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타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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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기 및 어원
영어나 한국어로 쓰면 드러나지 않지만, 힌디어, 칸나다어로는 공히 "마라타"에서 뒤의 두 음절 모음이 장음이다. 마라티어나 벵골어는 장모음 a가 단모음화되었으므로 셋 모두 단모음이다.
"마라타"란 본래 인도 마하라슈트라 서해안 지역에 모여 살던 마라티어를 말하는 수십 개 카스트(자티) 집단의 모임이었다. 마라타의 대부분은 농민, 상공업자 계급이었으며, 지주들을 중심으로 연대하는 전사 집단이기도 했다. 인도 제국의 민족지를 연구한 영국 공무원 로버트 베인 러셀(Robert Vane Russell, 1873 ~ 1915)에 따르면 마라타 내부에는 96개의 서로 구별되는 무리가 존재한다고 하였다.[3]
2. 개요
1674년 마하라슈트라 서해안 지방의 토후였던 시바지 본슬레(슈와지 보살레)가 다른 마라타 토후들의 추대를 받아 차트라파티(양산을 쓴 지배자; 후에는 황제라는 의미로 변형됨)로 등극하면서 건국된 국가이다. 1707년 아우랑제브 사후 페슈와(대재상) 바지라오 발랄 바트[4] 지휘 하에 무굴 제국 영토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18세기 중반에는 인도 중북부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전성기 때 영토는 오늘날의 파키스탄 북부 페샤와르에서 서쪽으로는 웨스트 벵갈, 남쪽으로는 타밀나두 지방에 이르렀다.[5] 그러나 1761년 아프간계 두라니 왕조와의 파니파트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펀자브 지역에서 기원한 시크 왕국이 부흥하면서 북부 영토를 대부분 상실하고, 벵골과 인도 동해안으로 침투해 온 영국군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영국과의 1차 전쟁에서는 마라타 측이 승리를 거두며 동인도회사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었으나, 19세기 초반에 벌인 2차전에서는 국력을 크게 소모하고 3차 전쟁에서는 완전히 영국에 패배하여, 결국 대영제국 산하 동인도 회사의 지배를 받는 여럿 토후국들로 나뉘어 멸망한다.
마라타 동맹은 인도 역사에서 두 가지 주요한 의의를 가지는데, 첫 번째로 힌두교의 부흥과 무슬림 지배 계급의 몰락의 분수령이 되었고, 두 번째는 인도 역사의 중심지가 내륙에서 해안 지방으로 옮겨갔다는 점이다. 중앙아시아 육로 무역이 쇠퇴하고 해상 무역이 증가하는 추세에 따라 마라타 동맹의 중심 지역들은 상당수가 해양 도시였다.
3. 역사
3.1. 배경
마하라슈트라 지역은 지형적인 특성상 강과 언덕으로 둘러싸여 외부의 침입이 쉽지 않은 곳이었다. 고대에 인도를 침공한 인도아리아인들은 데칸 고원의 북부까지만 정복하였고 이렇게 데칸 고원 북부에 정착한 인도아리아인들이 오늘날 마라티인들의 기원이 되었다. 이들은 인도아리아인이기는 했으나 남부의 드라비다인들과 교류도 많고 문화적으로 밀접한 관계였다. 데칸 고원은 일부 해안 지역 외에는 토양이 척박한 적토 지대인데다가 강우량마저 부족하여 농사도 영 시원치 않은 곳이었다. 이런곳에서 살던 마라티인들은 강인한 성격을 가졌다.
이 지역들은 사타바하나 왕조 때부터 야다바 왕조 때까지 힌두교 문화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부족들 사이에서 힌두이즘의 전통이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남인도와 북인도의 서로 상이하면서도 다양한 힌두교 & 자이나교 전통과 관습이 만나며 힌두교 철학이 발전하였다. 그러한 종교적 풍토 덕분에 에카나트, 투카람, 람다스, 바만 판디트 등과 같은 종교 개혁가들이 연이어 나타나 신에 대한 헌신과 신 앞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관념 등을 주장함으로써 계급 차별을 철폐하고 의무적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시바지의 스승 람다스는 사회개혁 사상을 일깨웠으며 투카람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 부족의 언어인 마라티어와 16~17세기에 나타난 종교적 문학작품도 부족간의 일체감을 일깨우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3.2. 탄생, 힌두교도의 저항운동
17세기 중반 무굴 제국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의 황제 아우랑제브가 즉위함에 따라 인도를 엄격한 샤리아 지배체제 아래에 두고 비무슬림들을 법으로 혹독하게 다스리게 된다. 늘어나는 원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사문화되었던 지즈야가 신설되었고, 무굴 제국의 남부를 공격하기 위해 행군하는 군인들이 마라타 농민들의 밭을 그냥 밟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아 마라티인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그래서 힌두교도들이 다수인 마라티인은 불만이 폭발해 무굴 제국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이때 무굴 제국은 힌두 라지푸트족들과도 분쟁이 있었는데 마라타의 반기로 남북 양면의 협공을 받게 된다. 일단 아우랑제브의 치세 전반기는 주로 북쪽 지역에 관심을 두었기에, 남쪽 데칸 지역의 업무는 총독을 두어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 마하라슈트라 지역의 마라타인들이 시바지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게 되고 데칸의 정치적 상황이 복잡하게 된다.
황제 아우랑제브는 처음에 그들 세력에 대해서 만만하고 유약한 남인도인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했으나, 마라타 동맹군은 무굴 제국 군대에 비해 중요한 이점이 있었다. 무굴 제국 군대는 초창기에는 유목민 기원의 영향으로 기동력이 중시되었으나, 인도에 정착한 역사가 오래되고 현지인 토후들이 군대를 제공하면서 군대의 기동력이 크게 저하되어 있었다. 반면 마라타 동맹 측은 슈와지 보살레 시절 기병과 보병의 비율이 4:5에 이를 정도로 기동성을 중시했으며, 경기병들이 행군에 필요한 식량을 약탈하는 전략을 통해 기동력을 크게 향상시켜 전략적인 우위를 점했다. 마라타 세력은 무굴 제국 군대를 각지에서 격파했으며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시바지는 1663년 푸나 지역 근처를 점령했고 1664년 무굴 제국의 중요한 항구도시 수라트를 약탈한다. 또 그는 아우랑제브를 직접 만나 평화협상을 해보려 하기도 했으나 워낙 강경했던 아우랑제브여서 실패하고 만다. 결국 1674년 시바지는 마라타 토후들의 추대를 받아 힌두교도 세력들을 모아 무굴 제국으로부터 독립 선언을 하게 된다. 당연히 무굴이 가만둘리 없어 무굴과 마라타는 전쟁에 들어간다.
마라타는 1680년 시바지가 사망한 후 계승자 샴부를 중심으로 무굴 제국에 대한 저항을 이어나간다. 아우랑제브는 마라타의 독립을 저지하려고 1680년부터 1707년까지 27년간이나 마라타인들과 전쟁을 벌였으나, 1706년 무렵에 말와 전투에서 대패하고 전황이 무굴에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무굴 군대가 데칸 고원에서 후퇴하게 된다. 이때 마라타 기병대는 후퇴하는 무굴군을 추격하여 기습 공격해 많은 무굴군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으며, 아우랑제브는 마라타의 독립을 막지못한것에 대해 실의에 빠져 괴로워하다가 결국 아흐마드나가르에서 사망하고 만다. 아우랑제브의 사망 직후 잠시 무굴과 마라타의 전쟁은 일단락된다.
3.3. 확장기, 무굴 제압과 두라니와의 전쟁
아우랑제브 사망 후에도 마라타와 무굴의 대립은 계속 이어진다. 힘의 균형을 마라타 쪽으로 돌려놓은 것은 18세기 전반기 마라타의 세습직 대재상(페슈와)이었던 바지라오(바지라오 1세)를 비롯한 걸출한 장군과 관료 들이었다. 20세의 젊은 나이에 페슈와의 자리에 오른(1720) 바지라오는 그로부터 20년 동안 마라타의 군대를 이끌고 전역을 계획하면서 마라타의 영토와 영향권을 크게 넓히게 된다. 바지라오가 노련한 니잠 울물크, 아사프 자흐 1세를 팔케드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제압한 것을 시작으로, 말와 남부, 분델칸드, 구자라트 등지에서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하였을 무렵이 되면 마라타는 어엿한 중북부 인도의 제국이 되어 있었다. 강성해진 마라타에 비해 여러 내외 사정으로 약체화된 무굴 제국은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마라타에 맞섰으나, 1737년의 보팔 전투와 델리 전투에서 바지라오의 군대에 연패하고, 수도 델리 근교가 마라타에 약탈당하고 군사적 능력을 상실한 채[6] 마라타에 전쟁 배상금과 영토를 뜯기는 신세로 전락한다.
노쇠한 무굴 제국은 1739년에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가 이끄는 아프샤르 왕조의 침략군에 의해 카르날 전투에서 대패하고, 수도 델리가 점령되고 철저하게 약탈당하는 결정타를 얻어맞는다. 반대로 마라타는 본슬레 가문의 라구지 본슬레의 지휘 하에 남부와 동부로 세력 확장을 계속하는데, 라구지 본슬레는 1741년의 티루치라팔리 전투에서 일단 카르나타카 나와브를 제압한 다음, 1741 ~ 1751년간 벵골 나와브의 영토를 6차례에 걸쳐 침공하여 오디샤를 점령, 합병하고 벵골을 봉신국으로 만든다.
이제 마라타 제국과 무굴 제국의 권력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어, 1752년에는 마라타 동맹이 아프샤르 왕조의 후신인 두라니 왕조에 위협받는 무굴과 무굴의 수도 델리를 보호해준다는 조약을 맺기에 이른다.[7] 그런데 1757년 초 두라니의 아흐마드 샤 두라니[8] 가 북인도를 침공하고 델리를 점령한 후, 델리 침공 과정에서 무굴을 배신하고 두라니에 붙은 로힐라족[9] 장군 나집 웃다울라를 델리의 통치자로 남겨두고 물러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마라타는 마침 1757년 초부터 전투를 벌이는 등 두라니와 적대 관계에 있었고, 이에 대응하여 동년 나집 웃다울라를 공격해 물리치고 마침내 델리 및 근교를 점령하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1750년대 후반 마라타가 두라니 지배하의 인도 북서부 펀자브와 카슈미르를 공격해 점령한다. 바야흐로 마라타가 인도 아대륙의 절반 가량을 지배하기에 이른 것으로, 사타바하나 왕조 및 라슈트라쿠타 왕조에 필적하는 데칸 기반 왕조의 팽창이었던 것이다.
마라타는 페슈와의 사촌 사다시브라오 바우[10] 의 주도로 1750년대 후반 무굴 대재상이자 실권자인 하이데라바드계의 이마드 울물크[11] 와 제휴하면서 혼란스러운 무굴 중앙정계도 좌지우지했다. 이마드 울물크가 내부 알력으로 황제 알람기르 2세를 암살한 후, 마라타와 이마드 울물크는 합세하여 샤 자한 3세를 꼭두각시 황제로 옹립(재위 1759~1760)하고 수도 델리와 아그라에 마라타 군대가 진주하기도 한다. 이용가치가 없어진 샤 자한 3세는 금세 마라타와 이마드 울물크에 의해 폐위되고, 암살된 알람기르 2세의 아들이 정당한 황제로서 샤 알람 2세로 즉위하지만, 새 황제는 이마드 울물크의 전횡을 견디지 못하고 수도 델리를 떠나 마라타 직할령으로 피신해 마라타에 몸을 의탁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마라타의 기세는 전열을 가다듬은 두라니와의 제3차 파니파트 전투(1761)[12] 에서 잠시 꺾였다. 두라니측 지휘관으로는 아흐마드 샤 두라니, 나집 웃다울라가, 마라타 측 총지휘관으로는 사다시브라오 바우가 참가하였으며, 두라니 측 병력 약 10만, 마라타 측 병력 약 5만이 뒤섞여 싸운 대전투가 마라타의 대패로 끝난 것이다. 마라타의 패배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중 아와드 나와브 슈자 웃다울라가 아와드의 이권을 잠식한 마라타에 앙심을 품고 두라니 측에 물자 보급을 지원하는 한편 마라타의 보급을 방해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또한 마라타 기병이 탑승한 말들은 중앙아시아산 말들에 비해 체구가 작고 약했기 때문에 기병전에서 상당히 불리한 입장이었다. 마라타 동맹은 패배의 결과로 수틀레지 강 이북 펀자브 지역의 종주권을 두라니에 넘기고 더 이상의 북인도 확장을 중지하게 된다. 하지만 이 전쟁은 마라타 측뿐 아니라 두라니 측에도 엄청난 국력 소모를 강요했으므로 두라니는 마라타의 팽창을 억제하는 선에서 더 이상 마라타와의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델리를 비우고 떠난다.[13][14]
마라타 제국은 일단 물러서고, 페슈와 마다브라오 1세(바지라오의 손자)의 지휘 하에 다시 북인도에서의 패권을 장악해나가는 약 10년간의 고된 부흥기를 거친다. 이 시기는 마라타 내부의 불화로 시작하는데, 파니파트 전투 직후인 1762년 약해진 마라타의 이권을 노리는 하이데라바드의 니잠 알리 칸과 합세한 마다브라오의 삼촌 라구나트라오가 알레가온 전투에서 페슈와의 군대를 패배시킨다. 그러나 1763년 다시 뭉친 마다브라오와 라구나트라오는 외세 하이데라바드를 락샤부완 전투에서 물리치고, 마라타는 숨고르기에 성공한다. 이후 마라타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기존 북인도 점령지의 지배권을 재확립하고 내실을 다진다. 1770년대에 접어들면, 웅크리고 있던 마라타가 두라니와 협력했던 로힐라족 세력을 대상으로 정복 활동을 재개한다. 로힐라족의 지도자 나집 웃다울라가 1770년에 사망하고 상대적으로 능력이 떨어지는 나집 웃다울라의 아들 자비타 칸이 로힐라족을 통솔하기 시작했으므로 마라타가 이 타이밍을 노린 것이다. 1771년 마라타 내 괄리오르의 마하라자인 마하다지 신데는 상징적인 무굴 황제 샤 알람 2세를 대동하고 로힐라족 통치 하에 있던 델리를 수복한다. 나아가 마라타는 마하다지 신데를 필두로 로힐라족 지역인 로힐칸드(앞서 언급된 아와드 나와브 슈자 웃다울라의 보호 하에 있었다)에 대한 대규모 징벌 원정을 개시하여, 로힐라 세력을 붕괴시키고 1773년 나집 웃다울라가 1740년대에 건설한 상징적인 도시 나지바바드를 점령하기에 이른다.[15] 보통 이 시점을 마라타 부흥이 완수된 시기로 본다.
3.4. 절정기, 위태로운 승리들
18세기 중반까지 인도 내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마라타 제국이었지만, 그 시기는 서양의 강력한 영국의 세력이 인도로 뻗어오던 시기였다. 인도 반도의 관점에서 영국(영국 동인도회사)은 원래 17세기 중반부터 남동인도의 첸나이(마드라스, 1639년부터 점유, 비자야나가르 제국 지방관의 승인으로 획득)와 남서인도의 뭄바이(봄베이, 1661년부터 점유, 포르투갈로부터 찰스 2세와 카타리나 디 브라간사의 결혼 지참금으로 넘겨받음)를 거점으로 삼고 무역을 하던 세력이었으나, 18세기 중반 벵골 지역의 지방정권을 굴복시키고 사실상 벵골을 점령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마이소르 왕국과 전쟁을 하고 하이데라바드 및 카르나타카에도 개입하는 등 이제는 남인도, 동인도에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마라타는 18세기 중반의 확장기까지는 영국과 별다른 정치적 대립이 없었지만(벵골과 오디샤에 대해 간접적인 알력이 있기는 했다), 이때부터는 영국과의 관계가 마라타의 흥망에 주요 변수로 떠오르게 된다.
1772년 마라타 제국 내부에서는 페슈와 마다브라오 1세가 사망하고, 바지라오의 손자 나라얀라오가 페슈와가 되었으나, 나라얀라오와 라구나트라오가 페슈와직을 놓고 치열한 권력 투쟁을 전개한다. 처음에는 라구나트라오가 나라얀라오를 암살하고 페슈와 자리를 차지하는가 싶더니(1773), 부정한 방법으로 자리를 차지한 라구나트라오에 대한 반발로 라구나트라오는 마라타의 조신들에 의해 1년 만에 자리에서 쫓겨나고 나라얀라오의 젖먹이 아들 마다브라오 2세(1774 ~ 1795)가 명목상의 페슈와로 옹립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마라타 제국은 페슈와 중심의 체제에서 마다브라오 1세가 임명한 지방관들의 독립성이 강해져 지방분권적인 연맹체(마라타 연합, 마라타 동맹)로 변하게 된다.[16]
그런데 이때 권력 중심에서 밀려난 라구나트라오의 일파가 봄베이에 있던 영국에게 도움을 요청하니, 기회다 싶었던 영국은 이에 응하고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영국-마라타 전쟁(1775 ~ 1782)이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는 프랑스가 외교적으로 끼어들어 영국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게 된다.[17] 잠시 권력 투쟁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고는 해도, 다시금 강성해져 있던 마라타 동맹은 출중한 장군 마하다지 신데의 지휘 하에 일사불란하게 영국과 맞섰다. 한편 영국은 프랑스의 방해도 있는데다 제2차 영국-마이소르 전쟁과도 맞물려 있던 관계로 힘겨운 상태였고, 결국 1782년 당시 영국의 초대 인도 총독 워런 헤이스팅스는 마라타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살바이에서 마라타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야무나 강을 경계로 하였다. 동인도 회사는 점령한 영토를 마라타에 반환했고, 대신 마라타는 영토 내에 프랑스의 항구 설치를 허가하지 않기로 약조하였다. 영국과의 영토 문제에서 합의를 본 마라타의 마하다지 신데는 무굴 제국 황제의 섭정이자 총사령관직을 수행하며[18] 라지푸트와 펀자브를 영향권에 두는 등 북인도에서의 세력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힌두교도가 무굴 제국의 최고위직을 겸하는 상황에 무굴 궁정의 이슬람교도가 반발했고, 1787년 랄소트 전투에서 라지푸트족의 암베르-마르와르 연합군에 마하다지 신데가 패배하자 마하다지는 무굴 궁정에서 일시적으로 실각한다. 1788년에는 과거의 로힐라족 세력과 연합한 무굴 제국의 독립파 장군 이스마일 벡의 항쟁이 일어났는데, 로힐라족의 굴람 카디르는 일시적으로 델리를 점령하고 마라타에 순종적인 샤 알람 2세를 폐위한 후 눈멀게 한다. 이에 무굴 궁정에서는 일시적 실각 상태였던 마라타의 마하다지 신데가 개입하여 이스마일 벡과 로힐라족을 분쇄하고, 델리 재점령 후 샤 알람 2세를 무굴 황제로 복위시킨다. 이에 따라 마하다지 신데는 다시 무굴 궁정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1790년에는 샤 알람 2세에게 페슈와 마다브라오 2세를 무굴 황제의 대리인으로 임명하도록 한다.
한편 마라타는 인도 남부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마이소르 술탄국의 세력과 대립에 들어가, 1770년대부터 간헐적인 전투를 벌였다. 초기의 국지전은 마이소르의 하이데르 알리가 마라타가 점령한 지역으로 공격해 들어가 발생한 1777년의 사운시 전투에서 꽤 큰 규모의 전투로 발전했는데, 하이데르 알리는 뛰어난 전술적 판단으로 마라타의 지휘관 콘헤르 라오(Konher Rao)를 죽이고 다른 지휘관 파두랑 라오(Padurang Rao)를 포로로 붙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마라타와 마이소르 간에는 한동안 소강 상태가 지속되었으나, 1780년대에 마라타가 하이데라바드와 마이소르에 대항한 군사 동맹을 맺고 마이소르에 대항한 경계를 강화하자 마이소르의 티푸 술탄이 1785년 마라타를 침공하여 본격적인 마라타-마이소르 전쟁이 시작되었다. 1787년까지 2년간 지속된 이 전쟁에서 티푸 술탄은 놀라운 지휘를 펼쳐 연전연승하였고, 마라타는 전체적으로 전투에서는 패배하고 있었으나 마이소르의 국력 및 마이소르와 영국 세력 간의 적대 관계를 감안할 때 전쟁이 계속되면 최종적으로는 마라타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결국 티푸 술탄은 1787년 1월의 바하두르벤다 포위전에서 마지막 승리를 거둔 뒤 1787년 4월 가젠드라가드 조약을 맺어 마이소르가 마라타에 약간의 공물을 바치고 선대 하이데르 알리가 마라타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전쟁을 끝냈다. 확실한 승리 없이 시간을 끌던 마라타는 예상한 것보다 적은 이득을 거둔 상황이었고, 결국 몇 년 후 제3차 영국-마이소르 전쟁(1790 ~ 1792) 때 영국 동인도회사, 하이데라바드 니잠 정권과 동맹하여 마이소르를 협공해 일부 영토를 점령해온다. 그러나 제3차 영국-마이소르 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마이소르는 결정적으로 약화되고, 동인도회사의 세력만 강성해져 결과적으로 이는 마라타에 실책이 되었다.
1795년에는 마라타가 하이데라바드와 다시 대립하여 전쟁에서 카르다 전투의 대규모 회전을 승리하고 하이데라바드의 영토를 빼앗았는데, 하이데라바드는 지속적으로 친영 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영국과 마라타의 관계는 다시 벌어지게 된다. 18세기가 끝나고 19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마라타의 전체적인 세력은 절정에 달하고 있었으나, 코친[19] , 하이데라바드[20] , 트라방코르[21] , 아와드[22] , 카르나타카 나와브[23] 를 길들이고 제4차 영국-마이소르 전쟁에서 승리(1799)해 남인도, 동인도를 평정한 영국의 앞을 막아서는 중부 인도의 대세력은 이제 마라타가 유일했다.
3.5. 분열과 몰락, 영국과의 전쟁
19세기 초 마라타 동맹은 페슈와, 가에크와드, 신데, 홀카르, 본슬레 등 다섯 세력들로 나뉘어 서로 간에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이게 된다.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는 영국은 페슈와 및 신데 가문과 군사동맹을 맺은 후 마라타 연합 세력을 분열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는 실패하고 만다. 그런데 1802년 10월 디왈리 축제 기간 중에 홀카르가 페슈와, 신데 연합군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게 된다. 이에 당황한 페슈와 바지라오 2세[24] 가 영국군과 군사 조약을 체결하여 그들의 보호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 곧이어 신데와 본슬레가 영국과 전쟁을 벌이는데(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 1803 ~ 1805), 전쟁 초기 1803년의 아사예 전투와 라스와리 전투 등에서 신데-본슬레 연합군이 영국에 패배하고, 동년 12월 본슬레와 신데는 차례로 영국과 강화를 맺고 전선을 이탈한다. 전쟁 도중 신데 가문의 세력권에 있던 델리가 영국에 점령당하였으며(1803년의 델리 전투), 무굴 제국은 1803년부터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홀카르 세력의 지도자 야슈완트라오 홀카르는 1804년 초 영국과의 협상을 시도하나 실패하고 전쟁에 들어갔다. 7월 무쿤드와라 고개의 전투에서 야슈완트라오는 영국군에 승리를 거두었고, 계속해서 9월까지는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마침내 10월 8일, 홀카르군은 영국 지배하의 무굴 황제를 보위하기 위해 델리를 포위공격하나, 영국군의 기습에 당해 큰 타격을 입고 패배한다.[25] 이를 기점으로 전황은 홀카르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였고, 야슈완트라오는 홀카르의 동맹 바랏푸르 왕국[26] 의 영토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이를 추격한 영국군은 1805년 1월 바랏푸르 왕국의 수도 바랏푸르를 포위하였지만, 홀카르-바랏푸르 연합군의 호수비로 패배한다.[27]
부담을 느낀 바랏푸르 왕국은 동년 4월 영국과 강화 조약을 맺고 전선을 이탈하였으나, 야슈완트라오의 선전은 북중부 인도 전역에서 추종자를 낳았고 신데와 본슬레는 재참전 채비를 하였으며, 자이푸르 왕국과 마르와르 왕국도 홀카르를 지원하였다. 바랏푸르에서 철퇴한 야슈완트라오는 시크 왕국으로 가서 시크의 란지트 싱을 끌어들여 영국에 대항하기를 시도하였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지원을 약조하였던 란지트 싱은 곧 배반하고 영국 측으로 돌아서게 된다(1805년 12월). 군사적으로는 이처럼 홀카르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으나, 야슈완트라오의 분전으로 장기화된 전쟁이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의 한복판에 있던 영국에 엄청난 전비 부담을 안겼으므로, 영국 총독 리처드 웰즐리[28] 가 본국으로 강제 소환되고, 영국 측은 야슈완트라오에게 강화를 요청한다. 이에 야슈완트라오가 응하여, 1805년 12월 24일 펀자브의 라지가트에서 라지가트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홀카르-영국의 무승부 형태로 마무리된다. 1806년 초에는 라지가트 조약이 개정되어 홀카르 피점령지가 반환됨으로써 홀카르는 군사적, 외교적 명예를 얻었으나, 전 마라타의 입장에서는 패배였고, 이후 마라타는 라자스탄 일대의 라지푸트족에 대한 지배권을 대부분 상실했다.
여전히 내부분열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페슈와와 가에크와드는 영국에게 협조하는 상태였고[29] 신데와 본슬레는 상당히 약화되어 있었기에 독립 세력으로 남은 것은 이제 홀카르 세력밖에 없었다. 이마저도 야슈완트라오의 사망 후 정체기를 겪는 중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식민 정책이 노골적으로 바뀌어 감에 따라 마라타인들의 반영 감정이 커지게 되었다. 영국은 1817년 6월 13일 페슈와 바지라오 2세에게 사실상 마라타의 번왕국화를 의미하는 불평등조약인 푸네 조약을 강요해 성사시키고, 덤으로 페슈와의 기병대를 해산할 것을 요구한다. 이에 페슈와는 홀카르, 신데, 본슬레 및 라자스탄 세력까지 끌어들여 1817년 11월 5일 영국군을 선제 공격하게 된다(카드키 전투). 이것이 제3차 영국-마라타 전쟁(1817 ~ 1818)의 시작이다. 하지만 유럽의 싸움을 정리하고 이미 강할 대로 강해져버린 영국 앞에서 마라타군은 연전연패하였으며 마라타 연합군 내부의 이반도 속출하였다. 신데가 1817년 말 영국 측에 다시 붙었으며, 1817년 말의 전투에서 본슬레(시타바르디 전투)와 홀카르(마히드푸르 전투)가 영국군에 패배를 겪고 1818년 초 따로 강화를 맺어 번왕국화되었다. 라자스탄 역시 전쟁 도중 마라타와 반목하고 영국에 붙게 된다.
페슈와 바지라오 2세와 장군 바푸 고칼레는 끝까지 항쟁하였으나, 1818년 1월 1일의 코레가온 전투[30] 등에서 패배하고, 이어진 2월의 전투에서 바푸 고칼레는 페슈와를 지키다가 사망한다. 페슈와는 4개월 가량 더 추격전을 벌이다 결국 힘이 다함을 자각하고 영국에 항복한다. 바지라오 2세가 이 항복 문서에 조인함으로써 마라타 동맹은 공식적으로 소멸하게 된다. 바지라오 2세는 페슈와 직할령을 몰수당하고 비투르(현재의 칸푸르 주변 칸푸르 현에 속함)에서 연금 수급자로 생활하게 되었으며, 과거 신데-홀카르의 지배 하에 있던 라지푸트 왕국도 1818년 말까지 번왕국화됨으로써 마라타의 구 영토는 전부 영국의 손 안에 들어간다. 명목상의 왕이었던 차트라파티 프라타프 싱 세력은 전쟁 와중에 영국의 보호 하에 들어가, 영국 지도 하에 구 차트라파티를 왕으로 하는 사타라 번왕국이 수립되었으나, 프라타프 싱의 아들(정확히는 양자) 샤하지가 아들 없이 1848년 사망함으로써 1849년 사타라 번왕국의 영토는 영국 직할령으로 흡수된다.
4. 역대 통치자 목록
4.1. 차트라파티
- 시바지 1세(시와지 보살레, शिवाजी भोसले, Shivaji Bhosale, 1627? ~ 1680, 재위 1674 ~ 1680)
- 삼바지(삼바지 보살레, संभाजी भोसले, Sambhaji Bhosale, 1657 ~ 1689, 재위 1681 ~ 1689)
- 라자람 1세(라자람 라제 보살레, राजाराम राजे भोसले, Rajaram Raje Bhosale, 1670 ~ 1700, 재위 1689 ~ 1700)
- 시바지 2세(1696 ~ 1726, 재위 1700 ~ 1707 (차트라파티), 1710 ~ 1714 (콜하푸르 왕국))
- 타라바이(1675? ~ 1761, 섭정 재위 1700 ~ 1708; 라자람 1세의 왕비이며 시바지 2세의 어머니)
- 샤후 1세(1682 ~ 1749, 재위 1707 ~ 1749)
- 라자람 2세(1726 ~ 1777, 재위 1749 ~ 1777)
- 샤후 2세(1763 ~ 1808, 재위 1777 ~ 1808)
- 프라타프 싱(1793 ~ 1847, 재위 1808 ~ 1819 (차트라파티), 1819 ~ 1839 (사타라 번왕국))
- 샤하지(1839 ~ 1848, 재위 1839 ~ 1848 (사타라 번왕국))
4.2. 페슈와
"페슈와"라는 단어는 페르시아어 "پیشوا(pēshwā 페슈워, '지도자, 통솔자')"에서 유래하였다. 1674년 시바지 1세가 차트라파티가 된 후 공적이 많은 장군 모로판트 트림바크 핑갈레에게 이 칭호를 내린 것이 페슈와직의 시초이다. 원래는 세습이 가능한 비세습직이었으나, 바트 가문의 발라지 비슈와나트 이후 바트 가문이 세습하게 되었다.
- 트림바크 핑갈레(1620 ~ 1683, 1647년 시바지 1세 세력에 가세, 페슈와 재직 1674 ~ 1683)
- 모레슈와르 핑갈레(? ~ 1689, 트림바크 핑갈레의 아들, 페슈와 재직 1683 ~ 1689)
- 닐칸드 바와데카르(1650 ~ 1716, 페슈와 재직 1689 ~ 1708)
- 바히로지 핑갈레(페슈와 재직 1708 ~ 1711)
- 발라지 비슈와나트(1662 ~ 1720, 페슈와 재직 1711 ~ 1720)
- 바지라오 1세(1700 ~ 1740, 페슈와 재직 1720 ~ 1740) : 마라타 팽창기의 주요 집권자.
- 발라지 바지라오(1721 ~ 1761, 페슈와 재직 1740 ~ 1761)
- 마다브라오 1세(1745 ~ 1772, 페슈와 재직 1761 ~ 1772) : 마라타 부흥기의 주요 집권자.
- 나라얀라오(1755 ~ 1773, 페슈와 재직 1772 ~ 1773)
- 라구나트라오(1734 ~ 1783, 페슈와 재직 1773 ~ 1774)
- 마다브라오 2세(1774 ~ 1795, 페슈와 재직 1774 ~ 1795) : 꼭두각시 페슈와로서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
- 바지라오 2세(1775 ~ 1851, 페슈와 재직 1796 ~ 1818) : 퇴위 후에는 칸푸르 근처의 비투르에서 연금 생활자로 살다가 죽음.
5. 번외 : 나나 사힙
나나 사힙[31] (1824 ~ 1859?)은 바지라오 2세의 처조카로 1827년 비투르에 살던 바지라오 2세의 양자가 되었다. 1851년 바지라오 2세가 사망하였으나 영국이 입양에 의한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아[32] 바지라오 2세의 여러 작위와 연금을 상속받지 못했다. 1853년 이 문제를 탄원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사절을 보내나 거부당하고 1855년 사절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사힙은 자신의 명예를 실추당한 것으로 여기고 영국에 반발심을 품게 되었다.[33]
1857년 사힙은 마라타 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세포이 항쟁 시기 군사를 일으켜, 세포이 반란군과 합세해 6월 칸푸르를 점령하고 자신을 정당한 페슈와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는 오래 가지 못했고, 같은 해 말 다시 영국군이 칸푸르를 점령한 후 도피하였는데 이후 사힙의 행방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네팔 도피설, 시호르 도피설 등)만 무성할 뿐이다. 1858년 6월, 다른 많은 항쟁 지도자들도 나나 사힙을 페슈와로 인정하였다. 푸네에 있는 페슈와 기념물에 간혹 나나 사힙이 끼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6. 여담
마라타 동맹/제국은 현대 인도의 힌두교도에게 인기가 많은데, 무굴 제국을 군사적으로 압도하고 전 인도 단위로 정치적 영향력을 투사한 마지막 힌두계 왕조라는 점이 그들의 선망 포인트다. 특히 뭄바이를 위시한 마하라슈트라 지역에서 인기가 많다. 마라티 민족주의와 힌두 중심주의(힌두트바)를 결합한 힌두교 극우 정당 시브 세나(2018년 현재 하원 집권 연정에 참여 중)의 이름은 바로 "시바지의 군대"라는 뜻이다.
[1] 시바지의 장남 삼바지 1세 계열과 차남 라자람 1세 계열로 정권이 양분되어서 수도가 2개가 되었지만, 사실상 사타라 정권에 정통성이 있었다.[2] 차트라파티 가문과는 별개의 가문[3] 참조: The Tribes and Castes of the Central Provinces of India[4] 20세의 젊은 나이에 집권하여 40세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총43차례의 전투에서 무패를 자랑했으며, 마라타의 영토를 10배가량 넓히는 데 기여했다. 그의 로맨스를 다룬 발리우드 영화 '바지라오 마스타니'가 2015년말 개봉하여 흥행하였다.[5] 위의 지도에서 수틀레지 강 동편의 라자스탄과 펀자브 일대는 마라타의 직할령은 아니었으나 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 이전까지는 사실상 그 영향권에 속했고 마라타에 세금을 납부했다.[6] 1739년이나 1757년과는 달리 이때는 델리가 점령되진 않았다.[7] 무굴 제국은 1748년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1차 인도 침공 과정에서 아와드 나와브 사프다르 장그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이에 응하여 아와드-무굴 연합군은 펀자브에서 두라니군을 물리치게 된다(마누푸르 전투). 동년 사프다르 장그가 힌두스탄의 대재상이 되고 알라하바드를 하사받은 후, 무굴 제국은 사실상 아와드의 보호국과 유사한 위치였다. 사프다르 장그는 두라니 및 로힐라족에 대항하기 위해 과거 무굴의 적이었던 마라타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데 주력하여 성공한다. 물론 마라타가 맨입으로 도와준 건 아니고, 두둑한 지원금, 북인도 여러 지역에서의 세금 징수권에 더불어 아그라와 아지메르를 받는다.[8] 1748년부터 1767년까지 인도를 7차례나 침공한다. 1757년의 델리 점령은 4차 침공 때 벌어진 일.[9] 파슈툰족의 일파. 마라타는 1751-1752년에 이미 아와드 나와브의 요청으로 로힐라족의 영지 로힐칸드를 공격하여 로힐라족과 적대 관계에 있었다. 이때 마라타-아와드 연합군은 로힐라군을 포위하고 몰아붙이고 있었으나, 두라니의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3차로 인도를 침공(1752)하자 일단 후퇴한다.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이 3차 침공에서, 라호르 전투에서 무굴 제국군을 대파하고 펀자브와 물탄을 뜯어가 무굴 제국을 존망의 위기로 몰아넣는다.[10] 바지라오의 조카.[11] 아사프 자흐 1세의 손자[12]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5차 인도 침공 과정에서 발생함[13] 잠깐 카불로 귀환했던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1761년 말 다시 인도로 내려와 펀자브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시크교도 세력과 전투를 벌이는데, 오히려 구지란왈라와 시알코트에서 패배하고 시크교도가 두라니 지배 하에 있던 펀자브의 중심 도시 라호르를 접수하게 된다. 이후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6차(1762-1763), 7차(1764-1767) 침공은 펀자브 시크교도와의 전쟁이 주를 이루며, 시크교도는 일시적으로 패배하고 학살을 겪기도 하였으나 결국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특히 7차 침공 때는 아프간 본국의 반란으로 아흐마드 샤의 본대가 원정 도중 귀환하게 된다) 두라니 세력을 몰아낸다.[14] 한편 두라니 측에 붙었던 아와드의 슈자 웃다울라는 1762년 영국과 대립하다 아와드로 피신한 무굴 황제 샤 알람 2세를 보호하면서 무굴 제국의 후견자(사실상)이자 제국 대재상(공식)이 되는데, 1764년 벵골과 연합해 영국과 싸운 북사르 전투에서 대패하고 약화일로를 걷는다.[15] 아와드는 불리해지자 과거의 적이었던 영국과 동맹을 맺고 로힐칸드를 잠시 수복하나, 로힐라족이 보호 명목으로 지불하기로 한 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1773-1774년 영국과 연합해 로힐칸드를 재침공, 합병해버린다.(제1차 로힐라 전쟁; First Rohilla War) 이후 아와드는 영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문화적으로 번영을 누리나(아와드 무굴 시대), 결국 1801년 영국 보호 하의 번왕국으로 전락한다. 로힐라족은 나중에 영국 동인도회사와 제1차 로힐라 전쟁의 결과로 창설된 람푸르 나와브직 계승 문제로 분쟁을 겪어 1794년에 영국 동인도회사와 한 번 더 전쟁을 벌이고 나서는(Second Rohilla War) 완전히 영국 보호 하에 놓인다.[16] 마라타 동맹에 속한 대표적인 세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푸네의 페슈와를 중심으로 한(페슈와는 푸네의 재상궁에 거주했다) 중앙정권, 괄리오르의 신데 가문 세력, 구자라트의 바로다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가에크와드(가이크와드, 가이콰드) 가문의 세력, 인도르의 홀카르 가문 세력, 나그푸르의 본슬레 가문 세력 등등. 이 외에도 군소 지방관이 왕조처럼 통치한 지역은 더 있었다.[17] 프랑스가 마라타 측에서 참전한 것은 아니다.[18] 갑자기 무굴 제국이 튀어나오는 이유는 좀 복잡하다. 마라타가 위기를 맞았던 1772년-1782년 동안, 무굴 제국은 미르자 나자프 칸이라는 걸출한 군사령관의 지휘 하에 마지막 부흥기를 맞고 있었다. 이 시기에 미르자의 지휘 하에 무굴 제국은 군사적 현대화를 이룩하고, 펀자브의 시크교도와 전쟁에 들어간다. 1779년에는 시크-로힐라 연합군을 물리치고 어느 정도 북인도에서의 영토적 지배권을 회복하였으며, 이때 남인도의 마이소르와 카르나타카 나와브도 무굴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1782년 미르자 나자프 칸이 사망하고 4명의 부관이 총사령관의 지위를 놓고 내분을 벌였는데, 영국과의 1차전을 끝낸 마하다지 신데가 이에 개입하여 4명의 부관을 제압하고 무굴의 내란을 진정시킨다. 샤 알람 2세는 이에 따라 1784년 마하다지 신데의 공적을 인정하여 그를 무굴의 섭정이자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게 된다.[19] 1795년에 영국(동인도회사)이 네덜란드에서 접수해 보호국으로 만듦. 그 전에는 포르투갈(1503-1663), 네덜란드 동인도회사(1663-1795)의 보호령이었음.[20] 1798년에 보호국화되어 영국 주권 하의 인도 번왕국(princely state)이 됨[21] 1795년에 군사보호조약을 맺고 번왕국이 됨. 1808-1809년에 짧은 반영 항쟁을 벌이긴 하나 패배.[22] 1801년에 군사보호조약을 맺고 번왕국이 됨[23] 1801년 카르나타카 조약에 의해 사실상 멸망하고 나와브 아짐 웃다울라는 명예직 나와브로 남게 됨. 죽을 때까지 막대한 연금을 받음.[24] 라구나트라오의 아들로 1795년 전대 페슈와 마다브라오 2세가 꼭두각시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한 후 페슈와직 승계. 마라타의 마지막 페슈와.[25] 그러나 무굴 황제 샤 알람 2세(아직 살아있었다!)는 홀카르의 지휘관 야슈완트라오 홀카르의 무용을 극찬하고 명예로운 칭호를 내렸다.[26] 자트족 정권으로, 델리 근교 바랏푸르에서 아우랑제브 황제 시대에 한 자트족 자민다르의 영지가 독립성을 띠기 시작하여 1724년에는 바랏푸르에 성을 쌓고 독립 왕국으로 기능하기에 이른다.[27] 마라타 멸망 후 1826년에 영국군이 재침하였을 때는 바랏푸르 성이 함락 후 파괴된다.[28] 아서 웰즐리의 형[29] 가에크와드는 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으며, 그 와중인 1805년 영국과 군사보호조약을 맺고 마라타 주요 세력 중 가장 먼저 영국에 의해 보호국화되었다.[30] 별도로 이 전투에서는 영국을 지원한 불가촉천민들이 마라타의 귀족 장군들을 죽임으로써 카스트 제도에 저항했다. 2018년 1월 1일 푸네에서는 코레가온 전투 200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는데 여기서 불가촉천민과 힌두교 근본주의자들이 충돌하였다: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18/jan/03/commemoration-of-british-military-victory-sparks-riots-in-india[31] 나나 사히브. 관용명을 따라 나나 사힙으로 적음.[32] 비슷한 시기에 훗날 세포이 항쟁에 가담하는 락슈미 바이도 남편인 강가다르 라오가 죽자 요절한 아들을 대신해 남편 쪽 친척인 다모다 라오를 입양했지만, 동인도회사는 양자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33] 이 시점에서 나나 사힙은 여전히 부유하였으므로 돈 문제만으로 반발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