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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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원로 정치인. '''북한 정부의 영원한 2인자'''였던 인물로, 3대에 걸친 북한 김씨 정권을 보좌해 온 충신 중의 충신이자 '''북한 입장'''에서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정치인의 표본인 인물이다.
1998년부터 2019년까지 '''무려 21년 동안'''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즉 북한의 상징적 국가원수였지만, 헌법이 개정되어 이제는 국가원수에서 물러났다.[3] 그러나 한국의 언론에서는 김영남을 여전히 헌법상 정부수반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외국 대사들의 신임장이 김정은이 아닌 김영남 명의로 발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외에도 김정은 스스로 가기 뭐한 외국 인사[4] 와의 회담 같은 경우에는 김영남을 보내는 등 얼굴마담으로 써먹었다. 아무튼 북한이 다시 명목상 내각제를 하지 않는 이상 북한의 마지막 상징적 국가원수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게 된다.[5]
현재 90이 넘은 고령이다.[6]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였으며,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외교학을 전공하였다.
2.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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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 부장(외무상) 겸 정무원 부총리 시절 사진.
김영남은 1928년 2월 4일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김택세(金擇世)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적지는 평안북도 구성군이다. 일부에서는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콴뎬(寬甸)만주족자치현 전장(振江)진 시장(西江)촌 출신이라고 하는데, 한국어 위키백과를 제외한 모든 문헌에서 평양 출신으로 등재되어 있다.[7] 일부 북한 관련 기관에서는 혈연적으로 김일성계에 속하는 김일성 일가의 한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8]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의 가족들은 8.15 광복 직전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무란(木蘭)현으로 이주했고 그 후 상지현(尙志縣, 현 샹즈시)로 재차 이주했다. 김영남은 그곳에서 상지 조선족중학교에 재학하게 되었는데, 1950년 6월, 6.25 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정부의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이라는 호소에 호응해 그 해 10월 중공군 징집에 호응하여 입대하게 된다.
이렇게 그는 지원군의 신분으로 6.25 전쟁에 참가했다가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자 북한에 잔류했다. 1954년 1월 그는 소련 모스크바로 가서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외교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그해에 중국으로 귀국했다. 이후 1950년대 중반 가족들을 데리고 북한으로 재차 귀환했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죽 관료, 주로 외교 계통에서 일해왔다. 1956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과장으로 출발하여 1960년에는 국제부 부부장, 1970년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72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부장으로 승승장구한다. 1975년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국 비서로 김일성의 지근거리에 위치하게 되었는데 이 사람의 연설문 작성능력이 뛰어나 김일성의 연설문의 초안을 담당했고, 그로 인해 1978년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이 되면서 최고급 간부가 되었다.
이후 정무원 부총리, 외교부 부장[9] ,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등 외교관련 분야의 최고직책을 지내다가 김일성 사망후 김정일이 집권하여 김정일 체제가 좀 안정화된 1998년에 개최된 10기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일성 헌법 채택을 통한 국가주석직 폐지, 국방위원회 설치 등 대격변이 일어난다. 이때 김영남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어, 2019년까지 역임하였는데, 국가주석직이 폐지됨에 따라 1998년부터 김정일 헌법이 통과되는 2009년까지 북한의 형식상 '''국가 수반'''의 지위를 누렸다. 이는 김정일이 정권 안정화를 위해 자신이 당수인 총비서 겸 군 통수권자인 국방위원장에 취임해서 권력을 집중하면서도 국가수반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게, 정부수반은 내각 총리에게 위임하는 형식으로 표면적인 권력을 분산하였기 때문이었다. 실권이라곤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하지만, 어쨌거나 헌법상 국가원수였고 김정일과 상호존칭을 쓰며 대화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2009년 헌법 개정 이후에도 수령을 귀찮게 만들 친선 외교는 오랫동안 김영남이 전담하였다.
그러다가 2009년 화폐개혁으로 나라가 결딴날 판에 처하자, 뇌졸중으로 죽어가던 김정일은 아들 김정은의 후계자 자리를 굳혀주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뛰어다니게 된다. 우선 화폐개혁을 지휘한 박남기를 희생양으로 삼아 총살시키고 내각총리 김영일을 숙청하였으며, 김일성의 책임서기를 지낸 평양시 책임비서 최영림을 새로운 내각총리에 임명하는 한편, 선군정치로 인해 사실상 유명무실해져 있던 당정치를 개편하기 시작했다. 2010년 9월, 제3차 당대표자회가 개최되면서 김영남은 조명록, 최영림, 리영호와 함께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2019년 정치에서 은퇴할 때까지 이후 상무위원직을 유지한다. 수령에게 죽기살기로 충성해도 실수로 삐끗하거나 수령의 똥치우기 희생양으로 끝장나는 불쌍한 북한 엘리트들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3대에 걸쳐 김씨왕조에서 최고위직을 유지하고 있는''' 이 양반의 처신은 가히 소름 돋을 따름이다. 김영남은 철저한 자기관리로 유명하여, 북한에서 공직 생활하다 보면 으레 겪게 마련인 가벼운 철직('해임'의 북한식 표현)이나 혁명화 한 번 없는 걸로 알려져 있다. Don Oberdorfer[10] 의 '두 개의 한국'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북한 내에서도 매우 똑똑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외교관 출신이기 때문에 북한의 주요 우방국 언어인 중국어와 러시아어뿐만 아니라 영어, 독일어에 능통하다. 사적으로는 따뜻하며, 당원들을 보듬어 주는 성격이나 업무에 들어가면 누구보다 냉철하다고 한다.북한의 외교관이자 김일성의 통역관으로 활동하다가 남한으로 망명한 고영환은 김영남을 북한 관리의 전형이라 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김일성이 벽을 가리키며 '저것은 문이다'라고 한다면 김영남은 그 말을 믿고 기어이 벽을 뚫고 밖으로 나가려 할 것이다" 또한 북한엔 이런 농담도 있다. 김영남 그 사람은 지문이 하나도 없다고. 하도 손을 비비며 3대에 걸쳐 아부를 하느라...
온건파적인 성향이 있기 때문에 김정은 이후에는 공식석상에 나타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물론 나이도 있겠지만. 하지만 장성택의 비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영남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그가 권력의 외곽으로 밀려나갔다고는 절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 등에서는 그의 드문 공식석상 출현에 그가 나이 때문에 은퇴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했지만 2014년에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도 건재함을 과시했다. 8월 30일에는 평양에서 열린 국제레슬링대회 개막식에 참가한 일본 국회의원 안토니오 이노키와 만나 현안문제를 놓고 회담을 진행, '얼굴마담'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2017년 2월 15일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의 생일인 '광명성절'을 하루 앞둔 15일인 '탄생 74돌 경축 중앙보고대회에서 김영남은 보고에서 "지구관측위성 광명성 4호의 성과적 발사는 최대의 민족적 명절인 광명성절을 더욱 빛나게 장식하고 있다"며 "우리 군대와 인민은 경애하는 김정일 동지의 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빛내어 갈 맹세를 굳게 다지고 있다"고 밝혔다. 즉 여전히 현역임을 과시하였다.
2018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된 지 어언 20주년을 맞았지만 2018년 이후부터는 북한이 핵실험으로 인해 국제적으로 상당한 제재를 받게 되면서 김영남도 함부로 해외에 국가대표 자격으로 나가긴 힘들어질 듯하다. 게다가 본인의 나이도 나이인지라 체력문제도 있고... 이와 비슷하게 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베트남, 라오스, 인도네시아를 친선 방문하려다 취소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온 걸 보면... 하지만 국가 대 국가가 아닌 비동맹회의 같은 단체 회의나 국제 스포츠 행사 같은 경우에는 본인 체력이 된다면 계속 참석할 가능성도 있다.[11]
평창 동계올림픽에 오는 북한의 고위급 사절단 단장으로 선정되었다. 김정은을 제외하면 명목상 가장 높은 사람이 온다니, 나름대로 신경은 쓰는 모양. 첫 방남[12] 이다. 미국에서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오는 만큼 미국과 협상을 원하는 북한에서 급이 맞고 제재 대상에서 제외된 김영남 상임위원장을 보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13]
막상 대표단에 김정은의 친동생 김여정이 포함되면서 화제는 모두 김여정이 가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외교 라인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영양가 있는 대화는 가능할 듯했으며, 개막식 준비 리셉션 헤드테이블에 배석할 정도로 공을 들였지만 정작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노골적으로 북한과 동선이 닿지 않게 하라는 요청을 했고, 리셉션에서도 김영남과 눈도 안 마주치고 가버리는 외교적 결례 수준의 무시까지 하면서 김영남은 미국 측 인사와 접촉조차 못한 것이다.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6화에 펜스에게 무시당한 김영남의 표정이 나오는데 출연한 정세현 장관의 말로는 얼굴이 벌게져 겨우 화를 억누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결국 개막식 김여정, 김영남의 방남은 펜스의 패싱으로 소득 없이 끝난 셈.
90대에 접어들었음에도 70대 중반으로 보일 정도로 동안인데다 상당히 건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영남은 북한의 다른 간부들과 달리 오래전부터 건강식에 관심이 많아 기름진 음식이나 술을 멀리하고 평소에 운동을 하는 등 건강과 체력 관리를 체계적으로 해 왔다고 한다. 이러한 건강 관리로 그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에 이르는 동안 요직에 있었으며, 다른 고위급 관리들이 고혈압, 당뇨병, 비만 등 성인병을 앓는 것과 매우 대조된다. 이러한 일면은 철저한 자기관리의 일환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그것만은 못 피했다.(...)
방남 당시 만 90세인데도 전혀 불편한 기색이 없었고, 심지어는 흡연자임도 인증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차가 준비될 때까지 5분간 기다려야 한다는 전달을 받자 담배 좀 피울까 하는 말을 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에 참석해서 김여정과 함께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선수단 입장 때 남북 공동입장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포착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출생해 엄혹한 식민 시기, 열강에 의한 분단, 6.25 전쟁, 그 외 수많은 민족의 풍파를 직접 경험해 온 산증인이라 감회가 남달랐을 수도 있다. 이후 북한 공연을 보면서 다시 눈물을 흘렸다.
반면 같은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의원은 김영남의 눈물에 대해 위의 분석과는 달리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한 정통 공산주의자인 김영남이 인생의 늘그막에 남한을 방문하고 발전된 모습을 목격한 후 정통 공산주의자로써 공산주의 이론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3대 세습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데서의 서글픔, 3대 세습이라는 무리수를 둬가면서도 극도의 후진성을 면치못하는 북한의 현실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라고 해석하였다.#
권력의 실질적 크기의 여부와 관련 없이 북한 내에서 의전 서열 공식 2위로 대우받았다. 판문점 회담 때는 과거 김정일이 타고 다니던 구형 벤츠 리무진을 타고 나타났으며, 김정은의 차량 바로 뒤를 따랐다.
2018 러시아 월드컵 개막식에도 참석차 러시아를 방문하였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2018년 8월에 인도네시아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에도 파견될 가능성이 점쳐졌으나 의외로 리룡남 부총리를 파견했다.
하지만 김정은이 헌법 개정을 통해서 법적인 국가원수의 지위를 지향하는 모습이 포착되고, 외무성이 각국에 앞으로 서신을 김영남이 아니라 김정은 앞으로 직접 보내라고 하는 등 더 이상 얼굴마담으로의 역할도 줄어드는 기미가 보이더니, 아니나 다를까 2019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 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직이 최룡해로 바뀜에 따라 은퇴한 것이 확인되었다.[14][15] 정정해 보였으나 역시 90세가 넘는 탓에 평창 올림픽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 만일 사망할 경우 김씨 일가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들의 오른팔 역할을 한 중요한 인물인 만큼 이변이 없는 한 대규모 추모식이 열릴 것으로 예상되며 당연히 대성산혁명렬사릉에 묻힐 것이다.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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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출생임에도 불구하고, 키가 굉장히 큰 편이다. 180cm라는 정보가 있지만 현재 고령이라 약간 키가 줄어든 듯, 172cm근처의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170cm대 후반으로 보인다.
건강 이외에도 다른 간부들은 자녀들을 내세우며 자신의 권력을 대놓고 대물림하고, 자식들끼리 권력 투쟁을 벌이기도 하는데, 김영남의 가족은 국제 기구에 부인을 대동한 것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방북했을 당시 이희호 여사와 동행하여 같이 공연을 관람한 것 이외에는 공개된 바가 없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동안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튀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부터 이렇게 장수하는 2인자는 본인 능력도 출중해야 하지만, 자기 의견이 없이 무색무취하고 모든 사람과 인간관계가 원만하며, 위기상황에서도 잘 피해나가는 사람이 많다. 이런 인물은 북한이 아니라더라도 다른 나라에서 관료생활을 했어도 그 정도로 올라갔을 것이다. 여러 모로 2인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참고가 될만한 인물.
'''북한 정부 수립 70주년''' 기념 행사에서 연설을 했는데 내용을 들어보면 그야말로 김씨왕조의 절대적인 추종자로서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16] https://youtu.be/D5HtbEDJqgo
[1] #[2] 젊은 시절에는 지금보다 더 큰 180cm 안팎의 거구였다고 한다.[3] 소련도 헌법상 국가원수는 소련 최고회의 의장이나 실질적인 최고권력자는 공산당 서기장이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임기 당시에는 이게 안 맞는다 싶었는지 다 갈아엎고 국가주석을 뜻하는 소련 대통령직을 신설했지만 이미 상황은 소련 붕괴 직전이었다. 오늘날 중국과 베트남도 마찬가지인데 중국도 헌법상 국가원수가 국가주석이지만 실권자는 군 통수권을 가진 중앙군사위 주석이고 베트남도 국가주석이 헌법상 국가원수지만 베트남 공산당 총비서가 실권자다. 물론 그렇다고 국가주석의 권한이 아예 없지는 않다. 국가주석은 국방, 외교 같은 외정을 담당하며 엄연히 국가원수로 권력을 행사한다. 총리는 내정을 담당한다. 그러나 국가주석, 총리, 국회의장, 정부 각료들도 공산당원이기 때문에 공산당원의 우두머리, 총비서가 실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4] 예를 들어 북한과 수교국이지만 친밀하지 않은 나라의 정부 특사나 대통령 등[5] 북한의 역대 상징적 국가원수는 김두봉, 최용건, 김영남 세 명뿐이다.[6] 북녘 정치인이나 군인들 가운데에 장수인들이 꽤 있다. 김정일 시대 마지막 원수 리을설도 94살에 사망. 어쨌든 김영남은 생전의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과 동갑이고 송해보다는 1살 아래. 그러고 보면 송해도 태어난 곳이 현 북한 영토인 황해도다.[7] 한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인민군으로 참전한 뒤 소련 모스크바 대학에서 유학했다고 한다.[8] 하술하겠지만, 김영남은 공직 생활 간 단 한 번도 격랑을 겪지 않았다. 그의 출신 성분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이야기가 많다.[9] 외무상을 말한다. 장장 15년을 역임했다.[10] 미 존스홉킨스 대학 교수[11] 2018년 후반에 장거리 비행해야 하는 쿠바, 베네수엘라, 멕시코 등을 방문하는걸 보면 아직 정정한 듯. 일단 이 세 나라는 미국과 사이가 나쁘기 때문에 그나마 꺼리지 않고 방문하는 모양이다.[12] 아무래도 나이도 있고 은퇴할 시기가 점점 다가올 테니 은퇴 하기 전에 남한에 한번 갔다오라고 김정은이 특별히 배려해준 듯하다.[13] 미국 부통령은 행정부 2인자임과 동시에 미국 상원 의장직도 겸직한다. 북한의 권력서열 2인자이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인 김영남이 펜스에게 있어서는 여러모로 격에 맞는다고 할 수 있다.[14] 다만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는 선출되었기에 완전 은퇴했다기 보다는 일선에서 물러났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15] 마찬가지로 최고인민회의 의장도 최태복에서 박태성으로, 상임위 부위원장도 양형섭에서 태형철로 교체되었다.[16] 38분 58초 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