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성인

 




1. 개요
2. 상세
3. '외성인' 용어 문제
4. 유명한 외성인


1. 개요



대만인 중 1945년 타이완이 중화민국에 반환 이후, 1949년 국부천대 기간 동안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을 의미하며 중공출신의 대만인도 포함하는것으로 보인다.

2. 상세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포로로, 포로 교환 때 본국 송환 대신 대만행을 택한 경우도 있다. 그리고 중화민국 영토 중 과거 '일본령 대만'에 속하지 않은 지역(대표적으로 진먼, 마쭈)의 토박이들은 '이주'한 것이 아니라서 좀 애매하긴 하지만 일단은 외성인으로 분류한다.
대만 인구의 14%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로 호적별 인구통계가 나오지 않아 오늘날 정확한 본성인, 외성인 비율을 따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외성인이나 본성인이나 모두 중국대륙에서 기원한 한족이다. 외성인=한족, 본성인=대만 원주민(=대만인)으로 잘못 알고 개념을 혼동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그래서 이걸 혼동하면 대만을 '소수의 한족이 다수의 원주민을 지배하는 사회' 로 착각하기 쉽다.[1] 엄밀히 말하면 '대만 원주민'(臺灣原住民, Taiwanese Aborigines)은 '한족'인 본성인과 구별되며, 이들은 본래 대만에서 '기원'한 민족으로 한족이 아니다.
표준중국어를 모어로 한다. 물론 출신 지역에 따라 상해어라든지 광동어라든지 모어가 따로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있기에 중국인으로서 표준중국어를 모어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외성인들의 2, 3세들이 대만에서 태어나고 자라나다 보니 푸젠 출신 외성인[2]들을 제외하고는 노년층이 아닌 외성인들이 표준중국어뿐만 아니라 원래 출신지 방언까지 능통한 경우는 별로 없고, 객가어를 쓰는 객가인들을 제외하고는 대만어를 더 잘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타이베이 등 타이완 섬 북부 지방에서는 수도권이면서 외성인의 비율이 남부 지방보다 높고, 모든 공적인 생활을 표준중국어로 하기 때문에 본성인과 외성인을 가리지 않고 일상어로 거의 표준중국어를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본성인이면서도 대만어는 서툰 젊은 세대도 꽤 있다. 그리고 외성인 중 극소수는 한족이 아닌 소수민족이다. 하지만 이 정도 상황이면 거의 동화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중화민국의 실권은 대부분 이쪽이 잡아 왔다. 1947년의 2.28 사건, 그리고 1949년 이후 본토수복을 명분으로 본성인들을 탄압하고 중국 국민당이 이른바 '3당 훈정'을 실행하면서 이쪽 외성인들만 승진할 수 있는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3당 훈정'은 아주 강력한 총통제와 3개 정당의 연립내각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형식적인 헌정과 실질적인 훈정을 동시에 추구하는 1946년 체제를 가리키는 낱말이다. 1946년에 장제스는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을 VIP처럼 모셔와서 중앙정부의 장차관으로 벼락출세를 보장했는데, 3당 훈정은 국민정부의 우익세력이 반공을 내세워 똘똘 뭉친 블록 정치였다.
또 공무원 선발은 중국 전체를 놓고 출신 지역별로 안배했기 때문에 인구가 적은 외성인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 본/외성인 간 충돌이 매우 잦았다. 그리고 외성인들이 실권을 잡으면서 반산(半山, 대만 출신이면서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국부천대 시기에 대만으로 돌아온 사람들)들도 한 자리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대만 출신이기에 대만을 잘 알면서, 외성인들에게는 '믿을 만한 사람들'로 인식되었기 때문. 심지어 학교에서도 반장은 무조건 외성인 시켜줬다고 한다.(...)
요즘에야 본외성인 구분없는 통혼 혼혈도 잦지만 아직까지는 남부는 본성인 비율이 높고 북부는 외성인 비율이 높다[3].
또 1990년대 이후 중국 대륙이나 동남아에서 온 사람들이 30만 명 가량 되는데, 이들을 "신세대 외성인"이라 하기도 한다. 2015년 들어서 이 신세대 외성인의 숫자는 50만명이 조금 안 되는 수준. 국제결혼으로 대만으로 간 중국인 여성들, 중국 민주화 인사/파룬궁 등 난민이나 취업하러 왔다가 눌러산(...) 케이스들이 합쳐진 숫자다.
외성인들을 출신 지역으로 분류했을 때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5대 성은 푸젠, 광둥, 산둥, 저장, 장쑤 성으로 이 5개 성 지역 출신들의 수를 모두 합하면 외성인의 절반을 조금 넘는다. 푸젠, 광둥, 저장은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산둥, 장쑤 성은 배를 타고 오기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외성인들은 대만의 수도권에 해당하는 북부지역인 타이베이, 신베이, 지룽, 타오위안에 주로 살고 있다. 이 사람들이 몰려 사는 집단 주거지를 권촌(眷村, Military dependents' village)이라고 부르는데, 1949년부터 60년대 말에 걸쳐 외성인들의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당 정부가 만든 것이다. 권촌은 대부분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주거지, 특히 적산가옥을 개조한 것으로, 어느 정도 폐쇄된 사회로 자신들 특유의 문화가 있었지만, 요즘에는 권촌의 상당수가 인구 감소를 나타내 그 재개발 여부가 문제가 되고 있다.
외성인들은 중국 국민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하며, 자신들 중화민국이야말로 중국 대륙을 다시 통일할 자격이 있는 국가라 생각한다. 그리고 외성인 3, 4세쯤 되는 젊은 세대들은 본성인들과 별반 차이 없는 정체성을 갖는 경우도 있다. 조상들이 살았던 중국 대륙보다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대만에 애착이 갈 테니까. 소수지만 대만 독립파도 있다. 차이잉원 정권의 첫 행정원장린취안이 외성인 2세였다.
외성인들은 대만의 문화 자체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앞서 언급한 표준중국어 외에도 외성인들로 인해 중국 본토의 각지역 문화가 골고루 대만으로 유입되고, 이것이 대만 섬 고유의 문화와 융합하면서 중국 본토와는 또 다른 대만의 문화로 변화했다.

3. '외성인' 용어 문제


타이완 독립운동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외성인'이라는 단어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있다. 외성인이라는 단어 자체에 대륙과 대만 양안이 같은 나라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 외성인에 대한 시각도 "중국 공산당의 반란을 피해 대만으로 피난 온 동포"보다는 "'이웃나라'의 전란을 피해 우리나라로 망명온 이민자"라고 보는 경향이 강하며, 전자는 같은 국가 내의 움직임(move)이라면 후자는 타국으로의 이민(immigration)이라고 본다. 좀 더 나아가 대만 출신과 대륙 출신을 다른 민족으로 바라보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명칭도 '외성인'보다는 새로운 이민자라는 뜻의 '신주민'(新住民, newcomers)이라고 부른다. 당연히 외성인들은 타자화라며 이를 싫어한다.

4. 유명한 외성인


타이완 섬 등에서 태어난 2, 3세 포함.
  • 장제스, 장징궈 부자 (저장성)
  • 하오보춘, 하오룽빈 부자 (장쑤성)
  • 마잉주 (후난성)
  • 등려군 (산둥성)
  • 에드워드 양 (상하이)
  • 궈타이밍 (산시성)
  • 왕조현 (안후이성)
  • 임청하 (산둥성)
  • 주리룬 (저장성)
  • 훙슈주 (저장성)
  • 정난룽 (푸젠성)[4]
  • 허우샤오셴 (광둥성)
  • 쑹추위 (후난성)
  • 쑤치 (저장성)
  • 린취안 (장쑤성)[5]
  • 한궈위 (허난성)[6]
  • 루슈옌 (산둥성)
  • 추이 (푸젠성)
  • 딩자오중 (산둥성)[7]

[1] 다만 본성인 기준을 넓게 잡으면 원주민들도 포함된다. 그래서 명확히 구별하려면 한족계 본성인이라 한다.[2] 민남어를 쓰는 지역에서 이주했기 때문에 대만어와 별반 다르지 않은 방언이 '출신지 방언'인 셈이 된다.[3] 사실 남부와 북부라기보다는 도시와 시골로 보는 게 더 잘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중부 지방 시골이 비율상 외성인이 적은 편이다. 구 가오슝 현 지역을 제외한 가오슝 시의 경우 1990년대 통계에 따르면 외성인:본성인 비율은 전국 평균과 별 차이 없다. 가오슝 현도 큰 차이는 없다. 타이베이만 압도적으로 전국 평균에 비해 외성인 비율이 높다. 외성인들이 대만에 올 때 소수는 비행기를 탔겠지만 절대 다수는 배로 왔고 도착한 곳은 지룽 아니면 가오슝였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가오슝도 평균 이상은 됐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현재는 본적 등록이 없어져서 이런 통계가 나오지 않는다.[4] 본인은 대만인이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유지하고 있었으나 아버지가 본토 출신이라는 이유로 본성인에게 차별을 당했다. 항목 참조.[5] 차이잉원 정권의 첫 행정원장[6] 사상 첫 중국 국민당소속 외성인 가오슝 직할시장. 타이완성 예하일 때는 국민당 1당 독재니 주로 국민당이며 그 중 외성인도 당연히 있다.[7] 1976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부모가 미국 체류 중에 그를 낳아서 속지주의에 의해 국적은 미국이고, 출생 후 본적지인 산둥성으로 돌아와 어린 시절을 보냈고 국부천대 시기 가족을 따라 대만에 와서 성장했고, 성인이 된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