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4공화국

 



'''프랑스 공화국'''
'''République frança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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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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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 1958년
'''표어'''
"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자유, 평등, 우정)
'''국가'''
라 마르세예즈
'''위치'''
오늘날의 프랑스알제리
전세계 일부 식민지
'''수도'''
파리
'''인문환경'''
'''인구'''
41,800,000명(1950년)
'''언어'''
프랑스어
'''정치'''
'''정치체제'''
의원내각제
'''국가원수'''
대통령
'''주요 수상'''
폴 라마디에
로베르 쉬망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주요사건'''
1946년 성립
1958년 해체
'''통화'''
프랑
'''성립 이전'''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해체 이후'''
프랑스 제5공화국[1]
1. 개요
2. 정치
3. 제국의 붕괴
3.1. 인도차이나 전쟁
3.2. 알제리 전쟁, 제4공화국의 붕괴
4.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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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6년 10월에 국민투표로 성립된 정부이다. 프랑스 제3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의원내각제를 채택하여 1958년 10월까지 존속했다. 1958년 10월 국민투표로 프랑스 제5공화국이 성립되면서 해체된다.

2. 정치


프랑스 제4공화국은 양원제의원내각제를 정치적 기반으로 건설됐다. 명목상으로 국가 원수는 여전히 대통령이 수행하였지만 의회에서 선출되는 상징적인 존재로, '''실권은 총리'''에게 주어졌다. 실질적 국가원수였던 총리에게는 내각 임명권과 신임안 제청권이 주어졌으며, 제3공화국 말기의 혼란스러운 정치상[2]에 대한 반성으로 내각 구성원들에 대한 보호 장치가 대폭 강화됐다. 대통령제와 달리 내각제에서는 내각구성원들이 의회에 종속된 관계이므로 아무래도 의회가 마음을 먹고 꼬장을 부리면 운신에 제한이 크게 걸릴 수 밖에 없기 때문.
다만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췄음에도, 초대 총리였던 폴 라마디에가 의회에게 단순히 총리 선출권 뿐만이 아니라 총리가 조각한 내각에 대한 동의안까지도 제출하는 '''선례'''를 만들면서, 이후 총리들은 내각을 구성할 때마다 의회에 동의를 구해야만 했고, 군소정당이 난립했던 프랑스 제4공화국에서 이는 필연적으로 내각의 힘을 약화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드골과 그들의 지지자들은 계속해서 제4공화국을 반대하며 내각을 흔들었고[3] 사회당, 공산당, 급진당[4], 대중공화운동, 농민과 소상공인들의 국민중심 사이에서도 내각 구성 등으로 갈등이 지속된다.
그래도 정부 자체는 온건 세력들의 연정을 통해서[5] 어찌저찌 굴러가긴 했지만[6] 내각은 여기도 13년 동안 23번 바뀌는 등 뒤숭숭한 와중에 정권 붕괴에 결정타를 날린 것이 바로 프랑스 제국의 종말을 알린 인도차이나 전쟁알제리 독립 전쟁이었다.

3. 제국의 붕괴


프랑스는 2차 대전 와중에도 자신들의 식민지들을 지키고 싶었고, 이들을 독립시켜줄 생각이 별로 없었다. 물론 프랑스 내에서도 이미 저물어가는 제국주의 시대의 종말을 깨달은 반식민주의자들이 늘어나는 형국이었지만 여전히 식민주의자들 또한 강성한 여론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래서 2차 대전 종전 이후 식민지에서 거세진 독립 열기를 걸핏하면 무력으로 찍어누르려 했다.
하지만 세계대전으로 이미 피폐해진 프랑스는 이 식민지들을 유지할 능력 자체가 없었다. 오히려 무리를 하면서까지 군대를 투입했다가 성과는 하나도 내지 못하며 피는 피를 부르는 악순환을 불렀고, 국내 여론은 식민주의와 반식민주의가 양분된 가운데 인도차이나알제리에선 프랑스군이 반군에 참패하고 막대한 피와 돈만 날린다는 국제 사회의 비난이 올라가며 당위성까지도 잃어버리자 결국은 식민지들을 독립시키게 된다.

3.1. 인도차이나 전쟁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끔찍한 패배를 경험했고, 국내외에서 종전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드높았다.[7] 이미 십년 가까운 전쟁 기간 동안 9만명의 사망자, 11만명의 부상자, 3만명의 포로를 배출한 와중에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가 정권을 잡았고, 망데스 정권은 1954년 제네바 합의를 통해 베트남의 독립을 사실상 인정한다.

3.2. 알제리 전쟁, 제4공화국의 붕괴


알제리 전쟁은 국내외에서 프랑스에 대한 거센 반발과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어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엔 미국이 공산주의 세력 확대 방지를 명분으로 군사 지원을 해주기라도 했지만, 알제리에선 미국조차도 프랑스에 대한 군사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게다가 베트남에선 캄보디아, 라오스 등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일부 동남아 주변국들이 프랑스를 편들기라도 했었지만[8] 알제리는 과거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튀니지와 모로코 같은 알제리 주변국들조차 프랑스 편을 들지 않고 쓸데없는 짓 중단하고 알제리를 독립시키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허나 이렇게 국제 여론이 안좋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우익 계열은 알제리의 독립에 대해 거세게 반발했고, '피에 누아르'라는 명칭의 프랑스에서 이민해 온 알제리 거주 프랑스계 백인들도 아무래도 불안하니 알제리 독립을 결사반대했다. 여기서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은 군부. 1958년 5월 군부 세력은 알제리 평화협상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공수부대가 코르시카 섬을 점령하고 알제리 내에서는 외인부대가 봉기에 호응했다.
이들은 프랑스령 알제리 수호와 드 골 장군 복귀를 외치며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파리까지 진격하겠다고 대놓고 협박을 가한다. 이에 내분으로 인한 피를 보기 싫어한 당시 정권은 그들의 요구를 수용해 드 골을 총리로 추대하며 6개월간 전권을 위임해 헌법을 작성하도록 했다. 사실상 알제리 독립운동에 유화적이던 좌파 정부에 불만을 품던 당시 군부가 내전 위협으로 드골을 옹립한 꼴.[9]
그렇게 총리에 취임한 드골은 기세를 타 이원집정부제를 골자로 하는 새로운 헌법을 도입하여 대통령에 선출된다. 그리고 그렇게 제5공화국으로 넘어가면서 제4공화국은 막을 내리게 된다.

4. 성과


끝이 훈훈하게 마무리되진 못했던 제4공화국이었지만, 그래도 프랑스가 더 선진적인 사회로 발전해 나가는데 기여한 바도 적잖게 있었다.
정확히는 1944년 임시정부 시절 제4공화국의 제헌의회를 선출할 때 처음 허용됐다.
오늘날 복지국가 프랑스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다.
  • 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 철강 석탄 공동체(ECSC)를 창설해 유럽 통합으로 가는 길을 확보했다.
  • 서독에게 우호적인 자세를 보여주면서 유럽 내 평화를 확보.
전신 제3공화국이 베르사유 조약과 같이 가혹한 조건을 바이마르 공화국에게 강요하다 나치 독일2차 대전을 불러일으킨 것을 생각하면 무시할 수 없는 외교적 성과이다. 물론 그렇다고 독일을 가만 내버려둔 것은 아닌데, 당시 아데나워 독일 총리가 추진한 독일 재무장은 끝까지 태클을 걸었으며, 심지어 아데나워가 처음 총리 자격으로 프랑스를 방문할 때도 정부 요인 중 어느 누구도 마중 나가지 않으며(...) 개무시를 했다. ECSC의 창설도 독일의 석탄 및 철강 사용처와 양을 파악해 재무장을 방해하겠다는 생각이 일부 개입되어있을 정도였다. 거기다 자르 보호령을 놓고 프랑스가 서독에게 보여준 태도는 프랑스 내에서도 '베르사유 체제의 재현'이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였다.
[1] 이원집정부제 채택[2] 제3공화국의 70년 동안 내각이 104번 바뀌었다. 평균적으로 8개월에 한번꼴로 내각이 엎어진 셈. 오죽하면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드골한테 '프랑스는 수상이 너무 자주 바뀌어서 기억이 안난다'고 할 정도. (다만 프랭클린은 드골도 잘못하면 독재자 될 수 있는 상이라며 우려하기도 했다니 아이러니.) 물론 그래도 70년 가까이 굴러간거 보면 혼란스러웠다는 것도 좀 주관적이긴 하다. 실제 제3공화국 시절은 벨 에포크라 불리는 번영기였으며, 프랑스 공화정 역사상 최초의 안정적 집권기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4공화국도 제3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의원내각제가 채택된 것. 다만 최후가 나치한테 털리는 나름 안습한 역사였다 보니 일각의 부정적 인식도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3] 드골은 열렬한 대통령제 옹호자였고, 그래서 제4공화국 제헌의회와 대판 싸웠다. 드골은 제4공화국의 헌법에 대해 "프랑스인의 1/3은 체념해 버리고, 1/3은 거부하고, 나머지 1/3은 아예 무시해 버렸다."라고 빈정거리기도 했다.[4] 명칭은 급진사회당이었지만 이름과는 다르게 중도 리버럴 정당이었다. 정당 명칭이 급진당인 이유는 이 세력이 구 왕당파에 비해 급진적인 공화주의 세력이었기 때문. 제3공화국 시절 중산층의 지지를 받으며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정당으로 사실 이때도 중도좌파 진영에 좀 더 가까운 정당이긴 했지만 사회주의 정당이 크면서 상대적으로 중도화되었다.[5] 보통은 사회당(당시에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과 급진사회당, 대중공화운동(이후 민주중도로 개편되어 사라졌다)의 연합으로 정권이 구성되었다. 이를 Troisième Force, 우리말로 '제3세력'이라고 했다. 극 초반기에는 드골파와 공산당도 정권에 참여한 적이 있었지만 전자는 드골이 은퇴하면서, 후자는 연립정권에서 탈퇴하면서 정권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6] 대내적으론 전후 복구기였고, 대외적으론 친서방 반공정책을 펼쳤다. 물론 여기서 반공은 사회민주주의 말고 소련식 공산주의.[7] 1954년의 여론조사에서 베트남전쟁의 지속을 요구한 프랑스인은 불과 10%도 안될 지경이었다.[8] 사실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몹시 안 좋은 앙숙관계다. 자세한건 이웃나라/안 좋은 사이 항목 참고.[9] 다만 재미있는건 드골 역시 결과적으론 알제리 독립운동에 유화적인 포지션을 취했고, 이에 군부 강성파는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지만(...) 진압당하고 여차저차해서 1962년 알제리도 독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