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고려)

 

1. 고려 중기의 문신
1.1. 생애
1.2. 가족관계
2. 고려 후기의 지방관
2.1. 생애


1. 고려 중기의 문신


崔奭
(? ~ ?)
고려의 문신. 자는 직재(直哉).

1.1. 생애


교주도동주(東州), 창원군 출신으로 개국공신 최준옹의 6세손이다. 이자연(고려)의 문생으로 문종 5년(1051) 4월 과거에 장원 급제한다. 이 때 이름은 최석(崔錫)인데 나중에 석(奭)으로 바꾼다. 장마가 내린 문종 14년(1060) 8월 종6품의 좌습유 관직에 있었음이 확인된다.
문종 29년(1075) 4월 도종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요나라에 다녀오고, 같은 해 12월에 전중감 지어사대사에 임명된다. 문종 31년(1077) 좌간의대부에 오르고, 이후 동지중추원사로 승진한다. 문종 34년(1080) 여진족 동번이 반란을 일으키자 판행영병마사 문정(당시 중서시랑평장사) 휘하의 병마부사에 임명된다. 병마부사 염한, 이위 등과 평안도 정주(定州)에 가서 반란을 진압하고, 정향이 가득한 50냥 은합을 상으로 받는다.
이듬해 문종 35년(1081) 이부상서 참지정사에 오른다. 최석이 이부상서를 지낼 때, 부모가 가까운 친족인 노준이 진사시에 합격한다. 최석은 법률에 따라 노준을 등용하지 말 것을 문종에게 간했는데, 문종은 "인재를 뽑아 쓸 때는 일반적인 방식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1]라며 임용을 허락했다. 그러나 문정이 최석의 의견을 거들며 관직의 등급을 낮춰서 임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므로 문종이 이에 따르게 한다.
문종 37년(1083) 1월 이정공과 함께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에 오른다. 최석은 전년 3월에 지공거가 되어 최연 등을 뽑았는데, 태학의 학생 전덕조 등이 밀봉된 시험지를 열어본 정황이 드러나 이 해 3월에 재시험을 치르게 된다. 과거 동기 박인량이 동지공거가 되어 음정 등이 급제한다.
선종 3년(1086) 과거 동기 김양감과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내고, 선종 4년(1088) 권판상서이부사가 더해진다. 최석은 선종 4년 3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재신 문하시랑평장사 김양감, 중서시랑평장사 유홍, 참지정사 최사량 등과 선종에게 정무를 보고한다. 같은 해 5월에는 춘추관의 감수국사를 겸하고, 9월에는 검교태보가 더해지며, 12월 수태위 판상서이부사 감수국사에 오른다. 최종 관직은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예부사였고, 죽은 뒤에 예숙(譽肅)의 시호가 내려진다.

1.2. 가족관계


  • 본인: 최석
    • 아들: 최유청
    • 며느리: 이씨
      • 손자: 최증[2]
    • 며느리: 동래군부인 정씨[5]
      • 손자: 최후
      • 손자: 최인
      • 손자: 최당
      • 손자: 종강[3]
      • 손자: 최선
      • 손자: 최양
      • 손자: 회옥[4]
      • 손녀: 동주 최씨
      • 손녀사위: 박돈문

2. 고려 후기의 지방관


崔碩
(? ~ ?)
충렬왕 시기의 인물로, 고려사 열전 양리(良吏)전에서 찾을 수 있다.

2.1. 생애


과거에 급제하고 승진을 거듭한다. 충렬왕 3년(1277)에는 기근이 든 탐라에 파견돼 백성들을 살핀다. 이후 전라도의 지사부 승평(昇平, 순천시)에 부사(府使)로 부임한다.
충렬왕 7년(1281) 임기가 끝나고 비서랑에 임명돼 개경으로 돌아가려는데, 고을 사람들이 관습에 따라 돌아가는 최석에게 말 8필을 골라 바친다. 최석은 웃으며 "말은 개경에 이를 정도만 되면 족한데, 어찌 고르려고 하겠나?"[6]라며 말을 다시 돌려보낸다. 최석은 말을 돌려받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나아가, "내가 당신들의 마을을 지킬 때 말이 망아지를 낳았길래 데려왔는데, 이는 나의 탐욕이었다. 당신들이 지금 받으려고 하지 않으니, 어찌 나의 탐욕을 알고도 사양하려고 하는 것인가?"[7]라며 받은 말에 망아지까지 더해 돌려준다.
이후 승평에서는 임기가 끝나 돌아가는 지방관에게 말을 바치는 폐단이 사라졌고, 승평 사람들은 최석을 기리는 송덕비를 세워 팔마비라 불렀다. 전라남도 순천시 영동 우리은행 앞 도로변에 위치한 순천 팔마비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됐다.

[1] 選用人才, 當不拘常扃.[2] 고려사 최유청 열전에서는 증(証), 최유청처정씨묘지명에서는 간(諫)이라고 한다.[3] 선종 승려.[4] 밀교 승려.[5] 정항의 장녀.[6] 馬能到京足矣. 何擇爲?[7] 吾守汝邑, 有馬生駒帶來, 是我之貪也. 汝今不受, 豈知我之貪而爲貌辭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