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갑옷
1. 개요
Middle East Armour. 말 그대로 중동 지방에서 사용한 갑옷.
2. 중동갑옷의 역사
중동지방은 고대에 비옥한 평야가 존재하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이 발생된 곳이었다. 따라서 조직화된 군대가 처음으로 등장했으며, 전차,기병과 같은 병과도 최초로 등장하였다. 수메르 문명의 도시인 우르(Ur)의 벽화인 우르의 스탠다드(Standard of Ur)에는 가장 오래된 전차와 망토와 투구를 걸친 것으로 추측되는 보병대가 등장하는데, 망토에 묘사된 점들은 방어용 청동판, 혹은 두정갑처럼 내부 방어재를 고정한 리벳을 묘사한 것이라는 의견이 분분하며, 중동 역사에서 확인 가능한 최초의 갑옷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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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의 스탠다드.
바빌론을 거쳐 앗시리아에 이르러서는 뾰족한 양식의 청동투구와 청동 찰갑이 확인된다. 앗시리아의 부조에서는 가슴을 가리는 원형의 판이 묘사되어 있어 호심경이 이때에도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서는 그리스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리스식의 아마포 흉갑을 사용하였으며, 기병 중 일부는 팔과 다리를 가리는 스케일 아머 방식의 방어구를 착용하였다.
3. 이슬람의 발흥
이슬람 세력이 발흥할 당시인 7세기경 이슬람 세력과 아랍부족들의 무기와 갑옷은 독자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북방의 동로마 제국이나 사산조 페르시아의 장비의 영향을 짙게 받고 있었다. 이때 당시 아랍부족과 이슬람세력의 전투와 무장을 묘사한 문헌들에서는 예외 없이 모두 체인메일을 입었다고 묘사하고 있으며, 또 갑옷 무장비율이 매우 적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슬람 세력의 급속한 팽창에 의해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당하고 소아시아 지방, 트란스옥시아나 지역까지 진출하게 되면서 이슬람세력은 토착 장비와 무기를 받아들이게 된다. 또 투르크인들이 용병이나 전투노예로써 이슬람 지배자들에게 활발히 고용됨에 따라 이들의 군사 문화가 크게 도입되게 된다.
4. 몽골의 침략
튀르크계 이란 왕국인 호라즘 왕조의 침공과 함께 개시된 몽골의 침공은 중동세계를 뒤흔들어놓은 대대적인 사건이었으며, 이란과 아랍, 투르크의 다양한 왕국들이 참담한 패전을 면치 못하는 사태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이때 몽골인들은 트란스옥시아나를 비롯해 이란, 소아시아 지방까지 점령했으며, 놀라운 군사적 승리로 인해 중동 각국에서 즉시 몽골의 병법을 카피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 때를 그린 그림에서 몽골군으로 묘사되는 군대는 몽골식의 전형적인 러멜러 아머와 몽고발형 투구뿐만 아니라 이란식의 터번헬름이나 소아시아의 시샤크(Shishak) 투구, 러시아와 이란 북부, 트란스옥시아나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된 커간(Kurgan) 투구에 이르기까지 중동의 다양한 장비들을 망라한 것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데, 실제 몽골 본대는 매우 적었으며, 몽골군으로 불린 대다수의 군대는 점령지에서 징발된 구 현지 육군들이라는 점과 일맥 상통한다.
이집트의 맘루크들도 몽골식의 러멜러 아머를 입고 몽골을 모방한 병법을 채용했는데 이는 몽골에게 멸망한 호라즘의 군인이나 귀족들이 노예로 중동에 팔려왔고 이들이 다시 전투노예 맘루크로써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에 배속되어 있어 튀르크인의 정서와 함께 몽골과 직접적으로 교전한 경험에 의해 몽골식의 장비를 앞다투어 채용했던 것에서 기인한다.
이때에 비로소 몽골식의 갑옷과 무장이 중동갑옷의 대세를 이루게 되며, 특히 완전 점령되어 일 칸국이 세워졌던 이란과 주변 지역은 15세기에 이르기까지 몽골식의 러멜러 아머 슈트를 사용하는 경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에도 페르시아어로 유연한 갑옷은 죠우샨.
5. 15~17세기
다양한 갑옷들이 각축을 벌이던 14세기까지의 경향은 점차 사라지고 이슬람이라는 문화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점진적으로 이슬람세계의 통일된 갑옷 양식이 등장하게 된다.
그전까지 이슬람세계의 갑옷 양식은 튀르크-몽골계에서 유래된 형태와, 동로마에게 영향을 받은 양식이 공존하던 찰갑, 튀르크-몽골과 몽골-이란에서 유래된 두정갑, 이슬람 등장 이전부터 활발히 사용되었던 체인메일, 스케일 아머를 비롯한 다양한 갑옷들이 뒤섞여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15세기부터 점진적으로 경번갑형식의 갑옷이 기존의 갑옷들을 대체하며 이슬람세계의 주력을 차지하게 된다.
경번갑은 튀르크어로 코라진(Korazin), 페르시아어로 여전히 죠우샨(Jawshan)이라고 불렀으며 단순히 갑옷이라는 의미의 베흐테르(Behter)라고 부르기도 했다.
6. 18~19세기
이미 17세기부터 대다수의 중동국가들이 갑옷을 포기하고 19세기에는 서구식의 군사개혁을 앞다투어 시작하고 있었지만 이란의 카자르 왕조는 장식적인 용도로 여전히 쿨라 쿠드(Khula Khud)투구를 착용하였다. 당시 갑옷을 착용하는 경우는 드물게 있었지만 장식적인 용도였지 실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갑옷을 착용하지는 않았다.
인도가 가장 독특했는데 갑옷을 19세기 초까지 실전용으로 유지한 특이한 케이스였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영국은 인도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했고 당시의 인도는 남부의 마라타 동맹과 북부 무굴 제국의 내전이 가장 중요했으며, 지방 소국가 군주들간의 분쟁도 자주 벌어졌었다. 특이한 점은 이 18세기의 인도는 대포와 화승총[1] 을 사용하는 근대적 경향을 보이면서도 투창[2] , 도검[3] , 방패, 활, 철퇴, 코끼리 같은 전근대적인 무기들이 함께 활용되는 기이한 경향을 보였다.
18세기 당시에는 구식에 해당하는 경번갑인 지르후 바그타르(Zirah Bakhtar)와 함께 신형에 해당하는 챨타 하자르마샤(Chihal'ta hazar masha)가 등장하여 사용되었다. 챨타 하자르마샤는 '천개의 손톱 외투'라는 의미로써 경화시킨 가죽을 벨벳 외투 아래에 고정하고, 안감을 결합하여 복잡한 바느질로 마무리했던 가죽 두정갑에 해당하는 물건이었다. 여기에 이란식의 차하르 아이네나 Krug 흉갑의 양식을 본따 허벅지나 가슴 부분에 철판을 갖다대어 방어력을 높이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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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판이 붙은 것과 붙지 않은 것을 모두 챨타 하자르마샤로 불렀으며, 화승총에 대응하여 등장한 신형 갑옷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것은 물론 숫자가 많은 편이 아니었으며, 완전한 구식인 사슬갑옷(Zirih)과 솜누비 갑옷(kubcha)도 많이 사용되었다.
중세 식의 튼튼한 투구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으며, 이란식의 쿨라 쿠드(Khula Khud), 쇠사슬로만 이루어진 인도 독자적인 경량 투구인 쿨라 지라흐(Khula Zirah), 그리고 솜누비 패딩 모자나 챨타 하자르마샤와 동일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투구 등이 사용되는 경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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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라 지라흐의 모습.
1818년 영국이 인도 전토를 수중에 넣으면서 이러한 전근대적 장비의 사용은 종말을 맞게 된다.
[1] 인도에서도 당연히 부싯돌식 머스킷이 들어왔으며, 유럽에서는 사장된 스냅펀스 락 방식으로 제조되었고, 유럽의 플린트락 유닛을 수입하거나 노획해서 적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도의 심각한 습기 속에서 부싯돌이 제대로 발화가 되지 않는 사태가 벌어져 인도에서는 속도는 느려도 발화 신뢰성이 좋다고 여겨진 매치락, 즉 화승식을 계속해서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아프가니스탄과 같이 기후가 다른 지역은 부싯돌식을 선호했다.[2] 투창의 전쟁 운용은 유럽에서는 14세기쯤 되어서는 거의 찾기 힘든 것이었다.[3] 당시 유럽에서 보병의 도검은 장교나 부사관의 지휘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