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금봉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한국 최초의 여성 치과의사이다.
2. 생애
최금봉은 1896년 5월 6일 경기도 인천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인천 영화여학교[1] 와 평안남도 진남포시 삼숭여학교에서 공부한 뒤 1914년 이화학당 중등과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그녀는 1918년 삼숭소학교 교사에 부임했다. 그녀는 삼숭소학교에서 황에스더와 김경희가 조직한 비밀결사단체 ‘송죽회’[2] 에 가입해 항일독립의식 고취와 독립지사 가족 후원활동을 펼쳤으며, 송죽회가 지방조직을 결성할 때 남포지역 책임자로 선임되어 조직 확대에 힘썼다.
이후 1919년 비밀결사단체 대한애국부인회에 가입한 최금봉은 군자금을 모집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1920년 진남포 신흥리교회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21년 2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22년에 가석방되었다.
최금봉은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가 치의학을 공부했다. 1928년 동경여자치과의학전문대학 본과를 졸업한 그녀는 1929년 전공과 역시 졸업한 뒤 귀국하여 진남포로 돌아왔다. 이후 1931년 3월 2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한국 여성이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한 것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녀는 진남포에서 남포치과의원을 개업한 뒤 1931년 9월 여성동우회(女性同友會) 진남포지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어 여성계를 규합,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진남포 엡웻청년회 회장(1932년), 진남포 삼숭학교 동창회장 및 삼숭유치원 원장(1935년) 등을 역임하였다.
1938년, 최금봉은 42세의 늦은 나이에 결혼했고, 남편을 따라 경상북도 안동으로 이주해 읍내에 삼일치과병원을 개원해 활동했으며, 진료와 함께 지역사회 아동·여성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남편이 1945년 초에 사망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녀는 훗날 이에 대해 “내 일신과 내 가정을 생각하기보다 나라를 위해서만 몸을 바치라는 하늘의 명령이었다."고 밝혔다.
8.15 광복 후, 최금봉은 대한애국부인회 안동군 지부장을 맡았으며, 광복절 기념식 안동 대표로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도 했다. 또한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창설 선거에서 안동의원에 당선되어 정치활동에 나섰으며, 대한부인회 총본부 부회장(1948년), 국민회 안동군지부 부녀회장, 대한부인회 총본부 이사를 역임했다.
이후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가 치과를 개업한 뒤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무료 진료 봉사와 자원활동을 이어갔으며, 전재(戰災)부인회 상조회 부회장(1951년)을 역임했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돌아와 월계동에 삼일치과를 개원해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아동과 여성, 특히 윤락 여성을 구제하는 데 힘을 보탰다. 또한 1956년 서울시 치과의사회에서 총무를 맡았으며, 기독교여자절제회 서울시 회장(1956년), 종교교회 여선교회장(1965년), 인덕실업학교 이사, YMCA 할머니회 초대회장(1972년) 등을 역임하였다.
1967년 치과의사를 은퇴한 최금봉은 서대문구 갈현동에서 여생을 보내다 1983년 8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최금봉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