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일

 


'''4대 천주교 제주교구장'''
'''강우일 베드로'''
'''姜禹一''' | '''Peter Kang U-il'''
[image]
'''출생'''
1945년 10월 12일 (79세)
경기도 경성부[1]
'''국적'''
대한민국 [image]
'''재임기간'''
제주교구
2002년 7월 15일[2] ~ 2020년 11월 22일
[image]
'''네 생명 주께 맡기고 그를 바라라.'''(시편 37(36,5))

(2020년 12월, 제주교구장 은퇴 직후 CPBC 평화방송과의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한 모습)
1. 소개
2. 생애
2.1. 사제가 되기까지
2.2. 서울대교구 보좌 주교 시절
2.3. 제주교구장 시절
3. 이모저모


1. 소개


한국 가톨릭의 제4대 천주교 제주교구 교구장 주교.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서울특별시 출신으로 외할아버지 오위영은 정치가, 막내이모 오현주 베르나데트는 1959년 미스코리아 진이다.

2. 생애



2.1. 사제가 되기까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인해 집안 전체가 일본으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다. 일본에서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중에 신부가 될 결심을 하고 일본 도쿄조치대학 신학부에 입학했다. 이 시절 은사 중 한 분이 예수회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훗날의 서강대 초대 이사장)였으며, 이분은 김수환 추기경의 조치대학 유학 시절 은사이기도 했다.1 2 이후 교황청 우르바노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74년 12월 9일 사제로 수품되며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가 되었다.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중림동 약현성당명동성당 보좌신부를 지냈고 1977년부터 1985년까지 서울대교구 교육국장과 홍보국장을 지냈다. 1985년 8월 30일부터 난곡동 성당 주임 신부로 봉직하던 중 1985년 12월 2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대교구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고 1986년 2월 14일에 주교품을 받았다.

2.2. 서울대교구 보좌 주교 시절


주교가 된 이후 1987년부터 1996년까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전례위원장을 맡아 미사 경본 개정 작업과 함께 삼위일체의 3번째 위격인 Spiritus Sanctus의 번역을 성신(聖神)에서 성령으로 바꾸는 일 등에 앞장섰다.
1995년부터 1998년까지는 성심여자대학교와 통합한 가톨릭대학교의 초대 총장을 지냈다. 한국 천주교 내에서 주교급 성직자가 대학 이사장이 아닌 총장을 맡은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그리하여 1995~1997년까지의 가톨릭대학교는 이사장이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총장이 강우일 베드로 주교, 부총장이 신부와 수녀인 화려한 라인업을 보유했다. 이 화려한 라인업의 중추였던 강 주교는 통합 가톨릭대학교의 성공적인 운영을 위한 서울대교구의 의지를 보여주며, 두 대학을 통합하다보면 으레 나올 수 있는 학교 내부의 혼란을 말끔히 해결하였다. 강 주교는 대학 발전을 위한 중장기 계획인 '2005 플랜'을 세우고 새 교과과정을 실시했으며, 국외 각 대학들과의 적극적인 교류 확대를 이루어 내는 등 학교 운영을 매우 잘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1999년부터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장을 맡아 북한과의 교류를 다각적으로 시도했으며, 2001년 12월부터는 교구의 거의 모든 살림을 맡아 하는 서울대교구 총대리 겸 교구청장으로 임명받아 충실히 수행하여 차기 교구장과 대주교 더 나아가 차기 추기경으로 각광과 기대를 받았다.[3]

2.3. 제주교구장 시절


2002년 7월 2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강 주교를 천주교 제주교구 제4대 교구장으로 임명하였고, 10월 8일, 교구장 착좌식과 동시에 제주교구장으로 공식 취임하였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부의장과 2008년부터 2014년 10월까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을 맡아 진보적 발언을 많이 하고 있으며, 신자들에게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2014년 8월 14일 ~ 8월 18일까지 진행된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추진위원회장을 지냈다.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황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강우일 주교의 덕분이라고 전해진다. 대전교구장인 유흥식 라자로 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과 더불어 이번 방한에 공헌을 많이 했다.
강우일 주교는 2020년 10월 12일에 만 75세가 되었으며, 교회법에 따라 교황청에 사임 청원을 하였다. 이 청원이 받아들여짐에 따라, 2020년 11월 22일 강우일 주교는 제주교구장에서 은퇴하고, 그때까지 제주교구 부교구장으로 봉직했던 문창우 비오 주교가 자동으로 교구장직을 계승하여 같은날 제주교구장으로 착좌하게 되었다.

3. 이모저모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선종 5일 후인 2009년 2월 20일 거행된 장례미사에서 추도사를 낭독한 인물 중 하나였는데, 많은 이들의 감동을 자아내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4] #

저도 지난 2년여 동안 추기경님이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 하시고 급속도로 체력이 약화되시다가 7개월 전부터는 퇴원도 못하신 채 계속 병실에 붙잡혀 계시니 참으로 애처로웠습니다.[5]

(중략)

저는 이런 추기경님 모습을 뵈면서 하느님께 투정 섞인 넋두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우리 추기경님 무슨 보속할 것이 그리도 많아서 이렇게 길게 고난을 맛보게 하십니까? 추기경 정도 되는 분을 이 정도로 족치신다면 나중에 저희 같은 범인은 얼마나 호되게 다루시려는 것입니까? 겁나고 무섭습니다.' 몇 주일 전에는 '주님, 이제 그만하면 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 추기경님 좀 편히 쉬게 해주십시오.'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추기경님의 고난이 왜 필요했는지를! 지금 추기경님은 당신의 투병생활과 죽음을 통하여 경제위기와 사회불안으로 깜깜하고 싸늘하게 식어버린 국민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주기 시작하셨습니다.

(중략)

추기경님의 고난이 있었기에 추기경님의 부활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추기경님께서 이 세상에 살아계시며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을 때보다 지금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추기경님 말씀을 음미하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추기경님은 이제 혜화동 할아버지가 아니라 한국의 할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추기경님, 저는 믿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어서 오너라, 내 사랑하는 바보야! 그만하면 다 이루었다!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평안히 가십시오, 추기경님. 그리고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시면 당신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애틋하게 사랑하셨던 우리 백성을 위하여 주님께 간구하여 주십시오.

대단한 건강 가족이다. 장남인 본인을 포함한 5남매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2020년 12월(강 주교가 제주교구장직을 떠난 시점)을 기준으로 93세이며, 대부분의 일상 생활을 직접 해낼 정도로 정정하시다. 아버지는 2013년 세상을 떠났지만, 역시 93세로 장수했다.
그의 이모가 미스코리아 출신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굉장한 미남이었고, 미노년이다. 실제로 뵈면 미노년 간지와 근엄이 넘치신다.


[1]서울특별시.[2] 동년 10월 8일 착좌.[3] 2005년 당시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니콜라오 대주교와 춘천교구장 장익 십자가의 요한 주교과 함께 차기 추기경 후보에 올라갔었다.당시 강우일 주교의 나이 만 60세로 70대였던 정진석 대주교와 장익 주교와 비교했을때 나이대가 비교적 젊은편에 속했기 때문에 특히 차기 추기경으로 임명될 가능성이 매우 컸었다.또한 강우일 주교는 1985년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수품되고 김수환 추기경을 오랜시간 보좌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 서울대교구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4] 강우일 주교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사제품과 주교품을 받았으며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사목하면서 서울대교구에서 여러 보직을 역임하며 김 추기경을 보좌하는 등 각별한 인연을 이어왔다.[5] 김수환 추기경은 선종 4개월전인 2008년 10월에는 의식을 잃는등 매우 위독한 상태까지 갔었으며 이후 간신히 의식을 회복하고 병실에서 일상생활을 해왔었다.강우일 주교는 김수환 추기경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병실로 달려간 주교들중 한명이었다.강우일 주교는 김수환 추기경이 갈수록 초췌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했다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