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괄

 

趙括
(? ~ 기원전 262년)
1. 소개
2. 생애
3. 평가
4. 조괄을 위한 변명
5. 대중매체에서


1. 소개


중국의 전국시대졸장으로, '''고대 중국의 똥별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인물.'''
진(秦)나라 에게도 뻣뻣하게 굴 정도로 강해진 조(趙)나라의 국력을[1] 한순간에 말아먹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잔인하게 털려버렸다.

2. 생애


명장 조사의 아들이라 어려서부터 많은 병서를 익혔기 때문에 아버지보다도 병법에 더 밝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괄은 이론에만 뛰어났을 뿐, 실전에서 대군을 지휘할 만한 재목은 아니었다.
"우리 집안에 대를 이어 명장이 났다"고 조괄의 어머니가 기뻐하자, 조사는 아내에게 "전쟁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인데 괄이는 이를 너무 가볍게 여긴다"며 아들이 장수가 될 그릇이 결코 아니라고 했으나…
조사가 죽은 뒤 진(秦)과 조(趙)가 큰 전쟁을 벌였는데, 진나라 대장 왕흘이 조나라 백전노장 염파를 도저히 이길 수 없게 되자, 진 승상 범수는 꾀를 내어 비밀리에 진나라 대장을 백기로 교체하는 한편 '염파야 껌이지만 조괄은 좀 짱인 듯'하고 헛소문을 냈다. 애초에 염파는 전략적 견벽거수[2]를 하고 있었고, 이 짓거리에 슬슬 조왕도 지쳐 있을 때라 이에 솔깃한 조효성왕이 염파를 내치고 조괄을 장수로 기용한다.
이때 재상 인상여는 와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효성왕에게 "조괄은 고작 그의 부친이 남긴 병법서만 읽었을 뿐 전장에서 임기응변할 줄 모르므로, 그를 장수로 삼는 것은 마치 거문고의 기러기발을 풀로 붙여둔 채 타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만류했다.[3] 심지어 앞서 나왔던 '''조괄의 어머니까지''' 나서서 "조사는 거느리는 식객이 수십이고 나라 안팎에 수백의 벗을 두었을 만큼 인망이 두터웠으나 조괄은 그만한 인망이 없고, 왕이나 종실에서 내린 하사품을 조사는 부하들에게 배풀었으나 조괄은 독점하고 있으며, 출정 명령이 떨어지면 조사는 집안일에 일절 신경쓰지 않고 군무에 몰두한 반면 조괄은 군무에 아랑곳없이 재산 불리기에 몰두하고 있으니, 청컨대 조괄을 장수로 내보내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제발 자기 아들을 장수로 삼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효성왕은 듣지 않았고, 결국 조괄의 어머니는 아들이 뭔 사달을 내도 가족은 벌하지 않겠다는 조왕의 약조를 받고서야 물러났다. 당시의 법으로는 '삼군을 이끈 장수가 패적(敗積)하면 그 일족도 친다' 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조괄의 어머니와 인상여의 예측은 정확히 맞았다.
이렇게 낙하산으로 총대장이 된 조괄은 변변한 실전 경험도 없으면서 병법대로 나서겠다며 염파가 기존에 세웠던 전략을 모조리 뜯어고치고 덤볐으나, 명장 백기의 거짓 퇴각에 속아 두 갈래 길에서 격파당한 뒤 역으로 진나라 포위에 말려들었다. 40여 일간 포위된 채 아군 시체까지 뜯어먹으며 굶주리던 조나라 군대는 마지막 돌격에 나섰지만 결국 완패했다. 대장 조괄은 매복에 걸려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어 죽었다고 한다.
이때 사로잡힌 조의 병사가 무려 '''40만'''이었다. 진에선 이들 포로를 유지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해, 소년병 240여 명만 풀어주고 나머지는 남김없이 '''생매장해버렸다'''. 이들을 전부 진나라로 끌고 갈 경우 관리할 여력이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그냥 돌려보낼 경우 패배의 굴욕감에 불탄 이들이 뒤에 큰 후환거리가 될 거라 생각해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 탓에 조나라에서는 젊은 남자의 씨가 말랐을 정도라고 하며, 국력이 크게 기울어 슬슬 막장테크를 타기에 이르렀다.
적절한 비교대상으론 삼국지마속과 비슷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더 심하게 말아먹어서 문제지만 말이다.
<후한서> 마원전에 따르면 마원은 조사의 후손이었다고 하는데[4], 조괄의 직계인지 아니면 방계(형제의 후손)인지는 불분명하다.

3. 평가


이 자에게서 유래한 성어가 지상담병(紙上談兵), 즉 "종이[5]위에서 병법을 논한다" 이다. 종종 조괄병법이라고 표현할 때도 있다.
현대의 축구 게시판을 보면 된다. 세계 유수의 감독들의 전술을 비판하며 훈수를 두는 네티즌의 위엄.[6] 똑똑한 척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꼴통을 일컫는 비유로 쓰인다. 다만 이 부분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다. 전직 축구선수였던 로비 세비지가 존 테리의 태도를 비판하며 쓴 칼럼에 이런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조사와 조괄이 병법을 논할때도 조괄은 막힘없이 대답하였으나 조사는 잠시 생각한다음 말을 하였는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조괄이 똑똑한 것으로 보이나 실상은 조사는 모든 변수와 실패시의 대응방법도 생각하고 답을 말했고 조괄은 자신이 외울대로만 답을 내놓거라 쉽게 대답한 것이다. 즉 이론만 강하고 현실에서는 전혀 쓸모없다는 거다.
참고로 <사기>에 인상여 曰, '''조괄은 합변(合變)[7]이 없다'''라고 하였다.
조선 말기 순조 재위 초기에 유배된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중에서 아들들이 책을 읽지 않은 것을 책망하면서 조괄이 천하의 불효자식이라고 하지만, 아버지의 글을 잘 읽었기 때문에 어진 아들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라면서 독서에 관심이 없는 아들들을 조괄만도 못하다며 디스했다.

4. 조괄을 위한 변명


두고두고 졸장의 대명사가 된 조괄이나, 사실 전후사정을 따져보면 조괄에게도 할 말이 없지는 않다. 특히 당시 조나라 왕이었던 효성왕의 실책은 어마어마 해서, 실책을 저지르긴 했어도 마속과 같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졸장이라고 볼 수 없다.[8]
먼저, 당시 염파효성왕에게 경질 된 이후의 일화를 보자.

廉頗之免長平歸也,失勢之時,故客盡去。

염파가 면직되어 장평 땅에서 돌아와 권세를 잃었을 때, 옛 손님이 모두 떠났다.

及復用為將,客又復至。

다시 쓰여 장수가 되자 손님이 또다시 이르렀다.

廉頗曰:

염파가 말했다.

「客退矣!」

「손님들은 꺼지시오!」

客曰:

손님이 말했다.

「吁!君何見之晚也?夫天下以市道交,君有勢,我則從君,君無勢則去,此固其理也,有何怨乎?」

「아아! 당신은 어찌 판단이 느리십니까? 무릇 천하는 시장에서 장사하듯이 사귀니, 당신이 권세가 있으면 내가 당신을 따르고, 당신이 권세가 없으면 떠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어찌 원망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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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염파인상여열전

전쟁영웅에 군부의 실세였던 염파마저 효성왕에게 경질당하고 나서는 손님이 다 떠나갈 정도로 처절한 수모를 겪었다. 심지어 당시 조괄을 처참히 털어버린 백기도 왕/재상과 몇번 대립각을 세웠더니, 그동안 세운 전공에도 불구하고 유배를 가고 자결을 명 받았다.
효성왕이 단기결전을 하겠다고 마음을 굳힌 마당에 반대한 염파마저 이런 수모를 겪는 판국이라 어리고 경험이 일천하며, 정치적 입지가 탄탄하지 못한 조괄이 지구전을 주장하기엔 너무나도 힘든 상황이었다. 조괄은 까딱 잘못 하다가는 유배, 심하면 사형까지 당할 수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왕은 적극적으로 싸우라 주문하는데 어떻게 지구전을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보면 과도하게 보일 수 있는 인상여의 비난과. 조괄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깎아내리면서까지 기용하지 말라고 한사코 거부한 것도 정말 자기 아들이 못났다기보단 아들이 이런 상황에 처하는 것을 모면하려는 몸부림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9] 또한 조사가 자기 아들이 장군감이 아니라고 평가한 것도 진짜로 아들이 장군이 되면 안된다는 뜻이 아니라 어린 나이에 너무 크게 칭송받은 아들이 거만해지는것을 경계한 아버지의 아들을 위한 완곡표현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그러나 제아무리 효성왕의 인선이 실책이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전역을 완전히 말아먹은 것은 오롯이 조괄 본인의 잘못이니, 정상을 참작할 수는 있을지언정 똥별이라는 오명을 벗기는 힘들어 보인다.

5. 대중매체에서


하라 야스히사만화 킹덤에도 등장, 성우는 타카하시 히데노리. 자신만만하게 맨앞에서 나는 조군 총대장 조괄이다! 부장 따위에게 볼일은 없다, 비켜라! 라고 왕의에게 외치지만 오히려 일격에 몸이 두동강난 채로 끔살당한다. 왕의는 "2년 동안 이어진 전쟁을 당신이 망쳤습니다.(중략)'''미련한 장군님'''."이라는 말로 조괄을 신랄하게 깠다.
킹 곤타가 그린 달인전 ~ 9만리를 바람에 타고 ~에서는 용맹하지만 닥돌만 하던 병신으로 나온다. 경력과 재능이 넘사벽인 대선배 염파에게 와서 잘난척하는데 그 모습을 본 염파는 처음으로 왕명을 거역하고 싶어졌다는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결국 조괄은 백기의 함정에 걸리는데 백기는 일부러 얼굴도 우스꽝스런 추남인 졸병 하나에게 명령하여 화살을 쏘도록 했다. 백기는 그 졸병에게 조괄을 쏴죽이면 금 100관이라는 많은 재물 보상과 장교로 특별 진급을 약속하지만 빚맞추면 노역병으로 1년 동안 힘겨운 노역만 할 것이라는 엄명을 내렸다. 조괄이 먼저 함정에 걸려 돌진하자 그 졸병은 성벽 뒤에 숨어서 숨을 고른 다음에 선봉으로 돌격한 조괄에게 먼저 화살 하나를 쏘아 맞춘다. 등 뒤에서 갑자기 화살에 맞은 조괄이 당황해자 머리에 결정타를 날려 죽인다. 그야말로 듣보잡 졸병에게 죽어서 창피를 당하라고 백기가 일부러 벌인 짓. 가쁜 숨쉬며 마음 놓는 그 졸병에게 백기는 잘했다면서 약속대로 상을 내린다고 말한다. 당연히 조괄이 죽자 조군이 어이없어하며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이후 40만 대군 생매장으로 이어지게 된다. 더불어 백기는 조괄의 목을 베게하고 창대에 꽂아 조나라로 보낸다.
삼국지 12에서는 '''당연히 나오지 않았고''' 대신 전국칠웅 시나리오에서 그의 후손인 마등 세력이 업 땅의 재야로 나오고, 마속이 조나라 소속으로 나오는데, 아무래도 조괄을 빗댄 인물 배치인 듯하다.
대진제국 3편에서는 용맹하지만 백기에게 열폭하는 젊은 장군으로 등장. 장평대전에서 진군에 포위되어 어찌할 방법이 없자 자신의 공을 탐내다 나라를 망쳤으니 죽어 마땅하다며 자결하려 하지만 다른 장수들이 말려 그러지 못한다. 결국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다 진군의 화살에 맞아 사망.
[1] 단 그렇다고 진나라와 조나라가 대등한 수준이였다는 것은 아니다. 인상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조나라는 장평대전 이전에도 진나라보다 못했다. 다만 그 때는 최소한 지지 않고 맞서 싸울 정도라도 되었던 것이다.[2] 공격 대신 수비로 일관하는 우주방어 작전으로, 이러면 원정군인 적군은 쓸데없이 군량, 돈, 인력을 낭비만 하게 된다. 단 염파처럼 군주의 의심을 사기에도 딱 좋은 작전.[3] 이 말에서 유래한 성어가 교주고슬(膠柱鼓瑟). 거문고로 곡을 연주할 때는 거문고의 현을 받치고 있는 기러기발을 옮겨 곡에 맞게 악기를 조율해야 하는데, 이 기러기발을 풀로 붙여놓으면 한 곡은 연주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다른 곡들은 연주할 수 없게 된다. 즉, 융통성이 없이 어리석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서, 병법을 잘 안다면서 정작 어느 상황에서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는 모르는 조괄에게 딱 들어맞는다.[4] 조사가 마복군(馬服君)이란 호를 받아 그 후손이 마씨를 칭했다고 한다.[5] 참고로 이 시대의 紙는 필사용 하급 비단을 일컫는 말이었으며, 이게 나중에 종이를 가리키게 된다.[6] 사실 그나마 조괄은 이론이라도 빠삭했지 이런 부류는 이론이라도 빠삭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즉 조괄은 현실에서는 좆문가 수준이지만 이론만큼은 전문가인데 이런 부류의 사람은 이론이든 현실이든 그냥 좆문가.[7] 합하여 변화함이라는 뜻이다. 무릇 전술, 전략이란 상황과 이치에 맞게 변화하고 적용해야하는데, 그냥 글이 써진 대로만 하면 개발살 나기 일쑤이다. 마속이 가정에서 그냥 밑도 끝도 없이 산에 진을 둔 것과 비슷한 것이다.[8] 오히려 마속이야말로 '''아군이 승세를 탄 상황에서''' 전세가 뒤집힐 수 있는 전선의 구멍을 막으러 나가며 상관인 제갈량이 '''전략적 목표와 전술적 대비책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해줬고''' 부장으로 왕평, 지원군으로 고상을 붙여주는 등 당시의 '''가용 자원을 다 몰아주었으나''' 본인이 똥고집을 부리다 대패한 것이니 마속 쪽이 훨씬 심각하다.[9]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