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초

 

1. 개요
2. 생애
3.1. 혜초의 시



1. 개요


慧超
(704~787)
통일신라 시대의 승려. 천축(오늘날 인도)을 갔다와 여행기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혜초의 생애에 관해서는 오랫동안 미궁 속에 빠져 있었는데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대략적인 면모가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신라 성덕왕 22년인 723년 당나라 광저우에 가서 인도[1]의 승려 금강지제자가 되었는데 금강지의 권유로 인도 순례를 결심해 당나라 남쪽 바닷길을 통해 나신국(裸身國)을 경유하여 인도 동해안에 도착했다. 이후 인도에서 육로로 불교 성지를 순례하였는데 중앙아시아 지역을 비롯해 보통 중동 지역으로 보는 페르시아 일부 지역까지 여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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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의 여정. 이미 혜초가 인도를 방문하던 시기에는 인도의 불교는 점점 쇠하고 힌두교가 극성하고 있어 혜초가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이후 파미르 고원을 넘어, 727년경 당나라 안서도호부가 있는 쿠차를 거쳐 733년 당나라에 돌아와 장안 천복사의 도량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를 스승으로 모시며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주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大乘瑜伽金剛性海曼珠實利千臂千鉢大敎王經)》이라는 경전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혜초의 여정 # 여정 지도2.
740년부터 경전의 한문 번역에 착수하였으나 741년 금강지가 죽자 중단하였다. 혜초는 금강지의 법통을 이은 불공삼장 6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 당나라에서도 이름을 떨쳤다. 불공은 죽기 직전인 774년 5월 7일 자신의 사후 법을 이을 증득제자 6명에게 뒷일을 부탁했는데 신라승 혜초가 포함되어 있었다. 780년 4월 우타이산 건원보리사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지며 건원보리사에서 위에서 나온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서'를 필사하고 서문을 지었는데 이것이 현존한다. 그 후의 행적은 알 수 없지만 당시 이미 고령이라 신라로 돌아왔다고 보기는 무리이고 기록도 없어 아마 건원보리사에서 입적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전해지는 부도가 있었지만 문화대혁명 당시 반달당해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 신라 승려들의 인도 순례는 혜초 외에도 많이 있었는데 이름이 기록에 남은 사람들만 해도 아리야발마, 혜업, 현각, 혜륜, 오진 등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인도 현지에서나 돌아오는 길에 죽었고 당나라까지 돌아오는 데 성공한 이는 혜초를 비롯해 현태, 원표 정도가 있었다. 혜초의 경우는 비록 일부분이지만 기행문까지 현대까지 남은 것이다.

3. 왕오천축국전


혜초의 인도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인 펠리오에 의해 중국 간쑤성둔황 막고굴에서 발견되어[2] 고대의 동서 교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3.1. 혜초의 시




[1] 인도 유학승으로 비슷한 인물로 백제겸익이 있다.[2] 혜초가 신라 출신이기는 하지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후 신라로 귀국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까지 전해지는 혜초의 저작 역시 신라가 아닌 중국에서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