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참찬
1. 개요
左參贊.
조선시대 의정부에서 삼정승과 좌찬성·우찬성을 보좌하던 정2품 관직이며 보통 좌찬성·우찬성으로 승진하기 전 임명되는 일종의 대기조의 역할도 했다. 요직 중 하나.
2. 상세
우참찬과 함께 이공(貳公)이라고 불리며 육조의 판서를 거친 후 좌찬성이나 우찬성으로 진급하기 전 좌찬성과 우찬성에 임명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일종의 대기역이었으나 대기역으로 치부하긴 이르다. 권한이 강했고 요직이였으며 현재의 국회 사무총장과 국회운영위원회 위원장 정무위원회 위원장 가장 비슷하다.
겸직으로는 내섬시제조가 있었다.
3. 연혁
정종 2년인 1400년 4월 충렬왕 치세 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가 의정부로 개편될 때의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라는 의정부 소속 관직에서 비롯되었다. 이 제도가 세종 19년인 1437년 10월에 의정부서사제 완전 도입으로 거의 모든 관직이 개편될 때 좌참찬으로 바뀌었다.
태종 1년인 1401년 의정부찬성사, 1414년 동판의정부사(同判議政府事), 같은 해 좌참찬·우참찬, 1415년 1월 종1품 찬성으로 각각 계승, 변천되었다. 한편, 1437년에는 육조의 정책이 의정부를 거치는 의정부서사제의 부활로 의정부 기능이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의정부 소속 관직이 조정되어 우참찬 정원을 1명을 늘려 좌참찬·우참찬으로 나누어 설치했다.
이것이 경국대전에 쓰이며 후대로 계승되다가, 고종 31년인 1894년 갑오경장 때 도헌(都憲)으로 개칭되면서 폐지되었다.
4. 권한
조선 전기엔 육조의 정책인 의정부를 거치는 의정부서사제와 육조의 정책이 바로 국왕에게 보고되는 육조직계제의 관계에 따라 그 기능의 권한에 강약이 있었다. 삼정승의 권한이 강했을 때는 같이 강했지만, 약했을 때는 같이 약했다.
조선 극초기나 단종조에는 우찬성·명예직 판중추부사가 정1품의 우의정·명예직 영중추부사에 승진하기 위해는 좌찬성을 거쳐야만 하였다. 그리고 이조·병조판서의 상위에 찬성이나 참찬을 겸직한 판이조사·판병조사가 문선(文選)과 무선(武選)·병정(兵政) 등을 맡아 이조·병조를 지휘하는 실질적인 기능을 발휘한 요직이었다.
조선 중기 이후 비변사 중심 국정운영으로 의정부 기능이 축소되면서, 품계 자체는 육조판서보다 높았으나 권한은 종2품 이상이 겸임하는 비변사의 장 비변사제조(備邊司提調)보다 못하였다. 따라서, 중요한 국정운영 논의에도 참여하지 못했으며, 또 항상 임명되지도 않는 등 유명무실한 한직, 명에직이 되었다.
그러나 고종 2년인 1865년 비변사가 폐지되고 의정부의 기능이 다시 활성화되면서 조선 중기 이전 지위와 권력의 회복으로 의정부 폐지 직전까지 그 권력이 계승되기도 하였다. 물론, 케바케인 것이 비변사가 국정운영의 축이였을 때도 벼슬 수행자의 자질, 출신 가문에 따라 때때로 강한 권력을 발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