한다."
그리고 50여 년 뒤 진나라 병사 '''20만'''은 일단 항복했지만 결국 신안(新安)에서 초나라의 무장인 항우에 의해 불시에 습격을 받아 태반이 죽고 살아 남은 자들도 모조리 학살을 당한다.
7. 장평대전과 관련된 논란
장평대전에서의 학살은 실제가 아니며 그 수가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사망자가 어마어마하리라는 건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정말 진나라와 조나라가 각각 4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하여 전쟁을 치뤘는지, 수십만명이 한 장소에 산 채로 묻혔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실제로 장평대전에서 묻은 것으로 추측되는 무덤이 발굴되었다.참고. 발굴 보고서[24] 를 보면, 시신 대부분은 위에서 내려친 흔적, 화살을 맞은 흔적이 있고 몇몇 시체는 몸통만 있지만 머리가 없고, 화살에 맞은 시체 중에서는 화살촉도 함께 발견된다. 이것은 조나라 병사들이 모두 죽은 다음 매장된 것임을 설명해준다. 따라서 산 채로 매장되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또한 시신의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건대 대부분 전투 중에 죽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진이 의도적으로 학살을 한 게 아니라 어차피 항복해 봐야 죽을 거라고 판단한 조군이 스스로 항복을 거부하고 싸우다가 죽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볼 소지가 있으며, 중국 학자들은 산 채로 묻은 게 아니라 죽인 시체들을 파묻은 거라고 보고 있다.
이 의견을 뒷받침 해주는 기록 또한 존재한다. 백기왕전열전에서 조나라군은 46일 동안 보급이 끊긴 채 포위 당했는데, '모든 병사가 서로 죽여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렀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처절히 저항했다. 그때 조나라군 대다수가 기아와 전염병에 시달리며 진나라군과 싸우다가 죽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 진나라의 학살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장평대전이 끝났을 때 조나라군의 규모는 크게 줄어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갱살을 당한 병사들의 규모에 관해서는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유골의 수는 130개에 불과하며 1호7갱과 2호갱이 각각 크기가 너비 5m/길이 11m, 너비 3m/길이 55m이기 때문에 이곳에 수십만 명을 다 묻을 수는 없다. 물론 이곳 말고도 더 많은 무덤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후속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규모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일단 사서에 기록된 내용만 보자면 진나라군의 숫자는 알 수 없고, 조괄이 이끌었다가 항복한 조나라군이 40만, 학살 당한 조나라군의 포로 숫자는 총 45만이라고 나와있다. 그런데 위에도 써있듯이 40만의 조나라군은 46일동안 처절히 버티다가 항복했다고 하며 중간에 추가된 5만명의 포로는 백기 부임 이전 치뤘던 전투 중 잡았던 조나라의 포로로 추측되는데 [25] 이러한 내용을 다 따져본다면 조나라군의 규모는 45만에 더해 수만~수십만이 더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아무리 중국이라지만 과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규모.[26]
일각에서는 당대 중국 총인구 규모 자체가 2천만 안팎이고 진을 제외한 나머지 6국의 인구는 다들 수백만 정도임을 감안할 때 조군의 사망자는 실제로는 10만 명 정도고, 대부분 학살당한 게 아니라 퇴로가 막힌 뒤 전멸 당하고 나서 진군이 집단으로 매장 해버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언제나 병력을 부풀리는 관습이 있었고, 겨우 수백만 규모의 인구로 40만씩이나 되는 대군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조괄의 군대도 그렇게 실제보다 부풀려졌을 공산이 크고[27] , 시신 한 구를 일일이 셀 여유 따위가 전장에서 있을 리 없으니, 백기가 그 과장을 그대로 믿고 호왈 40만이라고 보고했거나, 백기가 자신의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서 40만이라고 보고한 뒤, 여기에 6국을 겁주기 위해 40만을 모두 학살했다고 발표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 춘추전국시대의 기록, 특히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신뢰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기전파목의 열전을 보면 알겠지만 기록이 굉장히 단순하다. 분서갱유와 초한쟁패를 거쳐 소실된 기록이 굉장히 많아서 사마천도 사기를 쓸 때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또한 사기에는 병력의 규모가 자세히 나와있지 않은 경우가 매우 많다.
게다가 춘추전국시대로부터 훨씬 후대에 작성된 자치통감이나 실제 역사에 바탕을 두었지만 과장이 심한 전국책이나 소설인 열국지는 그 과장이 한술 더 뜨는데, 전국책에서는 장평대전이 끝나 '나라에 남자가 없다.'라는 소리를 듣던 조나라가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무려 13만명을 동원하고, 연나라는 무려 '''60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나라를 침략한다! 그나마 숫자가 적은 자치통감은 연나라가 전차 2천승을 동원했다고 하는데, 1승마다 전차병 3명, 보병 75명, 보급 22명으로 병거 1천 승은 십만 대군을 뜻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20만 대군'''을 동원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춘추전국시대의 전쟁 규모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장평대전에서 이후 역사서에 40만으로 기록될 만큼 많은 수의 조나라 청년들이 죽었고, 이 여파로 조나라는 끝끝내 이때 잃은 국력을 회복하지 못한 채 멸망했다는 사실이다.
'''장평조고(長平弔古)'''
趙兵四十萬 生聚自何年
조나라 병사 사십만, 언제부터 모였던가?
一朝爲秦坑 是孰驅之前
하루아침에 진나라에게 파묻히니, 누가 그 앞에서 말 몰아 지휘했나?
陰雲慘白日 西風號九泉
음산한 구름이 환한 해 가리고, 서방에서 부는 바람 구천에 울부짖네.
林林億兆衆 竪子頭可縣
하고 많은 억조 군중이니, 더벅머리 아이의 머리 정도는 매달 수도 있었으리.
甘心受大戮 白骨深谷填
널리 죽임당함을 달게 받아서, 백골이 깊은 골짜기 가득 메웠네.
磷火夜夜明 難消萬劫冤
도깨비불 밤마다 일어나 비추니, 만겁의 원한은 풀기도 어려워라.
快哉杜郵劍 庶幾稍有天
이여, 아마도 하늘은 있었나 보구나.丹河流不盡 此恨終綿綿
단하의 흐름은 다하지 않으니, 이 원한 마침내 면면히 이어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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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대중매체에서 묘사된 장평대전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하라 야스히사의 만화, 킹덤에서 장평대전에 관한 부분을 간략하게나마 다루었다. 장평대전에서 조나라의 패전에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한 염파의 경질과 조괄의 무모한 작전, 백기의 40만 생매장 에피소드 등 굵직한 부분에 대해서 역사서의 기록을 따르면서, 염파가 경질된 이유를 간신배 곽개의 농간이 아니라 2년에 걸친 장기전을 견디지 못한 조나라 왕의 실책으로 설명하고 있다.[30]
그리고 가공인물로서 장평대전의 생존자인 만극의 이야기가 비중있게 다뤄진 바 있다.[31]
킹곤타의 달인전 ~ 9만리를 바람에 타고 ~에서도 비중있게 등장한다. 왕흘과 염파의 대치, 조왕에 의한 염파의 경질과 애송이 조괄, 냉혈한 백기에 의한 대학살까지 그려진다.좀 다르게 묘사된 건 조괄이 듣보잡 진나라 졸병에게 화살을 맞고 죽는 것. 백기가 일부러 듣보잡 추남 졸병을 시켰는데 활 좀 잘 쏜다는 졸병을 골라 시켰다. 조괄을 잘 맞춰 죽이면 금 100매와 진급같이 졸병으로선 엄청난 보상을 약속하지만 빚맞추면 노역병으로 힘겨운 노역만 시킨다는 엄명이라 그 졸병은 긴장하지만 숨어서 기다리다가 먼저 온 조괄을 침착하게 쏴서 등에 맞춘다. 조괄로서는 함정에 걸렸다는 걸 알자마자 등 뒤에 날아온 화살이라 그 고통에 정줄놓고 뒤돌아보는데 그 졸병은 다시 한번 침착하게 이마를 쏴서 조괄을 죽여버리고 총사령관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자마자 조군은 당황해하며 싸우지도 못하고 물러난다. 낙마한 조괄의 시체를 보며 백기는 그 졸병을 칭찬하고 약속한 상을 내린다고 한다. 조군은 이후에도 부장을 중심으로 저항하지만 이미 사기가 바닥난 상태에 패하고 항복하려고 하지만, 역사대로 백기는 다 죽이라고 명령한다.
범저의 명령으로 온 다른 대신이 "장군! 재상께서 조군이 항복하면 교섭을 위하여 더 이상 죽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라고 막으려 하지만 백기는 살기어린 눈으로 쳐다봐서 그 대신도 움찔거리며 물러나야 했다. 그래도 그 대신이 그렇다면 소년병이라도 일부라도 살려달라고 거듭 간청하여 18살 이하 소년병 240명만 살려줘서 보낸다. 이 소식에 진왕은 잘했다고 하지만 거꾸로 범저는 격분해하며 "백기 이놈이 내 명령도 씹고, 닥치는 대로 40만을 다 죽이면 누가 항복하겠느냐! 세상 인심을 다 잃고 우리 진나라를 악랄하게 만들었구나!"라며 왕에게 간청해 백기가 대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상관인 재상의 명령을 어겼다는 점으로 사령관직에서 일시 파면해 근신하라고 하여 진왕도 40만을 다 죽인 건 아무렇지 않게 여기나 재상이나 신하들이 안 좋게 보니 할 수 없다며 백기를 근신하게 한다.
중국 사극 대진제국3에서도 비중있게 등장한다. 조나라군의 소년병들을 등장시켜 전쟁의 참혹함을 배가시켰다. 포위가 계속되자 지치고 굶주린 조나라군은 싸울 힘도 없어서 그저 누워서 멍때리고 진나라군은 그저 포위만 한 채 그런 조나라군을 지켜볼 정도. 결국 조괄은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나 전사한다. 여기서는 조나라군 40만을 다 죽인 것은 백기가 아니라 범저가 진왕에게 어차피 살려두면 다시 조나라로 돌아갈 것이라며 충동질 한 것으로 묘사된다. 진왕도 범저의 주장을 옳다고 생각하나 차마 40만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지 못해 백기가 알아서 죽이길 바란다. 백기는 명령은 하지만 자시에 실행케 하는데, 그러면 어두워서 잘 안보여 힘들지 않냔는 질문에 "그래야 조군의 얼굴이 안 보일 테니까." 라고 대답하여 죄책감을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