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

 


'''對 동번 진압 부대 판병마사'''
'''文正
문정'''

'''시호'''
'''정헌공(貞獻公)'''
'''작위'''
장연현 개국백(長淵縣 開國伯)
'''성씨'''
문(文)
'''이름'''
정(正)
'''출신지'''
고려국 서해도 옹진(瓮津) 장연현(長淵縣)
'''생몰연도'''
? ~ 1093.04
1. 개요
2. 일대기
2.1. 판병마사가 되다
2.2. 전투 이후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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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문관. 문종, 순종, 선종임금을 섬겼다. 평장사 재임 중 동여진과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한 전공을 세운 적이 있었다.

2. 일대기


여타 고려의 인물과 비슷하게 문정의 생애는 알기 힘들다. 고려사 문정 열전엔 문정이 서해도 장연현 사람이라고 나와있다. 장연현은 지금의 황해도 장연군으로, 문정은 당시 황해도 일대의 서리 가문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종 대, 문정은 과거시험을 치고 합격해 관직을 얻었다. 이후 계속 승진하여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1] - 병부시랑(兵部侍郞)[2]이 된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는지 계속 승진해 참지정사(叅知政事)[3] - 형부상서(刑部尙書)[4]가 되어 재상이 된다.

2.1. 판병마사가 되다


참지정사에서도 승진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5]가 되어 조정의 2인자가 되는데 성공했다. 평장사가 된 문정은 지속적인 동번(東藩)의 반란에 분노한 문종의 뜻을 받들어 여진족을 토벌하기로 한다.
'''고려 동번 진압 부대'''
'''행영판병마사(行營判兵馬事)'''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문정'''
'''행영병마사(行營兵馬事)'''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최석'''
'''병부상서(兵部尙書) 염한'''
'''행영병마부사(行營兵馬副事)'''
'''좌승선(左承宣) 이의'''[6]
'''휘하 장병'''
'''보병 & 기병 30,000명'''
문정은 3만 명의 보병과 기마병을 이끌고 정주로 진군했다. 문정은 정주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군대를 멈추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이는 훼이크로, 동번의 오해를 유도한 것이었다.
그날 밤 문정은 세 지휘관과 길을 나누어 재빠르게 진격해 들어갔고 이른 새벽녘 불시에 동번의 거점을 쳤다. 북소리와 함성 소리를 미친듯이 울려대자 당황한 동번은 제대로 된 반격을 가하지 못했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적군 392명의 수급을 베었고[7], 장수 39명을 생포했다. 동번이 남기고 간 무기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소와 말 100여 마리를 노획하는 한편 마을 10여 구역을 부수는데 성공했다.
개선 소식을 들은 문종은 매우 기뻐하며 다음과 같은 칙서를 보냈다.

'근래 변경에서 계속 안좋은 소식이 들려 밤낮으로 걱정했다. 지금 (省)이 주청(奏)한 것을 보니, 멋진 계획으로 융(戎)을 항복시켜 민해(民害)를 없애 짐(朕)이 동쪽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했다고 한다. 이는 오로지 그대들의 공이다!'

- 고려사 문정 열전 中. 문종의 칙서(勅書)이다.

당당하게 돌아온 문정은 100냥 가치가 나가는 약초가 가득 담긴 은합(銀盒)을 받았다.[8] 또한:
  • 공신호: 추충찬화탕구정새공신(推忠贊化蕩寇靜塞功臣)[9]
  • 문산계 품계: 특진(特進)[10]
  • 직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11] - 판상서예형부사(判尙書禮刑部事)[12]
  • 검교직: 검교사도(檢校司徒)[13]
  • 태자삼사: 태자태부(太子太傅)[14]
  • 훈위: 상주국(上柱國)[15]
  • 작위: 장연현 개국백(長淵縣 開國伯)[16]
를 받아 크게 승진하고 이성제후가 되었다.

2.2. 전투 이후


이후 문정은 농사철을 피해 흥왕사 건설을 늦추라며 조언을 했고, 근친혼을 한 부모를 가진 자식을 조정에 등용할 것인지에 대한 판결에 참여했다. 또한 과거를 주관하는 지공거가 되어 신진관료를 뽑기도 했다.
늙은 문정은 자신의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훗날의 십이공도 중 하나인 정헌공도(貞憲公徒)가 되었다.[17] 사직을 결심한 문정은 선종에게서 수태위(守太尉)[18] - 문하시중(門下侍中) 직을 받고 퇴직했다.
선종 재위 10년차인 1093년 4월 기유일에 사망했다. 정헌공(貞獻公) 시호를 받고 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3. 평가


과거로 들어온 신입 관료에서 참지정사를 거쳐 평장사까지 도달했고, 전투에서도 훌륭한 성과를 내어 백작에 봉해졌다. 마지막엔 제자들을 크게 키워 정헌공도로 이름을 남기니, 걸출했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1] 중서문하성 소속 정4품 직으로, 서열 8위.[2] 상서성 병부 소속 정4품 직으로, 병부 내 서열 3위이다.[3] 중서문하성 소속 종2품 직으로, 서열 3위.[4] 상서성 형부의 장관.[5] 중서문하성 소속 종2품 직. 중서문하성 내 서열 2위로 차관이다. 4등급이 있다.[6] 이자연(고려)의 아들.[7] 수급 392급을 얻었다고 한다.[8] 문정 휘하 세 지휘관은 50냥 가치의 은합을 받았다.[9] 정새공신호.[10] 정2품 품계.[11] 평장사엔 4등급이 있다. 중서시랑평장사 → 문하시랑평장사 →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가 있고 중서시랑평장사가 제일 낮다.[12] 상서성 예부 및 형부의 장관.[13] 검교는 명예직임을 나타낸다. 사도는 삼공 직 중 하나다.[14] 태자부에 속한 직위.[15] 1등급 훈위.[16] 고향인 장연현을 봉지로 받았다.[17] 최충의 문헌공도가 여기에 포함되있다.[18] 삼공 직 중 최고위 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