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장계전쟁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호남 사건과 광서파의 봉기
3.2. 토벌령 발표
3.3. 광서파의 몰락
4. 결말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6.1. 인물
6.2. 사건


1. 개요


1929년 3월 26일에서 6월 27일까지 벌어진 장제스리쭝런, 바이충시, 황샤오훙 등 계계군벌, 즉 광서파 사이의 전쟁. 월계전쟁이라고도 한다. 장제스가 승리했다.

2. 배경


국민당의 2차 북벌로 1928년 6월 베이징이 함락되었고 황고둔 사건이 발생하면서 대원수 장쭤린이 암살당했다. 만주 구파의 추대로 봉천군벌의 수장이 된 장쉐량은 국민정부에 합류하기로 결정하면서 동북역치를 단행했고 위안스카이 사후 10여년 만에 중국 통일이 완수되었다. 장제스는 1928년 탕산에서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등 국민정부의 실력자들을 소집하여 군축을 위한 회의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1929년의 편견회의가 되었다.
하지만 이 편견회의는 군벌들의 반발을 샀다. 사실상 지방의 독립군주로 행세하던 군벌들이 자신들의 기반인 군대를 줄일 리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장제스가 후한민과 함께 난징의 중앙정부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각 지방의 정치분회를 폐지하기 시작하자 불만을 품은 군벌들의 반발이 시작되었다. 특히나 광서를 중심으로 하는 계계군벌은 장제스와 오랜 원한이 있었다. 광서파는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 시절까지만 해도 장제스의 우군이었으나 영한합작 과정에서 왕징웨이에게 동조하여 장제스 하야를 압박하여 장제스와 틀어졌고 2차 북벌 이후 봉천군벌의 양위팅과 접촉하면서 공공연하게 반장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장제스는 계계와 자신은 양립할 수 없다고 불만을 품고 있었다.

3. 전개



3.1. 호남 사건과 광서파의 봉기


결국 우한 정치분회 주석이며 광서파의 국민정부위원 리쭝런이 최초로 반기를 들었다. 리쭝런은 우한 정치분회 주석 명의로 호남성 주석 루디핑을 무단으로 해임하고 35군장 허젠을 신임 주석으로 삼았다. 당황한 중앙정부는 허젠을 새 주석으로 인정하는 한편 리쭝런을 달래려 했으나 호남성에서 장제스를 지지하는 루디핑의 부대와 리쭝런을 지지하는 섭기, 하위 부대들의 충돌이 폭발하면서 마침내 중앙과 계계군벌 사이의 무력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중앙정부는 호남 사건을 온건히 처리하려 했으나 리쭝런은 자신의 부대를 재편성, 전쟁준비에 돌입했다. 그는 우한 방면에서 장강의 교통을 차단하고 병력 수송 준비를 시작하였으며 장강 유역 각 성의 지도를 5만 매나 인쇄하는 한편 섭기와 하위의 군대를 강서로 접근시켜 난징을 급습할 준비를 하였다. 이에 장제스도 강경하게 돌변, 리쭝런의 난징 복귀를 촉구하며 중앙의 위신을 위해서는 군대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와중에 장제스의 중재 요청을 받은 리지선이 난징으로 와서 중재를 맡았다. 장제스는 지방은 중앙에 복종해야 하나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군사적 방안은 쓰지 않겠다고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3월 13일 중앙정치회의는 루디핑 파면을 주도한 호종탁 등 3인에 대한 정치분회 위원직 면직과 중앙감찰위원회의 조사 처분이란 가벼운 처벌을 정하고 리쭝런에 대해서는 조사를 면제해주었다. 이는 펑위샹, 옌시산이 호남 사건에 대해서 평화적 해결만 강조하며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가뜩이나 가중되던 정치적 갈등이 증폭되어 삼전대회가 무산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3.2. 토벌령 발표


하지만 섭기와 하위는 말을 듣지 않고 무단 군사행위에 돌입했다. 섭기는 3월 13일 50사단을 공격, 상덕을 점령하였고 하위도 3월 17일 50사단을 호남 서북 지역 경계로 밀어붙혔다. 이에 장제스는 3월 18일 탕성즈를 하북의 바이충시 부대에 파견하여 3월 10일 영장급 회의를 통해 산둥을 통해 난징에 진공하겠다는 생각을 밝힌 바이충시의 군권을 제한하는 한편 3월 19일 섭기와 하위에게 모든 병력을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광동성 주석 겸 8로군 사령관 리지선에게 호북 문제를 논하자는 이유로 난징으로 초청한 다음, 3월 21일 리지선을 우한과 내통한 혐의로 즉시 탕산에 연금하고 10차 편견회의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섭기와 하위의 군직을 면직하는 강경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3월 26일 리지선, 리쭝런, 바이충시를 모두 면직하고 조사처분을 내리는 한편 계계군벌에 대한 토벌령을 선포, 장제스가 직접 구강으로 나아가 군함 초동호를 타고 토벌을 독전했다. 장제스는 국민정부 주석 명의로 <전 제4집단군 장병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 파벌의식에 사로잡혀 파벌에 이용당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국군의 개편이 진행되고 인민이 통일과 평화를 갈망하고 있는 이때, 리쭝런, 리지선, 바이충시 등 반역자는 부대를 움직여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혁명을 소멸하려 했다. 이와 같은 반역을 용서한다면 전국의 민중과 통일을 위해 희생된 장병에게 어떻게 대할 낯이 있겠는가. 전선의 각 군은 그들을 완전히 토벌하여 법을 바로 잡아라."

3월 26일 국민정부의 토벌령.

그리고 중앙군을 토역군이라 명명하여 출동시키고 1집단군 총지휘관 주페이더를 1로군 사령관, 1집단군 1군장 유치를 2로군 사령관, 2집단군 6군장 한푸쥐를 3로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10만 대군을 동원해 우한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3월 28일 장제스는 펑위샹에게도 출병하여 계계군벌을 토벌할 것을 요청했다. 무력해결에 반대하던 펑위샹은 이를 표면적으로는 수락했으나 실질적인 군사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중앙군의 위세에 눌린 광서군은 우한을 포기하고 형주, 사시, 의창으로 철수했고 중앙군은 장강을 따라 전진하면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으나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 단장 막스 바우어 대령이 호남으로 향하던 중 한커우에서 천연두에 걸려 쓰러졌고 상하이로 후송되었으나 사망했다.[1] 장제스는 장파쿠이, 주사오량에게 호종탁과 도균 등 광서파 장령들을 추격하게 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3개 로군을 동원한 토벌군이 계계군벌보다 막강한 것도 있었지만 제4집단군 전체군장 이품선(李品仙), 50사단장 이명서의 포섭 등이 성공하여 이품선이 중앙을 옹호한다고 통전하면서 광서군은 위축되기 시작했다.

3.3. 광서파의 몰락


4월 4일 우한이 항복하여 5천명의 수비대가 장제스에게 투항했다. 4월 5일, 장제스는 우한에 입성하여 병사들의 사열을 받았으며 우한 탈환기념 우표를 발행한 후 4월 15일에 루디핑을 우한 위수사령에 임명했고 유문도를 우한 시장에 임명했으며 4월 16일 장사를 함락시켰다. 장제스는 장쉐량의 동북군벌에게도 참전을 요구했지만 장쉐량은 보경안민을 구실로 이를 거절했다. 어쨌거나 봉천군벌의 참여 여부와 상관 없이 광서파의 열세는 확연하였고 궁지에 몰린 바이충시는 이후 톈진을 거쳐 홍콩으로 달아났고 장제스는 탕성즈에게 바이충시 휘하의 상군을 수습할 것을 지시하여 바이충시의 부대들은 탕성즈에게 투항했다. 하위 등도 출국을 통전하고 달아났으며 잔존 부대는 정부군에 항복했다. 리쭝런은 광동을 거쳐 광서로 돌아와 저항했고 여기에 광서성 정부 주속 황샤오훙과 돌아온 바이충시가 합세했다.
5월에 접어들어 장제스는 호남, 광동, 운남 3개 방면으로 광서에 대한 총공세를 감행했다. 이에 바이충시는 5월 5일 호당구국군을 선포하고 장제스에 대항했다. 한편 서산회의파는 광서파에 대한 무력토벌을 감행했으나 장제스가 이를 묵살하자 광서파와 연대하기로 결정했고 5월 중순, 쉬충즈, 쥐정, 셰츠 등 서산회의파들이 광저우에 집결하여 광서파와 회담했다. 서산파는 광서파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왕징웨이의 개조파와 연대하는 것에 대해 반대를 분명히 했고 5월 18일 서산파와 광서파가 연대하여 장제스의 국민정부 주석 취임 반대, 3전대회의 정당성 불인정, 국민회의 소집, 쉬충즈의 도장총사령관 추대 등에 합의함으로 양광의 군사력은 쉬충즈에게, 정치는 쥐정과 셰츠에게 위임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장제스는 격노하여 혁명원로에 대한 예우를 걷어치우고 쩌우루, 쥐정, 셰츠 등을 체포하여 즉시 총살하라고 지령했다.
그러나 광서군 내부에서 허젠 등이 장제스에게 포섭되어 반란이 일어나는 한편, 정부군과의 교전에서 광서군이 참패함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해군과 공군을 동원하여 5월 10일 광서의 성도 구이린을 점령했고 오주, 난닝을 잇달아 수복함으로 6월에 광서 전역을 함락시켰다. 황샤오훙, 바이충시가 하야를 통전했고 리쭝런은 영국령 홍콩으로 도주하였으며 6월 27일 장제스에게 항복한 이명서가 난닝에 입성하면서 월계전쟁이라 부르는 광서 전역도 종결되었다. 서산파는 안전을 위해 평진 지역으로 이동하는 한편 펑위샹 등 다른 군벌들과의 합작을 모색했다. 장제스는 유작백을 광서성 주석으로 임명하고 천지탕, 천밍수에게 광동의 리지선 세력을 제거하게 지시함으로 리지선의 군정 대권을 박탈했으며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전투기를, 일본에서 야전포를, 영국에서 6만 자루의 보병총 구입을 지시하였다.

4. 결말


하지만 장제스의 군사적 승리 때문에 짐짓 국민정부의 편을 드는 척 하면서 군사적 해결에 반대하던 펑위샹은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 펑위샹은 장제스의 출병 요구에 응하는 척 하면서도 장제스를 독재자라고 비난하며 3차 전국대표대회를 차오쿤회선 사건보다 나을 것이 없는 행위라고 비난, 리지선의 가택연금을 자살행위라 불렀다. 펑위샹의 이런 불만은 1차 장풍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옌시산 역시 호남 사건에 대해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는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고 중원대전에서 마침내 장제스에게 반기를 든다.

5.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北伐完成 직후 蔣介石의 中央軍體制 確立 努力과 編遣會議, 배경한, 동양사학연구 48권, 동양사학회.
  • 국민당 3전대회 전후의 반장운동, 김영신, 중국학연구 30, 중국학연구회.

6. 관련문서



6.1. 인물



6.2. 사건



[1] 후임 고문은 뮌헨 폭동에 참여했던 나치당원 헤르만 크리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