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하이에크

 


'''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

[image]
1973년

1974년

1975년
바실리 레온티예프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군나르 뮈르달

레오니트 칸토로비치
찰링 코프만스
[image]

1. 개요
2. 경기 변동론
3. 사회주의 계산 논쟁
4. The Road to Serfdom (노예의 길)
5. 몽펠르랭 소사이어티
6. 시카고 대학
7. Law, Legislation and Liberty
8. 노년


1. 개요


Friedrich August von Hayek
1899년 5월 8일 ~ 1992년 3월 23일.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의 영국 경제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이다. 빈 대학교에서 1921년 법학박사, 1923년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1927년 오스트리아 경기연구소의 소장이 되었으며, 1931년 런던으로 이주한 뒤 런던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50년부터 시카고 대학교에서 사회윤리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말년에는 프라이부르크대학교의 종신교수직에 임명되었다.
오스트리아 학파의 일원으로 경제학, 사회학, 심리학, 정치철학, 법학 등 여러 분야를 연구했으며.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대표저서로는 《노예의 길》(1944), 《자유헌정론》(1971),《치명적 자만》(1988)이 있다.
활동 영역의 광대함이나 연구 스타일을 보면 칼 마르크스, 존 스튜어트 밀과 유사하다.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그들이 임했던 자세나 방법은 높이 평가했던 것으로 나온다. 사회주의 경제는 시장경제와 사유재산제가 확립되지 않아 개별 상품에 대한 가격 정보를 얻을 수 없고 또 성과금 제도, 즉 인센티브가 없기에 경제가 망할 것으로 예언했는데 소비에트 연방의 몰락으로 현실화되었다. [1]

2. 경기 변동론


[image]
30대의 하이에크
1920년대에 유럽은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았고, 인플레이션에 극도로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게 된다. 그는 스승인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더불어, 오스트리아 학파의 경기 변동론의 전문가가 되었다. 그는 영국의 런던정경대학으로 옮겼고, 1930년대에 케인스와 대립하는 가운데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경기 변동론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나 케인스가 1936년 일반이론을 발표하자 런던정경대학의 제자들 대다수가 케인지언으로 돌아섰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케인스의 경제학이 대세를 이루면서, 경기 변동 이론가로서의 그의 연구 업적은 빛을 잃었다. 밀턴 프리드먼은 그의 경제학이 혼란스럽고, 이런 것들이 왜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폴 크루그먼은 오스트리아 학파의 경기 변동 이론을 플로지스톤설에 비교하기까지 했다.

3. 사회주의 계산 논쟁


미제스와 더불어 사회주의적 경제 계산에 반대하는 논쟁을 펼쳤다. 오스카 랑게(Oskar Lange)가 신고전파 이론을 이용하여 사회주의 계산이 가능하다는 논증을 내놓자, 그는 신고전파의 완전정보모형이 현실과 떨어져 있다는 비판을 펼쳤고 신고전파 경제 이론과 멀어져 갔다. 그는 대다수 동료 경제학자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작성된 그의 논문 "The Use of Knowledge in Society(사회에서의 지식의 활용)" (1945)는 중요한 경제학적 업적으로 꼽힌다. 그가 사회주의 논쟁에서 보여준 접근법은 현대 정보경제학에서 볼 때 굉장히 선구적인 것이었다.

4. '''The Road to Serfdom (노예의 길)'''


[image]
존 메이너드 케인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케인스는 케임브리지에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다. 하이에크는 1940년부터 1943년까지 집필하여 1944년에 ''The Road to Serfdom(노예의 길)''을 내놓았다. 출간 직후부터 지금까지 큰 영향력을 주고 있으며 시장자유주의에 대한 인기있는 해설서이다. 또한 20세기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정치 경제 담론에 큰 영향을 주었고 오늘날까지 많이 인용되고 있다. 이 책은 하이에크가 2차대전 중 영국에서 일어나던 정치 경제 사상적 변화가 전체주의 흐름으로 가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쓴 책이다. 전체주의를 기반으로 나온 사상들이 공산주의, 나치즘, 파시즘이라 보고 전 세계가 전체주의로 가는 흐름에 대한 위기의식을 환기하기 위한 책이다. 전체주의에 대치되는 개념으로서 개인의 자유를 내세우고 있다.
비유하자면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사람들때문에 이 세상은 결국 지옥으로 간다는 것이 요지이다. 개인마다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개인들의 목적을 모두 모아 하나의 전체 목적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강제력이 필요해지는데 결국 중앙에서 계획하고 통제하려 하게된다면 그 누군가는 권력을 쥐게 된다. 결국 자유의 길을 찾아가는 듯하여 따르지만 예속의 길, 노예의 길을 가게 된다는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집산주의적 계획은, 결국 정치적인 자유도 잃게 만들게 된다고 하였다. 왜 자유를 버리고 노예의 길을 선택할까? 자유는 경쟁이 기본이고, 노력이 기본이고, 책임이 기본이기 때문이다. 경쟁하기 싫고 노력하기도 싫고 책임지기도 싫은 미성숙한 대중이 쉽게 원하는 것을 얻고자할 때 달콤하게 등장하는 정치 세력이 파시스트나 공산주의 같은 전체주의자라고 보았다.
그는 책의 첫머리에서 “나치즘이 사회주의의 필연적 결과”라고 주장하면서, 이 사실에 대한 오해가 오늘날 자유주의 문명을 위협하는 근본적인 위험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이러한 위험을 방지하고 전체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는 일이야말로 오늘날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경제적 자유를 수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경제 문제에서의 자유가 없이 개인적, 정치적 자유가 있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에크가 고전적인 자유방임주의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유방임의 원리에 대한 아둔한 고집만큼 자유주의의 명분에 해를 입힌 것은 없다”고 역설한다. 그 대신 그는 “경쟁이 가능한 한 최대한 유익하게 작동하도록 체계를 의식적으로 창출하는” 길을 택한다.한겨레-하이에크는 단순한 신자유주의자가 아니었다
1944년에 발간된 책이지만 세상사람들이 하이에크를 이해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정치인과 경제학자들은 이 책이 나오고 몇 십 년이 흐른 뒤에야 그의 주장에 주목하였고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정치인은 후술할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과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다.

5. 몽펠르랭 소사이어티


The main lesson which the true liberal must learn from the success of the socialists is that it was their courage to be Utopian which gained them the support of the intellectuals and therefore an influence on public opinion which is daily making possible what only recently seemed utterly remote.

자유주의자가 사회주의자들의 성공으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은 이상주의자가 될 수 있는 용기다. 그것을 통해 지식인의 지지를 얻고, 대중 여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여 비현실적이라고 여겨졌던 일을 현실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Intellectuals and Socialism (지식인과 사회주의), 1949년

1947년 몽펠르랭 소사이어티를 만들어, 미제스와 로빈스, 그리고 밀턴 프리드먼 등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았다. 그는 사회주의에 대한 사상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는 케인스가 "경제학자와 정치철학자들의 사상은 그것이 옳을 때에나 틀릴 때에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수준보다 더 강력하다"고 한 것을 인용하면서, 일반적인 기득권이 아니라, 사상이야말로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하이에크는 자유주의자들이 그들의 사상의 체계를 세상에 구현할 용기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에게 사회주의로 편향된 지식인들로부터 자유주의를 구하기 위해, 이념 전쟁에 참여하도록 호소했다.

6. 시카고 대학


[image]
밀턴 프리드먼
그는 경제학계의 주류에서 멀어져 갔다. 1950년에는 런던정경대학에서 시카고 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시카고 대학에서는 한스 모겐소, 레오 스트라우스, 데이비드 이스턴, 밀턴 프리드먼 같은 사회과학 분야의 거물들이 있었고, 정치사상 분야의 연구를 하였다. 그의 지적 범위는 경제학, 사회학, 심리학, 정치철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었고, 체계적인 이론을 발전시켰다.
''The Constitution of Liberty(자유의 헌법)'' (1960)에서, 그는 유럽의 두 가지 지적 전통을 논했다. 첫 번째는 존 로크, 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 에드먼드 버크 등의 영국적 자유주의 전통이며, 두 번째는 데카르트로부터 내려오는 대륙적 전통,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였다. 전자의 노선만이 실질적 자유에 가까이 갈 수 있고, 후자는 결국 자유를 파괴하고 마는 것이었다. 하이에크는 자신이 영국적인 전통을 따르고 있고, 토마스 홉스, 장 자크 루소, 벤담, 칼 마르크스 그리고 케인스 등은 후자를 따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은 불완전하며, 이러한 무지야말로 인간에게 자유가 필요한 근거이다. 그런데, 구성주의적 합리주의는 이성의 힘을 과신하여, 자유를 파괴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 또한 자유주의의 적이 될 수 있다. 현대의 시민은 근시안적이며 자기 통제력이나 절제가 없고, 민주 정부는 경제적 개입이나 재분배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고 인식하였으며, 이러한 무제한적 민주주의를 막기 위해서 헌법을 만들어 이를 막아야 한다. 즉, 민주주의는 법의 지배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7. ''Law, Legislation and Liberty''


[image]
미셸 푸코
그는 ''Law, Legislation and Liberty(법, 입법, 그리고 자유)'' 3부작 (1973, 1976, 1979) 에서 그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이 마땅히 받아야 할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다. 왜 자신의 사상이 다른 사상에 비해 우월함에도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데 실패했을까? 하이에크의 대답은 구성주의적 합리주의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게 되고, 진정한 진보는 실패하게 된다. 진정한 진보는 인간 행동의 결과가 서로 얽혀 생겨난 자생적 질서의 결과이지, 인간 이성의 설계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자생적 질서는 진화의 결과로 형성된 것으로 만든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 이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번영과 자유를 가로막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생적 질서에 대한 강조는 그를 소스타인 베블런, 조지프 슘페터와 더불어 경제에 대한 진화적 접근의 선구자로 인식되게 하였다. 그가 합리주의가 진정한 자유를 파괴한다고 공격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격으로, 미셸 푸코는 하이에크를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하이에크는 인간은 집산주의적 본능을 갖고 있다고 논한다. 시장이 제대로 작동되려면, 이러한 본능을 억제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이러한 것은 쉽게 저지할 수 없다. 사회 정의(social justice)란 개념은 이러한 집산주의적 본능 때문에 생긴 미신으로, 열린 사회와 전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개념이었다. 따라서, 사회 정의의 추구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본능은 이성으로 저지될 수 있을까? 그 이성에 대한 신뢰야말로 사회주의를 불러오지 않았는가?
그는 구성주의적인 이성으로 계획된 시스템도, 본능도 아닌, 자생적 질서야말로 번영과 자유로 갈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논한다. 자유의 법(law)은 자생적으로 새겨난 행동의 준칙을 법으로 제정한 것이며, 개인의 자유라는 이상이 활짝 필 수 있도록 돕는다. 법의 지배(Rule of law)는 자유와 어긋나지 않는다. 현대민주주의는 다수의 폭정이나, 정치적 이익의 문제 때문에, 나쁜 입법(legislation)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것을 막기 위해서는 입법부의 권한을 제한할 것이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헌법이다. 헌법은 의회가 갖고 있는 과도한 민주성을 제약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자유를 보존할 수 있게 한다. 그렇지 않다면, 무제한적 민주주의가 생겨나고, 무제한적 민주주의는 인간의 구성주의적 이성과 집산주의적 본능으로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전체주의적으로 타락시키게 된다. 무제한적 민주주의가 지나치게 강하게 될 경우에는, 과도한 민주주의를 제한해야만 자생적 질서가 유지된다. 이것이 하이에크의 제한적 민주주의 이론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도적 행동의 가치를 너무 낮추어 평가했다는 비판이 나오게 된다. 20세기의 큰 정치적 변화였던 여성이나 흑인의 참정권 확대를 생각해 보자. 이는 정치 참여자들이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운동을 한 끝에 나온 결과인가? 아니면, 특정 의도가 아니라 자생적 질서로서 나온 결과인가? 또한, 하이에크 자신의 이론은 구성주의적 합리주의, 즉 치명적 자만으로부터 자유로운가? 하이에크는 질서는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에서처럼 설계되는 것이 아니라 자생적인 것이라고 역설해왔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개혁, 자유주의적 제도 개선을 언급할 때 그는 구성주의적 태도를 취한 것이 아닌가? 이러한 개혁이나 제도 개선은 하이에크 자신의 정치 설계를 바탕으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마디로, 구성주의적인 체계를 공격하는 자신의 체계 자체가 구성주의적으로 설계된 결과물이라는, 자기 모순적이라는 비판이 나오게 된다.
[image]
피노체트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후로 그는 정책적인 제안을 많이 했지만, 그의 제안들은 사람들을 당혹케 만들었다. 피노체트 정권을 옹호한 것이나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당시 이란에 폭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나, 화폐를 국가가 발행하지 않게 하고 민간에 맡기자고 제안한 것이나, 45세가 된 사람들로만 임기 15년으로 의회를 구성하자는 제안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그의 정책 분석가로서의 능력과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제안들이 현실적이기는 한가? 이러한 정치 개입이나 정책 제안은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하지만 하이에크는 이러한 것 또한 타락한 현대 민주주의로부터 자유의 법을 지켜내기 위한 대가로 생각했을 것이다. 자유를 옹호했던 하이에크의 사회 구상은 집산주의적 본능의 대중을 억제할 수 있는 엘리트에게 의존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8. 노년


[image]
노년의 하이에크
그는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학계의 주류로부터 떨어져 있던 인물에게는 의외의 일이었다. 공동 수상자였던 군나르 뮈르달과 균형을 맞추어 보이게 하기 위한 정치적 수상이었다는 반응이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학계에서의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이 생겨나면서 케인즈적 접근법이 불신을 받게 되었다. 사회주의 계산 논쟁이나 자유주의에 대한 옹호 또한 재평가받게 되었다. 그후에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강연하였고, 1978년엔 내한한 바도 있다. 그는 꾸준히 시장경제를 옹호하였다.
다만 말년에는 "큰 시장은 큰 정부를 부른다"라는 말로 입장을 바꿨다고 한다.
하이에크는 정치인이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기 쉽다고 경고했다. 인플레이션 때문에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하락하고, 다시 노동자는 하락한 실질임금을 보전받기 위해서 더 많은 임금을 요구하게 되고, 이는 다시 인플레이션을 심화시켜 결국 인플레이션의 악순환으로 빠져들게 만들 것이라고 분석했다.
대공황 이후 케인즈 경제학이 주류가 되어 큰 정부가 대세가 되었으나 1970년대에 이르자 차차 세계경제는 정부 지출을 확대해도 실업률은 떨어지지 않고 불경기는 계속되면서 인플레이션만 찾아왔다. 불경기에 물가만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하이에크의 주장에 매료된 영국의 대처 수상은 하이에크 처방대로 경제정책을 실시했다. 1979년 정권을 잡은 대처 수상은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통화를 풀고 정부 지출을 늘리라는 케인스식 처방을 거부했다. 높은 실업률은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악으로 받아들이고 감내했다. 한편으로는 정부 소유 사업을 매각하고, 경제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을 줄이고, 창업을 권장하고 개인의 소득세율을 낮추었다. 대처 수상은 하이에크의 주장대로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경제 자유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경제 정책을 펼쳐서 '영국병'을 고치고 영국을 구조 조정하고자 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경제 참모로 하이에크파를 대거 기용했다. 레이건의 경제정책은 레이거노믹스라고도 부르는데 레이건의 연설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경제학자가 바로 하이에크였다.
레이건대처의 시대에 하이에크는 대단한 영예를 누렸다. 마가렛 대처는 하원에서 하이에크야말로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하였다. 공산권이 무너질 때의 영예는 굉장했다. 이러한 굉장한 영예 속에서, 그는 1992년에 눈을 감았다.

(전략) 그리고 그가 죽기 몇 년 전에는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가 무너지는 것도 지켜보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하이에크의 아들 로렌스 박사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말했다.

"아버지. 지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있어요!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있다구요!"

이 때 하이에크가 한 말은 간단했다.

"거 봐, 내가 뭐랬어!"

주용식 外 5人, 『자유주의 사상가 12인의 위대한 생각』, 월간조선사, 2004, p.14, p.15

[1] 다만 이 예언이 완벽히 들어맞았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사회주의는 단순히 인센티브와 사유재산,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사상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 주도의 생산시설 소유와 결과 분배를 중심으로 하는 사상이었고 소련 역시 이를 반영한 사회 보장 제도들이 있었다. 하이에크가 지적한 성과금 제도 역시 존재했었다. 도리어 소련 몰락 이후 탄생한 동구권 국가들에서는 부정 부패와 끝 없는 경제와 사회의 파괴로 인해 국가들의 화폐가 의미 없어졌고, 그로 인해 가격 정보가 달러 이외의 화폐로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으며, 인센티브 역시 역설적으로 소련 시기에 어느 정도 존재했던 인센티브 제도들이 비리와 부정부패로 인해서 사실상 무의미해졌음을 따진다면 하이에크의 지적은 소련의 몰락을 정확히 예언했다기보다는 소련의 몰락 이후 현실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