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조 덴노
1. 개요
일본의 제23대 천황. 고사기에는 오케노이와스와케노 미코토(袁祁王, 袁祁之石巣別命)라 나오고, 하리마 국풍토기(播磨国風土記)에는 '호케 덴노(弘計天皇)'로 기록하고 있다.
17대 리추 덴노의 아들 이치노헤노시하 황자(市辺押磐皇子)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가쓰라기노 아리노 오미(葛城蟻臣)의 딸, 하에히메(荑媛)이다. 이토요아오 황녀(飯豊青皇女)는 친누나이고, 24대 닌켄 덴노는 친형에 해당한다. 황후는 나니와오노 왕(難波小野王)이며 자녀는 없었다.
2. 생애
《일본서기》에 따르면 20대 안코 덴노 3년 10월 1일, 아버지인 이치노헤노시하 황자(市辺押磐皇子)가 21대 유랴쿠 덴노에게 살해당하고, 호케(弘計, 후의 켄조 덴노)는 형인 오케(億計, 후의 닌켄 덴노)와 함께 도망쳐 숨었다.
단바 국(丹波国) 요사 군(与謝郡, 지금의 일본 교토부 단고 반도의 동쪽)으로 갔고, 이후 하리마 국(播磨国) 아카시(明石)와 미키(三木)의 시로(志染) 동굴에 숨어 살면서 형제 모두 이름을 다니와노 와라와(丹波小子)라 바꾸고, 시지미노미야케노 오비토(見屯倉首)를 섬기며 오랫동안 말과 소의 사육에 종사하고 있었다.
22대 세이네이 덴노 재위 2년 11월에 니야(新室)에서 벌어진 연회 자리에서 노래로서 스스로 왕족임을 밝혔다. 세이네이 덴노는 아내와 자식이 없었기에 칙사를 보내 이듬해 두 황자를 궁중에 맞아들이고, 4월 7일(5월 10일)에 형인 오케(億計)를 황태자로 삼았다. 호케(弘計) 자신은 황자가 되었다.
세이네이 덴노가 재위 5년 2월 27일에 사망했을 때, 황태자였던 오케(億計)는 신분을 밝힌 큰 공로를 이유로 남동생 호케(弘計)에게 대왕위를 양보하려 했고, 호케(弘計)가 이를 사양하면서 한동안 공석이 된 왕위를 이토요아오 황녀가 집정하였다.
결과적으로 형의 설득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호케(弘計)가 켄조 덴노로 즉위하였다. 황태자는 오케(億計)가 계속해서 맡았는데, 천황의 형이 황태자였던 사례는 그 이후 찾아볼 수 없다.
죄없이 죽임을 당한 아버지를 조문하고, 또한 아버지를 죽인 유랴쿠 덴노에 대한 보복으로 그의 무덤을 파괴하려 했으나, 외지에서 오랜 생활을 한 탓에 민중을 아끼고 사랑하는 정치를 했다고 전한다.
재위 3년 4월 25일에 사망하였다. 《고사기(古事記)》에는 38세(다만 치세는 8년이라고도 한다), 《일대요기(一代要記)》에는 48세로 되어 있으며, 즉위 전에 시비노오미(志毘臣, 헤구리 씨(平群氏))와 사랑 싸움을 벌이다 밤에 그를 습격해 죽였다는 이야기도 《고사기》에 전하고 있다.
즉위기간은 485~487년으로 2년이다.
3. 기노 오이와노 스쿠네의 난
《일본서기》에 따르면 켄조 덴노가 사망한 해에, 한반도의 임나에서 기노 오이와노 스쿠네(紀生磐宿禰)가 삼한(三韓)의 왕이 되고자 가야인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백제(百濟)의 공격으로 실패하고 기노 오이와노 스쿠네는 왜(倭)로 돌아갔다는 기사를 전하고 있다.
4. 가계
- 황후 : 나니와노오노노 왕(難波小野王, ?~489)
5. 기타
시호에 '''와케'''가 들어가기에 몰락한 와케 계열의 후손이라는 추측이 있다. 또 다음 대의 시호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세력이라는 말도 있다. 세이네이 덴노가 황자로 임명했다고 하지만, 세이네이 덴노는 시호에 '''야마토네코'''가 들어가 가공인물이라는 추측이 많다. 왕위의 공석을 이토요아오 황녀가 맡은 적이 있었는데 그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