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무
崔昌武
Andrew Choi Chang-mu
한국 가톨릭교회의 제8대 광주대교구장. 세례명은 '안드레아'이다. 1936년 9월 15일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출생. 현재 88세.
파주시, 특히 순교자 김치호 베네딕토의 출신지인 법원읍 갈곡리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소신학교 시절이던 14살 때 한국전쟁이 터졌는데, 당시 부제이자 신학생 총급장이었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수원성당에서 울고 있던 최 대주교를 만나서 같이 피난길에 올랐다고 한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최 대주교가 고향이 '''문산'''이라고 답하자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인줄 알고 그곳으로 보내려다가 이미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기도 했다고.
이후 소신학교인 성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톨릭대학에 입학했다가 3학년 때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로 편입하였다. 1962년 학사학위를 받고, 1963년에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잠시 명동성당에서 보좌신부를 지내다가 다시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 유학을 가서 1970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바로 귀국하여 가톨릭대학의 교수가 되었는데, 보좌주교로 선임되고 난 다음인 1995년 2월까지 25년간 가톨릭대학 교수를 지냈다.
가톨릭대학 교수를 지내는 동안 학장을 두 번, 총장을 한 번 지냈다. 1979년년 9월부터 1980년 8월까지 제11대 학장을, 1991년 9월부터 1992년 5월까지 제16대 학장을 지냈다. 가톨릭대학이 1992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자 최창무 학장은 그대로 총장이 됨으로써 1995년 2월까지 총장으로 지냈다. 이 시기의 가톨릭대학교는 성심여자대학교와 통합되기 전으로 신학대학, 의과대학, 간호대학만 있었다. 가톨릭대학교 총장 재임중인 1994년 2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대교구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푸르멘피센세의 명의주교로 주교품을 받았다. 서울대교구 보좌 주교를 지내면서 1995년 2월까지는 가톨릭대학교 총장도 겸임하였다. 1995년 2월 가톨릭대학교가 성심여자대학교를 흡수한 통합 가톨릭대학교가 출범하자 서울대교구 보좌 주교 강우일 베드로 주교에게 총장직을 넘겨주었다. 따라서 최창무 신부는 가톨릭대학교의 마지막 학장이자 관점에 따라 초대 총장이기도 하다. 다만, 1995년의 통합 후 역대 총장 카운트를 다시 하였기 때문에, 현재의 가톨릭대학교 초대 총장은 최창무 주교가 아닌 강우일 주교로 기록되어 있다.1
1999년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의 은퇴시기가 다가오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최 주교를 교구장 계승권이 있는 광주대교구 부교구장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2000년 윤공희 대주교가 은퇴하자 광주대교구장직을 계승하였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의장을 맡았으며,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2010년 3월, 정년이 되자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 사임을 청원하였고, 교구장직을 부교구장이었던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에게 넘겨주고 은퇴하였다.
대한민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유일무이한 가톨릭계 이단인 나주 마리아의 구원방주에게 철퇴를 먹인 적이 있다. 그곳에서 괴상한(?) 현상, 이를테면 성모상에서 눈물, 피눈물, 젖, 향유 등이 흐르거나 김창렬 바오로 주교가 방문했을 때 하늘에서 성체가 떨어지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사실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하늘에서 성체가 떨어지는 현상은 사실 사람이 던진 거라고 한다. 애당초 성체를 던지는 건 대죄에 해당하는 성체모독이다.) 이러한 일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자, 최 대주교가 실태를 확인하고 교황청과 협의하여 광주대교구장 명의로 이단임을 공식적으로 확정했다. 이 단체가 왜 이단인지는 마리아의 구원방주 문서를 참조.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이런 이단에 현혹되지 말고 이 단체가 이단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교회 교도권에 반드시 순명하도록 하자.
천주교 새번역 성경이 처음 발간되었을 때 서문을 쓴 인물이기도 하다. 지금도 천주교 성경에는 그 서문이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