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림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내각총리, 정치국 상무위원, 평양시 책임비서 등을 지냈다. 현재 북한 외무성 제1부상 최선희의 양아버지다.
2. 생애
1930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나[1] 만경대혁명학원 1기생으로 입학했다. 6.25 전쟁 발발 후 혁명학원 동기들과 함께 최고사령부 호위총국 군관으로 입대하여 친위중대, 사단 문화지도원으로 복문했다. 종전 후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모스크바 대학에 유학해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혁명가 유자녀 교육기관인 만경대혁명학원에서 교육을 받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지만 혁명 2세대 출신으로 추정된다. 김정일과 무려 2군데나 동창인 금수저 출신. 여기에 모스크바 유학 경험으로 양형섭, 김영남 등 주요 엘리트들과도 두루 인맥이 있다.
귀국 후 평양의 공장에서 현장기사로 잠시 일했고, 간부양성 과정을 거쳐 1956년 조직지도부 책임지도원에 등용됨으로 경력을 시작하였고, 1967년 중앙위원회 부부장으로 승진, 갑산파 사건에 참여하여 김일성의 갑산파 숙청을 도왔다. 1970년 11월 중앙위원회 위원, 1971년 6월 중앙위원회 부장에 임명되는 등 전형적인 당관료의 경력을 걸었다.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 5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73년 주석부 책임서기에 임명됨으로 10년 동안 김일성의 비서를 지냈다. 이때 김일성은 물론, 김정일에게 늘 보고하여 그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1980년 10월에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츨되면서 주석 책임서기를 그만두었고, 1981년 8월에 정치국 위원, 1982년 2월에 7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82년 4월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최영림의 후임 서기인 전하철에게 만족하지 못한 김일성은 다시 최영림을 불러올 것을 지시하여 1982년 10월에 다시 김일성의 책임서기로 일하게 되었다. 최영림의 일솜씨에 만족한 김일성은 최영림을 1983년 3월 정치국 위원에서 해임되어 당 부장에 임명함으로 당업무를 보게 하였으며 1983년 4월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선출, 12월에 정무원 부총리에 임명하면서 내각의 사무를 돌보게 했다. 최영림은 1984년 2월에 정무원 제1부총리에 임명되었다. 이후 김일성이 다시 최영림을 불러들이면서 1985년 10월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면서 제1부총리에서 해임, 1986년에 다시 김일성의 책임서기에 임명되면서 인민위원과 정치국 위원에서 해임되었고 숙청당했다는 오보가 돌기도 했다.
86년과 90년에 8,9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90년 5월에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복귀하였으며,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을 맡았다. 1992년 12월에 부총리 겸 금속공업부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일선에서 은퇴하여 1998년 9월 10기 대의원, 법제위원 겸 중앙검찰소장이라는 한직으로 물러나서 2003년 9월까지 재직한다. 2005년 4월, 11기 대의원에 보선되었으며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서기장에 임명되었다. 2009년에도 12기 대의원 겸 상임위원회 서기장에 재선되었으나 2009년 7월 서기장에서 해임되고 8월에 평양시 책임비서에 임명되었다.
김영일(1944) 내각에서 당 계획재정부장 박남기가 주도했던 2009년 11월의 화폐개혁이 참혹한 실패로 끝나 민심 이반이 심각해지자, 김정일은 정권 안정화를 위해 박남기를 총살하고, 4월에 이미 최고인민회의가 개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개월 만인 6월에 긴급 최고인민회의를 소집하여 김영일 총리와 부총리 곽범기, 오수용, 박명선을 해임한 후 경제사정이 좋았던 김일성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켜 정권에 안정감을 부여할 수 있는 원로이며 당료인 최영림을 내각총리 겸 비상방역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와 함께 황해남도 책임비서 김락희, 평안남도 책임비서 리태남, 역시 김일성의 책임비서 출신인 중앙위원 전하철, 강능수 등이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2010년 9월에 개최된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최영림은 리영호, 김영남과 함께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국방위원회의 장성택, 당의 최룡해, 군부의 리영호와 상호 견제하면서 새 후계자 김정은을 보좌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자 장의위원에 임명되었으며, 김정은, 김영남에 이어 서열 3위를 기록했다. 2012월 2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이 새로 김정일훈장을 제정함에 따라 김영남, 리영호, 장성택, 김옥 등 132명의 간부들과 함께 최초의 수훈자로 선정되었다. 2012년 4월에 개최된 4차 당대표자회에서도 상무위원에 재선출되었다. 하지만 차차 태종수, 주규창, 최룡해, 박도춘 등의 부상에 밀려나다가 2013년 4월에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12기 7차 회의에서 박봉주에게 총리 자리를 물려주었으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에 임명되어 완전히 정치에서 은퇴했다. 2014년 1월 정치국 상임위원에서도 물러났다.
2014년 3월, 13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2016년 7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19년 4월 헌법 개정으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자리가 폐지되면서 자동적으로 물러났다. 지금도 국가원로로서 김정은과 자주 친목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외에 자식들도 다 잘나가고 있어 최선희는 앞서 말했듯이 외무성 국장, 김계관 통역관을 거쳐 외무성 제1부상 겸 국무위원회 위원이고 아들인 최승호는 2014년부터 당중앙검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3. 참고문헌
- 강석승, 「이달의 인물초점: 최영림」『北韓』325(1999.1)
- 김창희, 「김정은 체제 권력구조와 정치행태 분석」『통일전략』 13(1) (2013.1)
- 박영자 외, 『김정은 시대 북한의 국가기구와 국가성』(서울: 통일연구원, 2018)
- 북한연구소 편집부, 「이달의 북한 인물 초점: 최영림(중앙검찰소장)」『北韓』374(2003.2)
- 이교덕 외, 『김정은 체제의 권력엘리트 연구』(서울: 통일연구원, 2012)
- 정성장, 「김정은 시대 북한의 입법 및 국가대표 기구 연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역할과 엘리트를 중심으로」『KDI 북한 경제리뷰』(2014.5)
[1] 1926년 강원도 원산 출생설도 있었으나 현재는 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