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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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Left-wing Fascism.'''확실한 건,사회주의는 전체주의와 똑같은 집단주의의 일종이다.그래서 전체주의에 적용되는 진실은 사회주의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좌파적 파시즘 체제를 가리킨다. 기본적으로는 파시즘 내에서 좌파, 사회주의적 노선이 강한 분파(슈트라서주의, 민족볼셰비즘)를 말한다.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경우도 있다. 1968년에 일어난 68혁명에서 학생들의 폭력적인 행태에 실망한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들을 좌익 파시즘이라고 지칭하며 비판했으며, 좌익 파시즘이라는 용어의 스펙트럼에 일부 신좌파도 포함되기 시작했다.[2][3]
정치학에서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지만, 스탈린주의 등의[4] 권위주의적 공산주의를 비판할 때 수식어와 같이 쓰이기도 한다.
2. 반대 세력
2.1. 사회주의 세력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에서는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단순히 운동의 과정 중에 레닌에 의해 민족개념이 괄시되지 않았을 뿐이지,민족주의 파시즘적인 민족을 가리는 양상을 띠지 않는다.
2.2. 포스트 모더니즘 학계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거두인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노년에 68혁명을 일으킨 학생들과 갈등하느라 편치 못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에 위르겐 하버마스는 상술했듯 '구좌파 뿐만 아니라 신좌파에서도 파시즘적인 광기가 나타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신좌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애정이 많았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다른 동료들처럼 매몰차게 돌아서지는 못했지만 그 또한 침략의 폭력이냐 방어적 폭력이냐 하는 문제로 청년들과 갈등했다.
3. 논쟁
냉전 시기에 스탈린주의가 좌파 파시즘이라는 수식어로 비판을 받은 적 있으며, 사민주의나 자유지상주의 좌익진영에선 레닌주의자들의 반민주적 행태를 비유적으로 좌파 파시즘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일각에선 일부 신좌파의 폭력적 경향 또한 그런 비판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파시즘이라는 용어에 대한 최소한의 공통된 합의조차 없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오늘날 학부 수준에서 정치학 교재로 폭넓게 채택되고 있는 필립스 쉬블리의 <정치학 개론>에서는, 파시즘과 권위주의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권위주의가 정부에 의한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통치방식을 일컫는다면, 파시즘은 쉽게 정의내리기 어려우나 대중동원을 통한 정치 권력의 장악을 핵심으로 하는 이념으로 이해된다. 비록 교과서 수준의 정의이기는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교과서 수준에서도 구분하고 있을 만큼 단순한 권위주의와 파시즘은 차이가 크다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스탈린주의나 마오주의가 권위주의의 전형적인 예시일 수는 있으나, 파시즘이라는 이념의 정의에 부합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스탈린주의는 레닌주의, 더 멀리보면 블랑키주의에서 비롯된 전형적인 엘리트주의적 이념이었지, 대중동원을 통한 정치권력의 장악을 목표로 한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마오주의는 대중주의적이였고 전체주의적이었고 국수주의적이었다.[5] 그러나 유물론적이었음에도 파시즘의 원류 중 하나인 미래주의와는 달리 과도한 파괴에만 집중하는 반지성주의적인 성격 또한 띄었다. 또한 중국공산당은 폭력적으로 정권을 잡았지, 민주주의 체제를 선거로 뒤집지는 않았다.[6]
파시즘에 대한 최초의 학술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가 제시하고 있는 파시즘[7] 의 조건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1) 기존 기득권의 위기. 예를 들어 <브뤼메르 18일>에서는 1848년 혁명에 이은 노동자 중심의 혁명이라는 위기가, 이후 전간기 독일에서는 볼셰비즘의 대두와 공산주의의 영향력 확대라는 위기가 있었다.
(2) 자유주의적 개혁과 보통선거 제도의 정착. 1848년에 제정된 헌법과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의 바이마르 헌법 모두 자유주의적인 헌법에 해당되었으며, 그러한 개혁의 결과로 보통선거 제도가 정착되었다.
(3) 대중들의 자발적 복종. 19세기에는 나폴레옹 신화에 빠져 있던 대중들(특히 농민들)이, 전간기 독일에서는 히틀러에게 매료된 대중들이 선동가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4) 보통선거를 비롯한 자유주의적 개혁에 대한 반동. 대중 동원을 통해 정권을 잡은 선동가들은 자신들이 집권할 수 있도록 한 바로 그 보통선거 제도를 폐기했다.
물론 파시즘은 정의되기 어려운 개념이기 때문에 이상의 접근이 100% 확실하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국가자본주의적이거나 국가사회주의적인 경제동원 체제에 대한 설명도 이뤄져야 한다.
4. 좌파 파시즘이라고 지칭되는 대상
좌파적이면서 권위주의적인 인물, 혹은 사상이 주로 좌파 파시즘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명목상 사회주의이나 사회주의자들은 제4인터내셔널에서 좌파 파시즘은 '과학적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규정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마르크스주의 참조.
4.1. 독일
4.2. 러시아
- 국민볼셰비즘(National Bolshevism)
- 민족 볼셰비키당
- 알렉산드르 두긴[9]
- 에두아르드 리모노프
4.3. 북한
조선노동당
5. 관련 문서
- 슈트라서주의
- 내셔널 볼셰비즘
- 내셔널 아나키즘(National Anarchism)
- 신사회주의(Neosocialism)[10]
- 반자본주의
- 보수혁명
- 우익사회주의[11]
- 파시즘
- 사회주의
- 좌익 내셔널리즘
- 적갈색 동맹
[1] 사진은 민족 볼셰비즘을 상징한다.[2] 60년대 말, 과격한 학생 운동을 두고 '좌익 파시즘'이라 비판했다. -안광복,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 2007, 웅진지식하우스, p410[3] "(전략)1960년대 후반 독일에서 학생 비판적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신좌파’ 운동이 일어나자 하버마스는 이 저항운동의 긍정적 잠재력을 읽어낸다. 그러나 학생운동이 그의 의도와는 달리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양상으로 전개되자 급기야 그는 학생들과 불화를 빚게 된다. ‘혁명’에 동조적이지 않은 비판이론에 대한 학생들의 비난은 급기야 사회연구소를 점거하는 사태로 이어졌고 경찰은 또 이들을 폭력적으로 해산했다. 아도르노는 학생들과의 갈등 속에서 1969년 사망했으며 하버마스는 학생들의 저항운동을 '좌익 파시즘'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공개적으로 비판했다.(후략)" 네이버 지식백과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제공[4] 여기에는 마오이즘, 주체사상 등도 들어간다.[5] 조선족을 비롯한 소수 민족의 탄압이 심했다.[6] 파시즘이라고 해서 인종주의가 무조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데, 이탈리아 파시즘의 덜한 인종주의 성향 때문이다. 무솔리니는 집권기간 동안 인종주의를 내세우지 않았고 리비아 부족장들에게 칼을 선물받는 퍼포먼스를 통해 이슬람의 수호자라 자칭한 적도 있었다.[7] 물론 <브뤼메르 18일>은 엄밀한 학술적 저술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팸플릿에 가깝고, 그런 탓으로 풍자와 비꼼으로 가득한 문체로 작성되었다. 그러나 파시즘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만큼은 오늘날까지도 유의미한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8] 1930년 오토 슈트라서가 나치당에서 제명되고 조직한 정치집단으로 정식명칭은 혁명적 국가사회주의 투쟁동맹이다.[9] 두긴은 정작 좌익 파시스트라기보단 우익 파시스트였고 민족 볼셰비키당의 분열때 좌익과 결별했다.[10] 전간기 SFIO에 있던 분파로, 민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사회주의를 내걸었다. 레옹 블룸 분파에 밀린 후로는 탈당해서 자크 도리오를 비롯한 공산당 탈당파와 함계 프랑스 파시즘의 좌익적 근원이 되었다.[11] 가부장적보수주의라고도 한다. 디즈레일리~대처이전의 영국 보수당의 이념이었던 일국보수주의처럼, 온건한 중도우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