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나우지
कन्नौज
우르두어 کنوج
영어 Kannauj
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데시 주에 위치한 도시. 러크나우에서 서쪽으로 70km, 칸푸르에서 서북으로 60km 떨어져 있으며 아그라에서는 동쪽으로 150km 떨어진, 힌두스탄 평원 상에 위치해 있다. 시가지는 갠지스 강 서안에 위치해 있는데, 수로 변경으로 현재의 갠지스 강과는 5km 정도 떨어져 있다. 카나우지는 마우카리 왕조 및 하르샤 제국의 수도가 되어 중세 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으며, 칸나우지 삼각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슬람 시대에 들어 인근의 러크나우, 칸푸르가 더 중시되며 쇠퇴하였다. 현재는 중급 규모의 도시로, 인구는 180만명이다.
카나우지는 고대에 카냐쿠자라는 이름으로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 그리고 불경에 등장하는데, 서쪽 아그라 인근의 고대도시 마투라와 동쪽의 아요디야 및 마가다 지방 (파트나, 바라나시)을 이어주는 상업 도시였다. 서기 5세기 경, 카나우지에는 굽타 왕조의 속국인 마우카리 왕조가 있었는데, 6세기 들어 굽타 제국이 쇠퇴하자 550년에 독립하여 마투라 ~ 아요디야의 영역을 다스렸다. 하지만 마우카리는 7세기 초에 후 굽타 왕국과 싸우며 쇠퇴하였고, 바르다나 왕조의 하르샤 대왕이 어부지리를 취하여 칸나우지를 점령하였다.
하르샤는 카나우지의 웅장함에 감탄하여 타네사르에서 천도하여 수도로 삼았고, 대대적으로 도시를 정비하였다. 하르샤 제국의 수도로 기능하던 카나우지를 방문한 중국 당나라 출신 구법승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매우 크고 풍족하며 불교 사원이 많은 도시'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647년에 하르샤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약 80년간의 혼란이 일었고[1] , 725년 경에야 야소바르만이 카나우지 왕국을 세우며 안정이 찾아왔다. 750년 경의 칸나우지 왕국은 북인도를 다시 통일하고 벵골까지 정복하였으나, 곧 동쪽에 팔라 왕조, 서남쪽에는 우마이야 왕조를 격파하고 기세를 얻은 구자라-프라티하라 왕조가 세워지며 쇠퇴하였다.
[image]
카나우지는 인도의 3국 정립기인 8세기 말 ~ 9세기 동안 3국의 접경지로서 3국간의 쟁탈전이 이어졌다. 한국 삼국시대의 남한강 유역으로 이해하면 편하다. 784년, 카나우지의 왕인 바즈라유다가 사망하자 프라티하라 군대가 진군하여 새로 즉위한 이드라유다의 군대를 격파하고 카나우지를 속국화하였다. 그러자 동쪽 팔라 왕조의 군주 다르마팔라가 반발, 785년에 양측이 부딪혔으나 팔라 군대가 패하여 회군하였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남쪽의 라슈트라쿠타 왕조는 구자라트의 정예군이 벵골에서 회군하고 있을 때에 북진, 말와를 점령하고 더 나아가 칸나우지를 함락하며 순식간에 북인도의 핵심부를 장악하였다. (786년) 같은해, 팔라 왕조는 재차 서진하였으나 이번에는 라슈트라쿠타 군대에게 패하였고 처음으로 데칸 고원의 세력이 인도의 주도권을 장악하는듯 하였다.
하지만 793년, 라슈트라쿠타의 명군 다라바르사가 사망하였고 내전이 발발하였다. 이에 다르마팔라는 3번째로 서진하여 이번에는 별 어려움 없이 카나우지를 접수하였고 카크라유다를 허수아비로 옹립하였다. 당시 프라티하라 왕조 역시 제위 계승 분쟁으로 가만히 있어야 했는데, 내전은 곧 나가부타 2세에 의해 종결되었다. 그는 795년에 동진하여 팔라 군대를 격파, 9년만에 칸나우지를 손에 넣었다. 그러자 다르마팔라는 4번째로 서진하여 프라티하라 군대와 겨루었으나 패하였다. 이듬해인 796년, 남쪽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고빈다 3세는 내전을 끝내었고, 칸나우지 회복을 결심하였다. 1차 정복 때와 유사하게, 프라티하라 측이 팔라와의 전쟁으로 지쳐있는 틈을 타서 라슈트라쿠타 왕조는 북진하였고 3년만에 카나우지를 점령하였다.[2] 라슈트라쿠타 조는 6년간 카나우지를 다스리다가 남인도의 반란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카나우지를 버리고 후퇴하였다. (802년)
그러자 다르마팔라는 5번째로 서진, 칸나우지를 회복하는 기쁨을 누렸다. 10년간 카나우지를 수중에 넣었던 다르마팔라는 812년에 죽었고, 그틈을 노린 프라티하라 왕조의 나가부타 2세는 동진하여 카나우지를 16년만에 회복하였다. 이후로는 나가부타 2세가 사망한 833년에 잠깐 팔라 왕조가 카나우지를 함락한 일을 제외하고는 11세기 초반까지 구자라-프라티하라 왕조는 카나우지를 영위할 수 있었고, 10세기 후반부터는 그 수도가 되었다. 2세기 (812년 ~ 1018년)에 걸친 프라티하라 지배기에 카나우지는 북인도 최대의 도시로서 번영하였다.
프라티하라 (784 ~ 786년)
라슈트라쿠타 (786 ~ 793년)
팔라 (793 ~ 795년)
프라티하라 (795 ~ 796년)
라슈트라쿠타 (796 ~802년)
팔라 (802 ~ 812년)
프라티하라 (812 ~ 833년)
팔라 (833년)
프라티하라 (833 ~ 1012년)
1018년, 가즈니 왕조의 술탄 마흐무드가 도시를 함락하였다. 하지만 가즈니 조는 마흐무드 사후 약화되었고, 현재의 파키스탄 일대로 축소되었다. 따라서 1090년에 카나우지는 토착 왕조인 가하드발라 왕조의 수도가 되었고 고빈다찬드라 대왕 대에는 10세기의 영광을 넘어선 황금기를 맞기도 하였다. 하지만 1193년, 찬드와르 전투에서 힌두 연합군은 무함마드 고리가 이끄는 구르 왕조 군에게 대패하였고, 카나우지에 입성한 구르 군대는 도시를 대대적으로 파괴하였다. 도시는 13세기 전반에 델리 술탄국 군대에게 재차 파괴되어 작은 마을로 전락하였다. 1540년, 도시 인근 벌판에서 수르 제국의 세르 샤가 무굴 제국의 후마윤을 패배시켜 잠시나마 무굴 제국을 북인도에서 축출시키기도 하였다. 19세기 이후 카나우지는 향수와 담배 생산지로 인구를 회복하였다. 도시 안팎에는 불교 사원 터와 중세 시대의 성벽과 자미마스지드 사원 등이 있다.
우르두어 کنوج
영어 Kannauj
1. 개요
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데시 주에 위치한 도시. 러크나우에서 서쪽으로 70km, 칸푸르에서 서북으로 60km 떨어져 있으며 아그라에서는 동쪽으로 150km 떨어진, 힌두스탄 평원 상에 위치해 있다. 시가지는 갠지스 강 서안에 위치해 있는데, 수로 변경으로 현재의 갠지스 강과는 5km 정도 떨어져 있다. 카나우지는 마우카리 왕조 및 하르샤 제국의 수도가 되어 중세 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으며, 칸나우지 삼각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슬람 시대에 들어 인근의 러크나우, 칸푸르가 더 중시되며 쇠퇴하였다. 현재는 중급 규모의 도시로, 인구는 180만명이다.
2. 역사
카나우지는 고대에 카냐쿠자라는 이름으로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 그리고 불경에 등장하는데, 서쪽 아그라 인근의 고대도시 마투라와 동쪽의 아요디야 및 마가다 지방 (파트나, 바라나시)을 이어주는 상업 도시였다. 서기 5세기 경, 카나우지에는 굽타 왕조의 속국인 마우카리 왕조가 있었는데, 6세기 들어 굽타 제국이 쇠퇴하자 550년에 독립하여 마투라 ~ 아요디야의 영역을 다스렸다. 하지만 마우카리는 7세기 초에 후 굽타 왕국과 싸우며 쇠퇴하였고, 바르다나 왕조의 하르샤 대왕이 어부지리를 취하여 칸나우지를 점령하였다.
2.1. 북인도의 중심 도시
하르샤는 카나우지의 웅장함에 감탄하여 타네사르에서 천도하여 수도로 삼았고, 대대적으로 도시를 정비하였다. 하르샤 제국의 수도로 기능하던 카나우지를 방문한 중국 당나라 출신 구법승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매우 크고 풍족하며 불교 사원이 많은 도시'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647년에 하르샤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약 80년간의 혼란이 일었고[1] , 725년 경에야 야소바르만이 카나우지 왕국을 세우며 안정이 찾아왔다. 750년 경의 칸나우지 왕국은 북인도를 다시 통일하고 벵골까지 정복하였으나, 곧 동쪽에 팔라 왕조, 서남쪽에는 우마이야 왕조를 격파하고 기세를 얻은 구자라-프라티하라 왕조가 세워지며 쇠퇴하였다.
2.2. 카나우지 삼각 구도
[image]
카나우지는 인도의 3국 정립기인 8세기 말 ~ 9세기 동안 3국의 접경지로서 3국간의 쟁탈전이 이어졌다. 한국 삼국시대의 남한강 유역으로 이해하면 편하다. 784년, 카나우지의 왕인 바즈라유다가 사망하자 프라티하라 군대가 진군하여 새로 즉위한 이드라유다의 군대를 격파하고 카나우지를 속국화하였다. 그러자 동쪽 팔라 왕조의 군주 다르마팔라가 반발, 785년에 양측이 부딪혔으나 팔라 군대가 패하여 회군하였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남쪽의 라슈트라쿠타 왕조는 구자라트의 정예군이 벵골에서 회군하고 있을 때에 북진, 말와를 점령하고 더 나아가 칸나우지를 함락하며 순식간에 북인도의 핵심부를 장악하였다. (786년) 같은해, 팔라 왕조는 재차 서진하였으나 이번에는 라슈트라쿠타 군대에게 패하였고 처음으로 데칸 고원의 세력이 인도의 주도권을 장악하는듯 하였다.
하지만 793년, 라슈트라쿠타의 명군 다라바르사가 사망하였고 내전이 발발하였다. 이에 다르마팔라는 3번째로 서진하여 이번에는 별 어려움 없이 카나우지를 접수하였고 카크라유다를 허수아비로 옹립하였다. 당시 프라티하라 왕조 역시 제위 계승 분쟁으로 가만히 있어야 했는데, 내전은 곧 나가부타 2세에 의해 종결되었다. 그는 795년에 동진하여 팔라 군대를 격파, 9년만에 칸나우지를 손에 넣었다. 그러자 다르마팔라는 4번째로 서진하여 프라티하라 군대와 겨루었으나 패하였다. 이듬해인 796년, 남쪽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고빈다 3세는 내전을 끝내었고, 칸나우지 회복을 결심하였다. 1차 정복 때와 유사하게, 프라티하라 측이 팔라와의 전쟁으로 지쳐있는 틈을 타서 라슈트라쿠타 왕조는 북진하였고 3년만에 카나우지를 점령하였다.[2] 라슈트라쿠타 조는 6년간 카나우지를 다스리다가 남인도의 반란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카나우지를 버리고 후퇴하였다. (802년)
그러자 다르마팔라는 5번째로 서진, 칸나우지를 회복하는 기쁨을 누렸다. 10년간 카나우지를 수중에 넣었던 다르마팔라는 812년에 죽었고, 그틈을 노린 프라티하라 왕조의 나가부타 2세는 동진하여 카나우지를 16년만에 회복하였다. 이후로는 나가부타 2세가 사망한 833년에 잠깐 팔라 왕조가 카나우지를 함락한 일을 제외하고는 11세기 초반까지 구자라-프라티하라 왕조는 카나우지를 영위할 수 있었고, 10세기 후반부터는 그 수도가 되었다. 2세기 (812년 ~ 1018년)에 걸친 프라티하라 지배기에 카나우지는 북인도 최대의 도시로서 번영하였다.
프라티하라 (784 ~ 786년)
라슈트라쿠타 (786 ~ 793년)
팔라 (793 ~ 795년)
프라티하라 (795 ~ 796년)
라슈트라쿠타 (796 ~802년)
팔라 (802 ~ 812년)
프라티하라 (812 ~ 833년)
팔라 (833년)
프라티하라 (833 ~ 1012년)
2.3. 중세 후기 ~ 현재
1018년, 가즈니 왕조의 술탄 마흐무드가 도시를 함락하였다. 하지만 가즈니 조는 마흐무드 사후 약화되었고, 현재의 파키스탄 일대로 축소되었다. 따라서 1090년에 카나우지는 토착 왕조인 가하드발라 왕조의 수도가 되었고 고빈다찬드라 대왕 대에는 10세기의 영광을 넘어선 황금기를 맞기도 하였다. 하지만 1193년, 찬드와르 전투에서 힌두 연합군은 무함마드 고리가 이끄는 구르 왕조 군에게 대패하였고, 카나우지에 입성한 구르 군대는 도시를 대대적으로 파괴하였다. 도시는 13세기 전반에 델리 술탄국 군대에게 재차 파괴되어 작은 마을로 전락하였다. 1540년, 도시 인근 벌판에서 수르 제국의 세르 샤가 무굴 제국의 후마윤을 패배시켜 잠시나마 무굴 제국을 북인도에서 축출시키기도 하였다. 19세기 이후 카나우지는 향수와 담배 생산지로 인구를 회복하였다. 도시 안팎에는 불교 사원 터와 중세 시대의 성벽과 자미마스지드 사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