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농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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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農學派.
1. 개요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 또는 성호학파라고도 하며, 농업을 중요시한 실학자들을 일컫는 말. 그들이 주장한 대표적인 이론으로는 유형원의 '균전론', 이익의 '한전론', 정약용의 '여전론'과 '정전론' 등이 있는데 모두 따져보면 결국 토지의 분배와 관련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토지의 분배는 결국 국가의 조세 문제와 병역 문제까지 총체적으로 연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이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권세가와 사대부들의 대토지 겸병으로 인해 국가 재정은 휘청거리고 백성들의 조세부담은 심각해진 상황이었다. 따라서 토지분배 정책을 바꾸자는 주장은 결국 '''국가체계 자체를 뒤바꾸자'''라는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조용히 묻혔다.'''
사실 그런데 이론 자체가 그럴듯하긴 했지만 따지고 들어보면 명백한 한계점도 있는 주장들이었다. 이런 이론을 주장한 자들이 대체로 재야학자들이라 실제 실천되기에는 한계가 있기도 했으나 이론 자체도 완벽했다고 보긴 힘들다.
2. 역사
이익은 기호 남인 계통으로 허목의 영남 남인과 함께 붕당을 구성해 오다가, 이익에 의해서 하나의 분파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성호학파(중농학파)다. 이후 성호학파는 노론계열 실학자들이 망라된 중상학파[1] 와 함께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양대 계보를 이루게 된다.
다만 성호학파의 경우는 성호 이익이 살아있는 동안에 벌써 분파가 이뤄진다. 이렇게 성호학파가 분열된 것은 이익이란 인물 자체가 복잡다단한 분야에 관심을 두었으면서도, 어떻게 보면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 크다. 때문에 성호학파는 이익이 연구하던 분야의 일부를 자신의 전공으로 삼아서 심화, 발전시키는 것으로 실학의 계보를 이어갔는데 예를 들어 성호학파 중 한 사람이었던 안정복이 저술한 역사서인 동사강목에서 이익의 성호사설 중 사론이 나온다든가 하는 것으로, 이걸 후대에 수용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벌어졌던 것이다.
단적인 부분이 서학이라고 불렸던 천주교에 대한 수용태도였다. 이익은 조선에서 상당히 이른 시기에 본격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연구를 한 성리학자 중 한 명[2] 인데, 천주교에 대해서 학문으로서는 개방적으로 수용하는 반면에 종교로서는 성리학적 입장에서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이익 후대의 학맥에서도 천주교에 대한 생각이 비판적인 입장과 신봉하는 입장으로 갈렸다.
그중에서 천주교를 학문으로만 받아들이거나 혹은 반대한 파벌을 성호우파, 혹은 공서파(攻西派), 여기에는 안정복[3] , 신후담[4] , 이용휴[5] 등이 포함된다.
반대로 천주교를 신앙으로 신봉한 파벌은 성호좌파, 혹은 신서파(信西派)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채제공,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이가환, 정약종[6] 등이 포함된다. 영정조시대 남인의 주류였다가 천주교 박해에 의해서 죽어나가는 이들은 대부분 이쪽이었다.
또한 공서파와 신서파 어디에도 포함시키기 어려운 이들도 있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그 형제의 성향이나 본인들이 한때 천주교에 심취했던 모습을 봐도 신서파의 모습이 보이지만, 박해에서 살아남은 것이나 이후 천주교와 거리를 둔 활동 등을 볼 때 학자들에 따라서는 공서파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단순한 전향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택리지의 저자인 이중환은 공서파와 신서파 모두와 거리를 두고 일상생활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어느 쪽에도 포함시키기 어렵다.
2.1. 균전론
반계 유형원이 주장한 이론. 유형원은 그의 저서 반계수록에서 균전론을 주장했다. 유형원이 보기에 가장 이상적인 토지제도는 정전법으로 정전법에 근거한 토지제도 개혁을 주장했다고 볼수있다. 즉, 국가가 토지를 다 모아(국유화시켜서)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준다는 이론이다. 구체적으로 농민 1호당 1경(40두락)의 토지를 나누어주고 각자가 1경의 토지에서 나온 소산중 10분의 1 을 조세로 내며 4경마다, 즉 4호당 한 명씩 병사를 낸다는 것. 토지를 지급받은 자가 죽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경우에는 관청에 신고하여 재조정하도록 했다. 유형원은 이를 통해서 조세문제는 물론 병역문제까지 한방에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다만 계급에 따라 토지가 차등지급된다는 점은 한계로 볼 수 있다. 유형원은 유생에게는 2경에서 4경까지의 토지를 분배하고 현직 관리에게는 품계에 따라서 6경에서 12경까지의 토지를 분배해야 한다고 보았다. 게다가 농업을 하지 않는 상공업자에겐 일반 농민보다 적은 0.5경을 나누어주고 무당,승려,여자에겐 땅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들어보면 그럴듯하지만 당시에는... '''씹혔다.''' 물론 유형원이 재야학자라서 실제 정책화하기에는 한계가 있기도 했으나 이론을 가만 들여다보면 한계가 분명하다. 유형원의 주장대로 가려면 국가가 토지에 대한 장악력이 확고해야만 한다. 즉 관리나 유생이 힘없는 농민의 토지를 빼앗는 데 대해서 국가가 이를 제지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조선이 중앙집권이 확고했다 하더라도 전국의 토지 상황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하고 그 상황을 조정한다는 건 쉽지가 않은 일이었다. 한양에서 먼 지역에서 유생이나 관리가 농민의 토지를 빼앗고 그 상황을 조작해도 알 도리가 있었겠는가? 설령 유형원의 주장이 실제 정책으로 관철되었다 하더라도 세월이 흐르면 보나마나 유생,관리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아서 겸병할 개연성이 컸을 것이다. 나름 유교의 이상에 입각한 이론이었으나 어찌보면 현실을 제대로 보지못한 백면서생의 주장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2.2. 한전론
성호 이익의 주장으로 사실 성호 이익이 독자적으로 만든 이론은 아니고 정석유, 임박유, 서명신 등도 주장한 이론이기도 하다.
유형원이 국가가 일괄적으로 토지를 전부 몰수해서 나누어준다는 것과는 달리 이익 등은 모든 토지를 일괄몰수하기보다는 농민들에게 먹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토지(영업전)를 분배하고 영업전은 매매를 금지하며 영업전 이외의 토지는 매매를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현대적으로 이야기하면 기초생활보장과 비슷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듯.
어느 정도는 현실을 반영한 이론이기는 한데 사실 이전에도 실행한 적이 있다. 1518년(중종 13)에 부분적으로 실시하기도 했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조선 후기 때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역시 '''씹혔다.''' 정약용은 한전론에 대해서 대토지 겸병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없고 경자유전, 즉 땅은 농사짓는 사람이 가져야 한다는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2.3. 여전론
정약용의 주장. 정약용은 기본적으로 토지분배에 있어서 경자유전의 원칙이 확고해야 한다고 보았다. 경자유전이란 '''땅은 농사짓는 사람이 가져야 한다'''라는 것. 그래서 정약용은 이 원칙에 근거해서 토지를 분배해야 한다고 보았다.
구체적으로는 자연적 지리상황과 환경 등을 고려하여 30호 정도를 한 개의 여(閭)로 묶는다. 여 안의 토지는 여민들이 공동으로 소유한다. 여민들은 여장의 지휘를 받아서 농사일을 함께 하고 여장은 여민들이 일한 양을 장부에 기입해 둔다. 수확철에 모든 수확물들을 한 데 모은 뒤에 장부에 기입된 대로,즉 일한 양에 따라서 수확물을 분배받으며 이때 수확물의 10분의 1은 국가에 바치고 여장의 봉급을 제한 뒤에 분배를 시작한다. 한마디로 공동생산, 노동력에 따른분배를 중심으로 한 이론이다. 농경지에서 나온 곡물을 수확철에 모아서 세금을 낸 뒤 여장의 장부에 따라 일을 많이 한 사람이 많이 가져가는 시스템으로 공유지에서 사람들에게 일을 더 열심히 하게 만들어 이론적으로 생산량을 늘릴 수 있게 구상하였다.
이런 체제에서는 모든 사람들은 농업에 종사하거나 최소한 일을 해야만 먹고살 수 있게 된다. 자연히 양반입네 하면서 띵까띵까하던 사람들도 농사일을 하게 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정약용은 양반들이 지적 능력을 발휘하여 농업생산력 향상에 기여할 것이라 전망했다. 또한 상공업자들은 농사일을 하지 않더라도 생산품을 곡식과 교환해서 살아갈 수 있으리라 보았다. 또한 정약용은 농민들이 자유롭게 여를 옮겨다닐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되면 10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전국의 토지이용과 인구분포가 고르게 정착 될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손부익빈(부자의 것을 덜어서 가난을 돕자)이 먼저 실행 되어야 국가의 땅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개혁안이었기에 실현조차 될 수 없었다.
2.4. 정전론
여전론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받은 뒤 정약용이 이를 수용하여 새롭게 정립한 토지분배 이론. 경세유표에서 이를 주장했다.
기본적으로 정전론 자체는 저 멀리 주나라 시대의 주공때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토지를 우물 정(井)의 형태로 9등분하여 8호에게 각각 한 구역씩을 주어 경작하게 하고, 맨 가운데 구역은 8호가 공동으로 경작해서 각자에게 주어진 구역의 수확물은 자신들이 갖고 맨 가운데 구역에서 난 수확은 국가에 조세로 바친다는 이론이다. 중국에서도 진, 한 시대를 거쳐 위진남북조 시대에 대토지 겸병이 극에 달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주장되어 당송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주장되었다. 명나라 때에 이르러서야 서구와의 무역으로 풍부한 은이 유입되면서 토지세와 호구세를 결합해 화폐로 내는 일조편법이 만들어지고, 청나라 때에 이를 완전히 은으로만 내도록 규정한 지정은제가 확립되면서야 중국도 조세 문제에서 겨우 해방되었을 정도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자가 존경한 주공의 이론이란 점에서 유교적 이상에 부합한 이론으로 여러 학자들이 주장했다. 정약용도 초기의 여전론에서 벗어나서 정전론을 주장했는데 정약용의 정전론이 이전의 정전론과 다른 부분은 정약용의 확고한 원칙인 경자유전 원칙에 근거했다는 점에 있다.
즉, 정약용은 정전론의 원칙대로 국가가 원칙적으로 모든 토지를 소유하고 토지는 9등분하되 토지를 받는 이는 철저하게 경작능력을 따라서 토지를 받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다시말해서 실제 농사를 지을 능력이 있는 사람만 토지를 분배받아야 한다는 것. 특히 군역문제 해결도 고려해 병사가 될 수 있는 힘센 자가 있는 농가에 토지분배의 우선권을 준다. 이를 사전(私田)이라 하며, 사전을 분배받은 농민들이 공동으로 맨 가운데 구역의 토지, 즉 공전(公田)을 경작해 공전에서 나온 소출을 조세로 국가에 바치게 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또한 국가가 전체 토지를 몰수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기는 탓에 비판을 받자 정약용은 현실을 반영해서 현 체제의 토지소유 상태는 인정하되, 국가가 전국의 토지를 행정상으로 9등분한 뒤에 그중에서 9분의 1을 국가가 매입해 공전으로 삼고 그 토지에서 나는 소출을 조세로 거두면 될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역시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집단농장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대체 누가 자기 것도 아닌 세금 낼 토지에서 열심히 농사일을 하겠느냐는 점이다. 또한 전국적으로 토지의 비옥도가 일정하지 않고 인구수도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1]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등이 주축으로 북학파, 이용후생학파라고도 부른다.[2] 단적으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가 조선에 전해질 때, 그 책의 발문을 이익이 썼다.[3] 동사강목만 유명하지만 사실 대표적인 천주교 공격서적인 천학문답을 썼다. 사실 안정복은 해당 문서에도 있지만, 이익의 제자라서 실학자로 분류되는 것이지, 정통 성리학자에 가깝다.[4] 정도전이 쓴 불씨잡변의 형식을 빌어서 천주교를 공격한 대표적인 인물.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등을 읽어보고 '''천주교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전방위적 공격을 했다. 후대에 위정척사파들이 서양 문물을 비판하는 데 기원이 되는 이론이 여기서 완성된다. 다만 마냥 비판하기는 그런 게, 천주교가 기술 등을 전수하는 게 결국은 종교를 포교할 목적일 뿐이고, 마테오 리치가 유교를 수용하는 보유론을 편 것 역시 그 때문이라고 본 것은 정확한 판단이었다.[5] 이용휴는 이익의 조카이자, 이가환의 아버지이다. 부자지간이 공서와 신서로 나뉜 것.[6] 정약용의 형.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아들 정철상과 함께 시복되었다. 아내 유소사, 아들 정하상, 딸 정정혜는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한 때 시성되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한국 103위 순교성인 문서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