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브랑쿠시

 

'''Constantin Brâncuși'''
'''콘스탄틴 브랑쿠시'''
[image]
'''출생'''
1876년 2월 19일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 페스티사니(Peștișani)
'''사망'''
1957년 3월 16일 프랑스 제4공화국 파리
'''장르'''
'''초현실주의''', '''큐비즘'''
1. 소개
2. 생애
2.1. 초기
2.2. 중기
2.3. 말년
3. 작품
4. 여담


1. 소개


루마니아조각가.
같은 루마니아 태생의 작곡가 제오르제 에네스쿠와 마찬가지로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으며 알베르토 자코메티, 헨리 무어 등과 함께 20세기 현대 조각의 거장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2. 생애



2.1. 초기


1876년 루마니아 페스티사니(Peștișani)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브랑쿠시의 어린 시절은 가난으로 점철되어 있었으며 당시만 해도 미술과는 거리가 아주 먼 삶을 살았어야 했다. 18세 이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으며 목동, 잡화상 직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해야 했다. 그러나 이 당시에도 나무 조각을 이용해 형태를 만들어내는 데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이는 현대 조각 거장으로서의 브랑쿠시의 미래를 예언하고 있었다.
18세에 브랑쿠시는 주변 물건들을 이용해 바이올린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으며 이를 눈여겨 본 한 사업가의 도움으로 그는 크라이오바 미술 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고 여기서 미술가로서의 브랑쿠시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2.2. 중기


1898년 크라이오바 미술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브랑쿠시는 수도로 올라가 상위 교육 기관인 부쿠레슈티 미술 학교에 입학하고 조형을 공부하게 된다. 여기서 그의 스승이었던 해부학 교수 디미트리 제로타(Dimitrie Gerota) 박사의 영향을 받은 브랑쿠시는 해부 실습을 통해 인체의 외형적 특징보다 내부의 속성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되고 여기서 형태의 단순화, 추상화를 통한 고유 본질성을 살린다는 브랑쿠시 특유의 작품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1903년 브랑쿠시는 이후 주 활동 무대가 될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게 되고,[1] 오귀스트 로댕의 작업장에서 일하면서 그의 작품들을 눈으로 직접 접하게 되고 감명을 받는다. 그러나 2달 만에 브랑쿠시는 '큰 나무 밑에서는 아무것도 자라날수 없다.'면서 작업장 견습생을 그만두게 되고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 경향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1908년 이후 브랑쿠시는 현대 조각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잠이 든 뮤즈 (La Muse endormie, 1910)'''[2]을 발표하면서 국제적인 관심을 받게 된다. 잠이 든 뮤즈와 연작 '''키스(Le Baiser)'''[3]를 포함한 그의 작품들은 곧이어 프랑스뿐만 아니라 본국 루마니아 그리고 미국에서도 호평을 받게 되었고, 독립 예술가 협회(Société des Artistes Indépendants) 전시회와 미국 최초의 현대 미술 전시회인 애머리 쇼(Armory Show)에도 초청받게 된다.[4]
이와 같이 1910년부터 1930년대까지 브랑쿠시는 혁신적인 조형 스타일로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특히 미국에서 그의 작품들은 많은 관심을 받게 된다. 이러한 현대 추상 조각뿐만 아니라 브랑쿠시는 그의 조국인 루마니아 민속 미술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었고 1938년에는 그가 자라났고 젊은 시절을 보낸 페스티사니 근처 타르구 지우(Târgu-Jiu)에 제 1차 세계대전 전사자 추모 작품과 그의 추상 조각들을 설치함으로서 조국에 대한 애착도 드러내보인다.

2.3. 말년


이렇게 루마니아와 프랑스, 미국을 돌아다니며 정열적인 예술 활동을 하던 브랑쿠시였지만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소련의 지원을 받은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루마니아를 공산화시키면서 브랑쿠시는 루마니아로의 영구 귀국을 거부하고 여생을 프랑스 등지에서만 보내게 된다.
다만 이후에도 루마니아를 몇 차례 방문하긴 하였으나 스탈린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브랑쿠시는 영구 정착을 끝내 거부하게 된다. 1957년 파리에서 81세를 일기로 타계한 브랑쿠시는 유언으로 루마니아에 남아있던 그의 작품들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루마니아 공산 정권은 그의 유언을 무시해버린다.
이후 공산 정권 시절 루마니아 내에서는 사실상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브랑쿠시는 타계 이후 33년이 지난 1990년에 이르러서야 민주화된 루마니아 정부에 의해 루마니아 학술원 회원에 위촉되게 된다.
프랑스에 남아있던 그의 작품들은 역시 그의 유언에 따라 프랑스 정부에 유증되었으며 현재는 파리 국립 현대 미술관과 퐁피두 센터에 전시되어 있다.

3.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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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맞춤'''
(The kiss; Sărutul[A]), (1907~08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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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뮤즈'''
(Sleeping muse; Muza adormită[A]), (1909~10년 작)
시리즈 작품으로, 위 사진은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다. 점점 추상적으로 묘사가 적어지는 얼굴의 모습이 매우 세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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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가니 양[5] (마드모아젤 포가니)'''
(Mademoiselle pogany), (1912년 작)
흰 대리석 작품이다. 황금 빛 재질로 만든 버전(1913년 作)도 유명하다. 시리즈로 2편(II)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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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속의 새'''
(L'Oiseau dans l'espace; Bird in space[6]), (1923년 작)
지금으로서는 대단한 명작으로 평가받지만, 과거는 달랐다. 이 예술품을 예술품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를 두고, 프랑스에서 이 작품을 구매한 미국인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과 미국 세관 사이에 법정 충돌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당시 미술품은 면세 품목이었는데, 세관은 이 작품이 새를 묘사한 것이 아니며 '''미술품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해 이 작품에 세금을 물렸다. 스타이켄은 세관을 고소했고, 세관 측은 다음과 같은 뼈 때리는 질문을 날렸다.

당신이 만약 사냥을 하다가 나무 위에 저게 있으면 (새라고 생각하고) 쐈을 것 같습니까?

이 질문을 듣고는, 스타이켄도 당당히 '그렇다'라고 대답하진 못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사람들의 대중적인 조각(Sculpture)에 대한 이해로서는, 추상성이 강한 브랑쿠시의 이 작품이 도대체 어딜봐서 새인 건지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브랑쿠시는 이 작품에 관해 "나는 평생 비상에 대한 본질을 추구했다."라고 증언했고, 미국 재판부는 새를 연상하기는 어렵지만 모습이 아름답다는 점[7]과 작가의 의도를 고려해 예술품으로 인정했다. 작품의 설명과 해당 사건을 다룬 영어 글.

4. 여담


2015년 루마니아 정부는 브랑쿠시의 탄생일인 2월 19일을 루마니아의 공휴일로 지정했다.

[1] 이때 브랑쿠시는 루마니아부터 프랑스 파리까지 근성 충만한 도보여행으로 이동한다.[2] 아래의 작품 문단에 서술된 잠자는 뮤즈(Sleeping Muse)와 같은 작품이다. 번역에 따른 차이일 뿐이며, 'La muse endorimie'는 프랑스어다.[3] 아래의 작품 문단에 서술된 입맞춤(The kiss)와 같은 작품. 번역에 따른 차이일 뿐이며, 'Le Baiser'는 프랑스어다.[4] 이는 지인이었던 마르셀 뒤샹의 초대로 이루어졌다. 뒤샹은 이후로도 브랑쿠시의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데 도움을 준다.[A] A B 왼쪽은 영어, 오른쪽이 루마니아 원어 명칭[5] 아가씨 양(孃).[6] 왼쪽은 프랑스어, 오른쪽은 영어. 루마니아어 원어 명칭은 "Pasărea în văzduh".[7] '예술'에 부합한다고 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