쑹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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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楚瑜(송초유) / James Soong Chu-yu[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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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만의 정치인. 친민당의 주석 역할을 하고 있다. 원래는 중국 국민당 소속이었다. 객가(하카)인 출신이고, 중국 대륙 출신의 외성인이다. 출생지는 '''자신 집안을 대만으로 쫓아낸 자와 같은''' 후난성 샹탄 현. 국부천대 시기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가오슝에 왔으며 이후 타이베이에 정착하였다. 그의 어린 시절 등을 나타낸 유튜브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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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민국 연호 53년) 국립정치대학 졸업 사진)
1974년 미국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정치철학을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모교인 국립정치대학 산하 국제관계연구중심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하다가 정계에 입문했다. 어느 총통 못지 않게 잘생긴 편.
2. 초기 정치활동
쑹추위의 초기 정치 활동은 대만 정부의 대언론, 홍보 기능을 담당하는 행정원 신문국(新聞局. 한국의 구(舊) 공보처, 국정홍보원에 해당)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특히 장징궈 총통의 집권 전반기에 해당하는 1979~1984년에는 정부 대변인격인 신문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79년 1월, 중화민국-미국 단교가 있자 중화민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담화를 하였는데 이때 미남 대변인으로 전국적인 인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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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원 신문국장 재직 시절. 지금은 70대의 정계 노장(老將)이지만 이 때는 엄청 새파랗게 젊은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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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징궈 총통과 함께.
그러나 이 시기에 메이리다오 사건 때 정부의 입장을 옹호하고 민주, 진보 성향 출판물들의 발행을 상당수 중단시키고, 객가어 등 대만 현지 본성인들이 사용하는 토착 언어의 언론매체 사용을 금지하는 등 언론탄압을 가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는 외성인 출신으로서 쑹추위의 한계였다고 할 수 있으며, 훗날 본성인 출신으로 총통직에 오른 리덩후이가 쑹추위의 정치적 성장을 막으려 했던 배경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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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 대만 성장 후보 유세 모습. 참고로 1994년 '''12월 3일'''에 찍은 사진으로 외투가 일절 안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만큼 따뜻한 현지의 기후를 짐작할 수 있다.[3]
1988년부터는 중국 국민당의 중앙 상무위원이 되었고, 이듬해인 1989년부터 1993년까지 당 비서장을 역임하여 국민당 내에서도 세력을 강화해 나갔다. 1994년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타이완 성 민선 성장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리덩후이 총통은 1996년에 통치 효율 증진을 위한다는 이유로 국민당 주석 자격으로 당시 최대 야당이었던 민주진보당과 합의하여 쑹추위 성장의 임기가 만료되는 1998년부터 타이완 성의 성 정부 기능을 정지하기로 했다. 쑹추위는 이를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흔드려는 행위로 해석했다. 타이완 성장이었을 때 쑹추위의 시정에 대한 만족도가 90%를 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발하는 의미로 쑹추위는 1996년 12월 31일에 타이완 성장 사직서를 리덩후이에게 제출했지만 리덩후이는 이를 반려했다. 쑹추위는 결국 임기가 끝나는 1998년까지 타이완 성장으로 재직했지만, 이 사건은 리덩후이와 쑹추위가 반목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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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 소속으로 타이완 성장을 하던 시절 모습. 리덩후이와 함께
3. 2000년 이후
장징궈와 리덩후이 시절, 중국 국민당의 차세대 주자 중 하나였으나, 중국 국민당의 '''실권'''을 가지고 있던 롄잔과 끝끝내 반목하면서 2000년에 무소속으로 대만 총통 선거에 나와버린다. 선거를 통해 타이완 성 성장에 당선될 정도로 대중적인 명망이 있었던 쑹추위가 국민당에서 가장 경쟁력이 높다는 평가가 중론이었지만[4] 결국 당 주석인 리덩후이 총통이 부총통이었던 롄잔을 적극 지지하면서 갈등이 폭발해버린 것.
1999년 당시 대선 출마선언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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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 시절의 라이벌 롄잔(오른쪽)과 함께
당시 롄잔은 현직 부총통이자 국민당 부주석으로서 정부, 국민당 내에서 리덩후이의 뒤를 잇는 2인자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외견상 리덩후이가 롄잔을 지지하고 나선 것도 이를 명분으로 했다. 그러나 애초에 선거에서 경쟁력이 높은 쑹추위를 외면하고, 선거 경험이라고는 1996년 총통 선거에서 러닝메이트로 나선 것이 전부인 롄잔을 후보로 결정한 것은 본성인이자, 독립파인 천수이볜의 승리를 은연중에 바랬기 때문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럴 경우 당연히 득표 경쟁력이 높은 쑹추위가 독자 출마를 하고, 친국민당 표가 갈려서 천수이볜에게 유리해지기 때문. 뿐만 아니라 '''아예 민진당과의 연합 공천을 염두하고 있다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리덩후이의 행보가 의심스러운 점이 컸다. 당시 국내 언론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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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파전으로 진행되어버린 선거를 다룬 타임지.
결국 중국 국민당의 롄잔과 표가 갈려서 민진당의 천수이볜이 당선되고야 말았다. 2000년 대만 총통 선거 득표율 순위 : 1위 천수이볜(39.3%), 2위 쑹추위(36.8%), 3위 롄잔(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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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선거 당시, 롄잔과의 후보 단일화 발표 모습
2004년에는 롄잔과 그나마 화해했는지 롄잔이 총통, 쑹추위가 부총통 후보로 나왔으나 천수이볜 암살 미수 사건 때문에 또 떨어졌다. 2005년 타이베이 시장 후보로 나갔는데 친민당이 타이베이 시당 조직이 없어가지고 무소속으로 나가는 웃기는 사태가 벌어졌다.(...) 탈당을 한 게 아니라 타이베이 시당이 없었기때문에 당적을 가졌지만 법적으로 무소속 처리된 것. 득표율은 4%밖에 못받았다. 당시 타이베이 시장에 당선된 사람은 하오룽빈.
친민당 당수로 재직하던 2005년에는 후진타오 중화인민공화국 주석과 양안회담을 갖기도 했다. 그렇게 잊혀져 있는 사이에 쑹추위의 지지자는 다 떨어져나가버렸다. 안습. 2012년 총통선거에 다시 나왔으나 '''3%도 얻지 못하는''' 안습한 신세로 전락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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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시진핑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과 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4. 2016년 총통 선거 출마
- 제14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 항목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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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6일, 2016년 1월 16일로 예정된 차기 총통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이미 70세를 넘어선 고령임을 고려할 때, 쑹추위에게는 이번 선거가 생애 마지막 대권 도전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2012년 선거의 경우, 마잉주 총통이 현직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재선에 도전한 상황이어서 정치, 이념상으로 쑹추위와 유사한 국민당 지지층을 끌어오는 데 어려움이 컸고, 결국 득표율이 10%에도 미달하는 대실패로 끝났다. 반면 이번 선거에서는 국민당 훙슈주 후보가 당 내부에서조차 지지가 확고하지 못한 상태에서, 쑹추위가 전통적인 국민당 지지세력에게 대안으로 인정받을 여지가 커져 4년 전보다는 선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요컨대 참패했던 2012년보다는 근소하게 2위를 차지했던 2000년 선거와 더 비슷한 상황이라는 평가.
대선 출마선언을 하면서 공개한 쑹추위의 제14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 텔레비전 광고. 자기한테 날아오는 흑색선전(진흙) 속에서도 새싹(당선)을 피워내겠다는 의미로 촬영했고, 이 광고가 전파를 타면서 대만의 주요 TV에서 엄청난 화제가 되어 2015년 8월 10일 현재 실제 광고는 한번 내보냈는데 언론들에서 줄줄이 재방송되고 있다.(...) 2탄은 다른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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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추위의 대선 출마로 대만 대선판은 차이잉원의 독주에서 예측불허의 3파전이 되었다. 일단 차이잉원이 앞서는 모양새긴 하나 차이잉원의 지지율도 상당부분 쑹추위에 잠식당하여 민진당 측에서도 상당히 경계하는 모양새이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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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출마를 선언한 직후에 대만의 유력신문 <연합보>(聯合報)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쑹추위는 24%의 선호도를 얻어 민진당의 차이잉원(36%)보다는 낮지만, 국민당의 훙슈주(17%)보다는 높은 2위로 나타났다. 2000년과 2012년처럼 완주할지, 아니면 2004년처럼 러닝메이트(부총통) 자리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국민당과 단일화를 선택할지는 두고 볼일. 친민당과 중국 국민당은 일단은 단일화를 시도하는 모양새이다. 주리룬 국민당 대표가 회담을 제안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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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2015년 8월 26일 나온 대만의 여론조사에서 쑹추위와 훙슈주를 합친 것보다도 차이잉원의 지지율이 다시 높아졌다.기사 이렇게 되면 쑹추위 후보는 괜히 단일화에 목숨을 걸 이유가 없이 2위를 굳히는 것만으로 자기의 존재감을 어필할 수 있게 된다! 중국 국민당의 고민이 깊어질듯.
주리룬 후보로 국민당 후보가 바뀐 상태에서 쑹추위 후보측의 반응은 "단일화 없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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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쉬신잉(徐欣瑩)을 러닝메이트, 즉 부총통 후보로 지명했다. 쉬신잉은 2012년 국민당 후보로 신주(新竹)에서 입법위원으로 출마, 당선되었으나 2015년 초 탈당하여 군소정당인 민국당(民國黨)의 주석을 맡고 있다. 이로써 2016년 대만 총통선거는 3대 주요 후보가 각자 총통-부총통 후보를 남녀 후보가 분담하는 독특한 형태가 되었다.
2015년 12월 30일 PTS에서 쑹추위의 정치인생을 알려주는 보도를 하였다.
2015년 12월 31일 내놓은 홍보용 노래. 쑹추위 후보도 '''한 마약 하셨다'''(...) 자기 손자를 출몰시켰다고.
당연히 뉴스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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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종반의 개표상황. 2016년 1월 16일의 개표 결과, 출마 직후의 지지율인 20%대 지지율이 점차 떨어지면서, 결국 12.8%에서 선거 종료. 실제로는 12~13%의 득표율을 보였다. 다만 차이잉원 후보가 50%를 넘는 득표율로 승리하면서 표를 갈라먹어서 패배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있게 됐다.
쑹추위 후보 선거 패배 연설. 위쪽은 자막이 달린 주요 축약본이고 아래쪽은 전문이다.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쑹추위 후보는 크게 좌절하지 않는 모습이다. 주리룬 후보는 선거 패배 연설이 무슨 장송곡 하는 수준이었는데(...) 쑹추위 후보는 어차피 낙선을 예상했던 듯. 민국당이 총선에서 1석도 얻지 못했음에도 쉬신잉 부총통 후보(민국당 대표) 역시 크게 좌절하지 않고 연설을 이어간다.
쑹추위의 12.8%라는 수치는 아주 망한 것은 아니다. 쑹추위는 이미 1월 16일 투표 시간 중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을 타이완 성 성장 시절의 사진으로 교체하여 이미 낙선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친민당이 입법원 선거에서 비례대표만 3석 확보하고 타이베이시 지역구에서 중국 국민당 후보에 밀려 1석도 얻지 못한 것(친민당 후보가 국민당 후보와 접전 끝에 석패)이 뼈아픈 손실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귤영(橘營)이라 불리는 중도주의 정당들을 흡수 합병한 뒤에 정계를 은퇴할 것 같다.
5. 2016년 선거 이후
한동안 정치를 떠나 있다가(입법원 개원일인 2월 1일에도 별다른 언급 없이 쉬었다고 한다. 물론 쑹추위는 입법위원이 아니다.) 2016년 2월 15일, 2016년 타이난 지진의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위령제에 참석하였다. 기사
3월 9일 차이잉원 차기 총통과 만나 1시간 이상 대화를 가졌다. 이를 두고 양안대화에 적극적이고, 중국 정부당국과도 다수의 회담 경험이 있었던 쑹추위를 해협교류기금회[6] 이사장으로 기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2016년 8월 31일 차이잉원 정부는 해기회 회장에 톈훙마오(田弘茂) 전 외교부장을 기용했다. 이전부터 차이잉원 총통이 쑹추위를 내정하려 했으나, 본인이 고령 등의 이유를 내세워 끝내 사양한 것으로 전해졌다.
11월 페루 리마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에 차이잉원 총통이 쑹추위를 대만 대표로 파견할 계획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나 중국이 반대 입장을 나타내고 있어 성사 가능성은 높지 않은 편. 중국이 내세운 명분은 "대만측의 대표는 경제 담당 관료만을 인정하는 것이 그동안 APEC에서의 관례"지만, 실상은 차이잉원 정부가 중국의 92공식 인정 요구를 거부하는 데 따른 불만을 반영한 것으로 평가된다.[7] 이미 중국 정부 지도층과도 수차례 회담을 가졌던 친중파 쑹추위의 파견조차 거부할 정도로, 중국이 차이잉원 정부의 양안 정책에 반감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
2016년 10월 6일 공식적으로 차이잉원 총통이 쑹추위를 특사로 지명했다. 기사 중국의 반응은 여전히 탐탁지 않다. 우여곡절 끝에 APEC 정상회담에 대만 특사 자격으로 참가하기는 했는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공식적으로 1분밖에 대화를 하지 못해(비공식 대화는 10분 정도) 논란이 되기도 했다. 기사
2017년 APEC 정상회의 때에도 차이잉원이 다시한번 쑹추위를 특사로 파견하였다. 2016년과 달리 2017년에는 쑹추위도 시진핑과 대화 시간도 많이 가졌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한테는 차이잉원의 친서를 전달하는 등 외교적 활동의 반경이 넓어졌다.
2019년에 쑹추위는 이미 초고령이라, 2018년 12월 커원저를 친민당에 영입하거나 커원저가 대선 출마할 경우 지지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반면 민국당의 쉬신잉은 이런 쑹추위의 언급에 반발했다. 민국당도 커원저를 지지할 의사는 있지만 민국당한테 사전에 언질을 주지 않았다는게 그 이유.
결국 선거를 불과 2개월 앞둔 2019년 11월 중순, 총통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그러나 10% 이상을 득표했던 4년 전과는 달리, 한자리수 득표율에 머물렀다. 이번에야말로 마지막 출마가 될 듯.
6.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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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心心念念在傳薪-宋楚瑜對青年朋友的談話(한결같이 전해가다 - 쑹추위 청년 친구들에 대한 담화) : 1989년에 출간한 책인데, 쑹추위 단독으로 쓴 책은 이 책이 마지막이다.
- 寧為劉銘傳:宋楚瑜的僕人領導哲學(리우밍촨[8] 이 될지언정: 쑹추위의 서번트 리더십 철학) : 쑹추위 혼자서 쓴 책은 아니고 팡펑청(方鵬程)이라는 사람과 공저한 책이다. 2006년 출간.
7. 기타
- 현지 언론에서 그와 정치인생이 비슷한 이인제와 비교하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 마오쩌둥과 쑹추위는 둘 다 고향이 후난성 샹탄현이라서, 또는 친민당의 만년 당대표라서 그런지 이런 괴악한 짤방들이 있다.
- 그는 외성인 출신 정치인 중에서 최초로 대만어를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대만 독립을 추구하는 범록계열 정치인뿐만 아니라 양안통일을 강조하는 범람계열 정치인들도 유세와 같이 대중과 접촉하는 자리에서는 대만어 한 두마디 정도 해주는 경우가 많은데 그 시초를 쑹추위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1994년 민선 타이완 성 성장 선거 시절에도 대만어와 객가어를 일부 사용했다고 한다.
8. 선거 이력
[1] 보통은 James Soong으로 표기한다. 중국어권에서는 영문으로 자기 이름을 표기할 때 영어 이름 + 성 + 중국어 이름 식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주로 서양 국가의 오랜 통치를 받았던 홍콩과 마카오에서 서양식 이름, 중국식 본명을 동시에 쓰려다 보니 생긴 성명 표기 방식이지만 인근 중화권의 대만이나 싱가포르에서도 꽤 많이 쓰인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흔하지 않은 성명 표기 방식이다. 한국인과 일본인들은 보통 본래 자기 이름에다가 영어 이름까지 같이 쓸 경우 '한국어/일본어 이름 + 영어 이름 + 성'이나 '영어 이름 + 한국어/일본어 이름 + 성'처럼 쓰지 저렇게 영어 이름과 본래 이름 사이에 성을 집어넣는 경우는 극히 희박하다. 그냥 영어 이름 빼고 '성 + 한국어/일본어 이름'으로 표기하는 경우는 있어도... [2] 현재 중국 대륙에는 샹탄현과 샹탄시 모두 있지만 그의 출생지는 샹탄시 영역이다.[3] 실제 대만은 겨울에도 평균기온이 20도 남짓이라 한국으로 치면 봄 날씨이며 당연히 여름에는 대구보다 '''훨씬 찐다.''' [4] 타이완 성 항목에도 나오지만, 타이완 성은 타이베이, 가오슝, 타이난, 타이중 등의 직할시와 진먼, 마쭈 등 푸젠성의 중화민국령 도서지역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을 모두 포함하는 사실상 대만 전국 단위다. 때문에 이러한 규모의 선거에서 당선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대중적 지지, 명성을 누리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게다가 쑹추위가 당선될 당시 타이완 성은 타이베이와 가오슝, 그것도 '일부' 지역만 직할시로 떨어져나가있었고 전국의 97%가 타이완 성이었다!!![5] 현직 총통 마잉주와 민진당의 새로운 빛으로 이름을 알리던 차이잉원의 2파전 구도였다. 결과는 마잉주의 승리.[6] 약칭 해기회. 대만이 중국과의 양안 대화를 위해 1990년대 초 설립한 반관반민 성격의 재단. 마잉주 정부 시절의 대3통 실현, ECFA 등에 관한 협상도 담당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대한적십자사에 해당한다. 남북 적십자 회담이 남북 정부간 회담으로 처리되니까. 애당초 해협회 - 해기회 양안회담이 남북적십자회담에서 협상방식을 따 왔다.[7] 중국과 협조적이었던 전임 마잉주 정부는 APEC 대표로 롄잔, 샤오완창 전 부총통을 보냈고, 중국은 이를 수용한 바 있었다.[8] 청나라 말기 장수이다.[9] 원본은 세계인민이 단결, 궐기하여 미국 제국주의와 소련 수정주의 및 각국의 반동파를 타도하자고 호소하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