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원
1. 개요
광해군 14년(1622) 3월 2일 - 현종 14년(1673) 5월 5일
호는 '반계(磻溪)'인데 유형원의 저작 《반계수록》(磻溪隨錄)에도 제목으로 쓰였다.
부친 유흠의 비참한 죽음[1] 과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파탄난 나라를 보며 학문과 현실에 관심을 두었다. 여러 번 과거 시험을 보기도 했고 진사까지는 따냈지만 막상 관직에는 뜻이 없어서 평생 학문 연구에 힘을 썼다.
당색으로는 북인에 가까웠다고는 하지만 당대 기준으로는 거물급 인사와 연줄이 있었다. 유형원의 스승이자 외삼촌, 고모부인 이원진과 김세렴은 벼슬길에 올라 각각 호조판서와 병조참의까지 지냈고[2] 유형원의 스승 허목도 벼슬길에 오른 이후로는 우의정에 오를 정도로 거물급 인사가 되었다. 윤휴와도 친분을 쌓기까지도 했으니 초야에 파묻혀 살기는 했어도 듣보잡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형원의 스승과 지인들은 유형원이 재능이 있음에도 관직에 오르지 않음을 안타까워해서 효종 때부터 현종 때까지 지속적으로 천거했지만 그는 계속 사양했다. 본인이 마음만 먹었다면 벼슬에 오를 수도 있었지만 스스로 거부하고 재야에 파묻혀 살았던 것이다.
자신을 키워준 조부가 사망한 뒤 32살 되던 효종 4년(1653) 조상의 땅인 전라도 부안현 우반동에 집을 짓고 칩거하며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몰두했다. 효종 7년(1656)에는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라는 지리서를 집필했다. 유형원은 가끔씩 한양이나 영남 지방 유랑도 하며 전국의 토지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효종 3년(1652)부터 현종 11년(1670)까지 무려 19년에 걸쳐 《반계수록》을 완성하고 3년이 지나 현종 14년(1673)에 향년 쉰두 살로 사망했다. 《반계수록》은 유형원이 일생 동안 재야의 사림으로 학문에 전념하면서 내놓은 필생의 역작이었으나, 유형원이 벼슬길에 오르기를 마다했기 때문에 유형원의 절친한 동료들이 《반계수록》의 내용에 관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 내용이 실현되는 일은 없었다.
2. 평가
유형원이 죽기 2년 전인 현종 11년(1670) 경신대기근이 일어났다. 한 마디로 효종-현종 대 예송논쟁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
유형원은 사후 100년 가까이 지나 영조 때 세상에 알려져 극찬을 받았고 이익, 안정복, 정약용이 읽으며 조선 후기 실학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조선 실학의 비조로 평가되지만 정약용 같은 실학자들이 활동하던 때보다 100년쯤 앞선 사람이다. 생전에는 칩거하여 책만 썼고 책이 100년 후에 빛을 보며 실학자들을 양성했다.
근래 학계에서는 실학의 실체를 두고 많이들 회의하지만, 유형원의 삶은 말 그대로 교과서적인 실학의 언급과 빼닮아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실학의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면도 많지만 '뛰어난 개혁적 저술 → 그러나 생전에는 무시당함 → 영조·정조 시기 발굴되어 전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러하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유형원을 검색하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때가 정조 때인데 유형원의 생몰년(1622-1673년)과는 100년이 넘는 간극이 있다.
반계수록에 포함된 개혁 방안은 19세기에도 이어져 흥선대원군을 포함한 경세가들의 정책에 많이 반영되었고 현재의 헌법에도 명시된 경자유전(농사하지 않는 이의 농토 소유 금지) 법칙의 근거가 되는 사상을 남겼다.
보통 국사 교재 등에서 유형원을 남인 계열 중농학파라 부르지만, 사실 유형원의 생전에는 관직도 전혀 하지 않았고 정계 거물들과 연줄이 있기는 했지만 그의 주장이 실현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유형원을 남인이니 중농학파니 규정할 만한 것도 없다. 같은 남인 계열 중농학파라 불리는 이익, 정약용은 모두 유형원이 죽고 난 뒤 훨씬 이후에 태어난 인물들이니 서로 직접 교류한 것은 없지만, 유형원의 학풍을 이은 후대의 학자들이 남인 계열이라 유형원도 남인으로 취급받는다. 이는 어디까지나 현재의 학자들이 그렇게 분류하는 것이고, 당시 유형원은 남인의 일파가 아니라 그저 100년 전 명저를 남긴 재야 선비로 인식되었다.
3. 개혁안
3.1. 균전론
유형원이 주장한 대표적인 개혁안으론 균전론이 있다. 균전론이란 농민들에게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나누어 주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제도들을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대하는 이들은 극형에 처해서라도 빼앗아서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조선 후기 부농과 세도가들이 토지를 과도하게 소유하면서 농촌의 경제가 한 개인에게 쏠리는 것을 경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형원은 이렇게 토지를 분배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다시금 병농일치의 원칙을 확고히 세우자 하고, 허목의 영향을 받아 결포론을 주장했는데 보유한 토지의 결수에 따라 군포를 납부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균전론은 여전히 성리학적 질서를 벗어나지 못했다. 토지분배는 철저히 신분제에 따를 것을 주장하였으며, 관리와 선비에게 농민보다 많은 토지를 분배하는 등 한계도 명확했다.
유형원의 균전론은 그 단점을 개량한 성호 이익의 한전론, 정약용의 정전론, 여전론으로 이어졌다.
이외에도 양반 문벌, 과거제의 폐단, 노비제도를 강도 높게 비판하였고[3] 북벌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3.2. 공거제
유형원은 한성과 한성 이외 지방의 교육 과정을 같게 하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선발하는 개혁안을 생각했다. 또한 위의 토지제도와 맞물려 나라 전체의 교육을 활성화시키는 것을 꿈꿨다.
뿐만 아니라 왕실을 위해 설치한 많은 관청들을 대폭 축소하여 재정을 안정시킬 것을 주장했다. 비변사와 좌우의정을 없애고 임기제를 엄수하여 행정의 효율성을 높일 것 또한 주장했다.
3.3. 행정구역 개편안
한성부 행정구역 추가 확장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가 제안한 한성부 추가 편입 지역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대부분 영역에 맞먹는다. 지금의 영등포구, 동작구 북부, 서초구 북부, 강남구 압구정, 송파구 잠실,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광진구, 구리시, 의정부시, 고양시 덕양구 일대 등이었다.[4][5] 또한 수원에 성을 축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는 정조가 수원화성을 세움으로써 구체화되었다.
4. 기타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에도 언급된다. 수만 리 길에서도 군량을 수송해 올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물로 평가했다.
[1] 유형원의 부친은 북인으로 유형원이 태어난 이듬해(1623) 인조반정에서 누명을 쓰고 죽었다.[2] 조선시대 기준으로 당상관에 해당되는 직책으로 고위급 벼슬이었다. 요새로 치면 장차관급.[3] 다만 반계수록 문서에 나와있지만, 조선의 노비제도를 보는 그의 시선은 지나치게 편파적이다. 엄연히 조선과 같은 시기 중국 청나라에 있었던 가생자 같은 세습노비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다.[4] 논문 출처: 楊普景. (1994). 서울의 공간확대와 시민의 삶. 서울학연구, (1), 48-77. 다운로드(무료)[5] 양천구 등지는 양천현의 일부여서 고려되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숙종대만 해도 멀리 안 가고 성동구의 왕십리나 마장동만 해도 왕실 전용 목장이나 채마밭이었다. 시대를 300년은 앞서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