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이볜 암살 미수 사건

 

1. 개요
2. 전개
3. 조작?
4. 대만 선거 소요
5. 여담


1. 개요


2004년 3월 19일 오후, 대만 타이난 시에서 총통 선거 유세를 하고 있던 천수이볜 당시 중화민국 총통뤼슈롄 중화민국 부총통을 향해 괴한이 발포한 사건을 말한다. 이는 중화민국 역사상 유일한 국가원수를 대상으로 한 암살 시도였다.[1] 중국어권에서는 사건 날짜를 따서 三一九槍擊事件 등으로 일컫는다.
두 사람 모두 큰 부상은 입지 않았고 3월 20일 치러진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는데 중국 국민당/친민당 연합후보인 총통 후보 롄잔과 부총통 후보 쑹추위는 이를 자작극이라 주장했다.

2. 전개


2004년 3월 19일 오후, 당시 중화민국 총통으로 재직 중이던 천수이볜은 11대 총통 선거를 불과 하루 앞두고 자신의 고향인 타이난시에서 부총통 뤼슈롄과 함께 선거 유세 중이었다. 그런데 오후 13시 45분, 유세 도중 차량에 탑승한 천수이볜을 향해 괴한이 총탄을 발사했다. 천수이볜이 배에 경상을, 뤼슈렌이 오른쪽 무릎에 경상을 입었다. 총알은 천수이볜이 탑승했던 자동차 오른쪽 유리 중간을 관통하여 천수이볜의 복부를 스쳐지나갔는데 중요한 장기가 없는 피하지방 부위라서 부상은 심하지 않았다.
인근의 치메이 병원으로 옮겨진 천수이볜은 배꼽 3㎝ 아래 부위에 가로 11㎝, 세로 2㎝로 절개된 복부 부위를 14바늘 꿰메는 봉합수술을 받았으며 수술 이후 8시에 퇴원하여 전용기를 타고 타이베이로 돌아가 안정을 취했다. 이 사건으로 대만 전체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저격 10시간 후인 오후 11시 30분, 천수이볜은 대국민 연설을 통해 수술 결과가 좋으며 안보에 문제가 없으니 국민들은 냉정을 잃지 말고 단결해달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뤼슈롄도 "저격시 의식을 잃지 않았으며 부상당한 무릎도 골절상태가 아니다"라며 지지자들에게 안정을 촉구했다. 천수이볜과 뤼슈롄의 소속 정당인 민진당은 유세 중단을 선언했고 이에 국민당과 친민당도 유세를 중단했다.
국가안전국장 차이자오밍은 밤 11시에 기자회견을 열어 "괴한의 총격으로부터 총통과 부총통을 지키지 못하는 등 경호작전에 만전을 기하지 못한 데 대해 두 분에게 사과하고 싶으며 이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지겠다"라면서 경호작전 실패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고 발표했으며 미국 정부는 스콧 맥클레런 백악관 대변인을 통해 천수이볜 저격을 명백한 암살 시도라고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 대만 사회가 보여준 침착함을 대만 민주주의와 대만 사회의 성숙함의 증거라고 논평했다. 불과 3일 후인 3월 22일, 하마스의 지도자 야신이 암살되면서 세계 증시가 폭락했으며 특히 대만 증시는 최악이라 부를 정도로 하락했다. 그나마 환율은 중앙정부의 개입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천수이볜의 건강에 큰 이상이 없었으므로 3월 20일, 선거는 예정대로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 천수이볜은 0.22%p에 불과한 2만9518표 차이로 상대 후보 롄잔을 가까스로 누르고 총통에 재선되었다. 한편 경찰은 저격 현장에서 2발의 탄피를 회수하고 이것이 수제라는 결론을 내렸으나 끝내 용의자를 체포하진 못했다. 2005년에 용의자들이 경찰을 통해 발표되었지만 이들은 사건 이후 얼마 못 가 자살하거나 익사했다.

3. 조작?


중국 국민당 후보였던 롄잔은 저격 사건이 천수이볜의 조작이라고 극력 반발했다. 3월 22일,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롄잔은 저격 사건에 대한 4가지 의혹을 제기했다.
  • 총통을 저격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저격했다고 밝히는 사람이 없다.
  • 천수이볜과 뤼슈롄은 경호상 같은 차량에 탑승해서는 안됐지만 같은 차량에 탑승했다. 정부는 이것이 경호상의 실수라고 답변했으나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다.
  • 정부는 천수이볜을 가장 가깝다고 판단된 치메이 병원에 후송했으나 치메이 병원은 사고 현장에서 6.5킬로미터 떨어진데 반면 불과 3.5킬로미터 거리에 청궁대학병원이 있었다. 이는 민진당 지지자들이 많은 치메이 병원에서 정보조작을 하려는 정황증거다.
  • 천수이볜은 방탄복을 입지 않았다. 이는 선거 유세 중에 이례적인 일이다.
한편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은 암살 증거로 발표된 사진에서 천수이볜의 피라고 지목된 부분이 사실 차량을 붙잡기 위한 붉은 선이라고 보도하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다. 여기에 33만표나 되는 무효표가 집계되면서[2] 민진당이 재선을 위해 자작극을 벌였다는 의혹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국민당 지지자들은 선관위 건물에 쳐들어가는 한편 연일 총통 선거 무효를 외치는 시위를 벌였으며 롄잔은 투표용지 재검표, 총통 피격사건 조사를 위한 수사전담반 구성, 정치적 위기 해소를 위한 여야 영수회담을 요구했다.
대학생들의 단식 시위까지 이어지자 천수이볜은 3월 23일, “1% 이내의 근소한 표차가 발생할 경우 재검표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하겠다”라면서 11대 총통선거에도 소급적용하기로 결정, 재검표 요구를 수용하였으며 총격사건 진상조사단을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롄잔 측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48시간 내에 재검표 실시, 24시간 내 3자 여야회담 수용을 요구했다. 감식 전문가들은 1차 조사 결과 자작극이 아니라고 판명했다.
민진당 측은 목숨을 걸고 암살 자작극을 벌이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맞섰고 총통부 측은 탄환이 한치만 더 깊게 들어갔어도 천수이볜이 사망했을 것이라고 밝혔으나 중국 국민당 소속 랴오펑더(廖風德) 의장은 천수이볜이 입법을 핑계로 시간끌기를 한다고 비난했고 이에 민진당 의원들은 크게 반발했다. 한편 천수이볜은 3월 29일 현충원 참배를 통해 저격 이후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5월 20일 취임식을 예정대로 하겠다고 밝혔다.

4. 대만 선거 소요


결국 이 사건은 11대 총통 선거가 무효라고 주장하는 대형 소요로 발전했다. 3월 29일, 국민당, 친민당으로 구성된 야당 연합은 총통 당선무효 소송을 냈고 4월 2일 대만 고등법원이 심리에 들어갔다. 야당 연합은 비용 절감을 이유로 천수이볜 표와 전체 무효표 재검표를 주장했고, 민진당 측은 모든 표의 재검표를 주장했다. 롄잔과 그의 러닝메이트 쑹추위는 4월 5일, 단식 투쟁 중인 대학생들을 만나 4월 10일까지 천수이볜이 적절한 대답을 내놓지 않으면 시위대를 몰고 총통부에 쳐들어가겠다고 발언했다가 단식 투쟁 중이던 여대생으로부터 "거친 발언을 삼가고 야당도 재검표 결과를 수용해야 할 것."이라고 반박을 듣는 등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4월 9일, 대만계 미국인 전문가 리창위 박사가 타이완에 입국하여 천수이볜을 만나고 사건 조사에 들어갔다. 야당 연합은 천수이볜의 무개차를 일반인이 운전했다는 점, 총에 맞았으면 하체로 피가 흘렀어야 정상인데 경찰이 천수이볜의 하의를 증거로 확보하지 않은 점, 천수이볜이 점퍼를 입고 찍은 엑스레이 사진에 총알만 나타나고 지퍼가 나타나지 않은 점, 천수이볜의 점퍼가 사건 이후 새것에서 헌것으로 교체된 것 같다는 점을 정리하여 리창위 박사에게 전달했다. 리창위 박사는 케네디 암살 사건만큼이나 어려운 사건이고 이상한 정황이 있으나 일단은 자작극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4월 10일, 천수이볜을 규탄하는 대형 시위가 열려 140여명이 부상당했다. 이 시위에 스하이방을 비롯, 일부 삼합회 조직원들이 참가한게 밝혀져 대만 경찰이 삼합회의 조직적 개입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자 삼합회는 경찰이 외성인본성인의 분열을 조장한다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5월 19일 무죄 호소 시위를(...) 벌였다.
4월 13일에는 뤼슈롄 부총통이 싱가포르 국제관계 연구센터 및 국방 전략 싱크탱크 학자들과의 만남에서 여러 정황 증거를 볼 때 암살 대상이 천수이볜이 아니라 자신이라고 주장하며 "가장 유감스러운 건 피격당한 사실보다 진상이 밝혀지기도 전에 '자작극'이라는 의혹이 나를 두번 암살한 것"이라고 밝혔다. 5월 2일에는 거짓으로 자작극을 벌인 천수이볜과 뤼슈롄을 진짜로 암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업인이 체포되기도 했다.
8월 29일, 리창위 박사는 총격이 천수이볜을 암살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고 결론 내리고 133쪽에 달하는 조사 보고서를 뉴욕의 대만 대표부에 전달했다. 하지만 리창위 박사는 천수이볜의 자작극이라는 국민당의 주장에 대해서는 배후를 밝힐 수는 없었다며 부인했다.
2005년 1월 18일, 국민당과 친민당으로 구성된 3.19 총격 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는 천수이볜의 자작극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나 국민당 지도부는 이에 대한 신중한 반응을 보였고 천수이볜 총통 측은 총통부 비서장 쑤전창을 통해 비전문가들의 망상이라고 이를 묵살했다. 2005년 6월에는 무소속 입법위원 리아오가 천수이볜 저격이 자작극이라고 분석한 CIA 문서를 입수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천수이볜은 CIA 문서가 맞는지부터가 궁금하다고 대응했다.

5. 여담


  • 한편 이 사건이 2000년 일본 작가 토모노 로가 집필한 <천수이볜 암살>에서 묘사된 정황과 매우 흡사하여 예언설, 조작설을 부추겼다.
  • 친중 성향의 성룡은 이 사건이 하늘도 웃지 않고는 못 배길 코미디라고 논평하며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
  • 2009년에는 이 사건을 묘사한 영화 탄.도 (彈.道, Ballistic)가 대만에서 개봉됐다.

[1] 북양정부, 국민정부 시절 제외.[2] 천수이볜은 이에 대해 지지자의 칸을 정확히 표기하지 않은 표들을 무효표 처리한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