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스트 로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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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조각가. 근대 조각의 시조이며, 근대 조각 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다.
그가 추구한 웅대한 예술성과 기량은 조각에 생명과 감정을 불어넣어, 예술의 자율성을 부여했다.
2. 생애
하급관리의 아들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형사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늘 나는 바보 같은 아들을 두었어라고 한탄하며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었던 로댕을 부끄러워했었다고 한다. 자라서 14세 때 국립공예실기학교에 입학, 조각가로서의 기초를 닦았다. 좋아하던 누나가 죽어서 너무 큰 상심의 충격으로 사제가 되겠다고 수도원으로 들어갔으나 예술적인 천분이 도저히 신부의 길을 가는 것에는 맞지 않음을 알아 본 어느 신부가 스스로 가끔 로댕의 조각과 스케치의 모델이 되어줄 만큼 그를 잘 보아서 그를 타일러 세속으로 돌아와 이윽고 로댕이라는 불멸의 조각가가 된다
1864년 평생의 반려자인 재봉사 로즈 뵈레를 만났는데 로즈는 아들 오귀스트외젠 뵈레(Auguste-Eugène Beuret)를 낳았으나[2] , 정식으로 결혼식은 하지 않다가 로댕이 죽기 전인 1917년에 가서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3] 처음으로 조각 전시회를 열었던 그해 살롱에 처음으로 출품한 <코가 찌그러진 사나이>는 그 생생한 사실적인 묘사가 심사위원들에게 거부감을 주어 낙선했다. 이후 1875년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크게 영향을 받은 후 1878년 파리에 돌아와 벨기에에서 제작한 <청동시대(靑銅時代)>를 출품하였다. 이 청동시대는 또한 실제 사람에 찰흙을 붙여 모델링을 했다는 의혹을 받을 정도로 완벽했다.[4]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서 특별 개인전을 가져 국제적 명성을 얻은 로댕은 시인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5] 등으로부터 찬사를 들었으며 제자 카미유 클로델과의 비극적인 사랑[6] 으로 대중적 관심을 끌기도 했다. 참고로 로댕과 카미유의 이야기는 미술계 웹툰 핑크레이디에서도 언급되었는데 연우가 서나의 그림체로 함께 작업한 작품에 혼자만 작가로 이름을 올린 핑크레이디 그림작가 은폐사건의 밑밥으로 깔아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으면서 이 사건이 '현대판 카미유 클로델 사건'으로 불리기도 했다.[7] 카미유의 작품은 로댕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좋지 않은 소문이 많이 돌기도 했다. 다만 현재는 오히려 로댕이 카미유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둘은 같이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고 카미유가 로댕에게 자신의 진심을 담아 작품을 바치기도 했으니 서로 영향을 받았을 거라는게 정설이다.
그 이후의 조각계는 직간접으로 모두 로댕을 출발점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로댕이 가지는 미술사적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가 의도적인 왜곡을 한 것이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나 <칼레의 시민>을 보면 손이 다른 신체 부위에 비해 더 크게 묘사가 되어있는데 이로써 더욱 효과적인 감정 표현을 할 수 있었다. 이는 회화에서 인상주의가 등장하면서 사실묘사에서 벗어난 것과 필적하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사실주의 작가가 아님에도 사실적으로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조각 자체에 감정이입이 잘 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실제로는 잘 취하지 않는 동작 등을 통해서 역동성을 부여하며, 미켈란젤로로 대표되는 인체비례와 사실주의적 조각과는 차이가 있다고 보여질 만큼 정밀하다기 보다는 몇 번 덜 깎은 것 같은 조각기법은 감정과 생기를 불어 넣는다. 예로서, 그의 걸작 중 하나인 <생각하는 사람>이 자세에서 오는 '고뇌'와 조각기법에서 오는 아우라 또는 카리스마가 어우러져 보다 감정이입이 잘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어느 연작 시리즈 속의 한 작품으로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인데 너무나도 유명해진 나머지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것처럼 원래의 군체(群體) 작품들보다도 더 유명해져 버렸다.
<칼레의 시민>의 경우 그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묘사해서 당대엔 큰 논란이 되었다. '칼레의 시민'이란 백년전쟁 당시 영국군에게 항복할 때 칼레 주민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선 칼레의 시민 대표 6명을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로댕은 이 시민들이 죽음을 두려워 하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당연히 공개된 직후에는 영웅적이고 당당한 모습을 기대했던 대중들의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로댕의 의도는 이 6명의 시민 역시 특별한 영웅이 아닌 평범한 인간임을 묘사함으로서, 오히려 평범한 인간이면서도 희생을 감수한 용기를 더욱 부각시키려 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로댕의 의도도 받아들여지고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칼레 문서의 '칼레의 시민들' 항목을 참조.
1917년, 온갖 병과 같이 치매까지 걸려서 77살 생일을 며칠 지내고 병원에서 발작하다가 생을 마감했으며 유언이 '''"난 신이다!"''' 였다고 한다. 이에 돌보던 간호사가 귀찮다는 듯이 "맞아, 당신은 신인데 똥오줌 누고 헛소리하며 죽어가는 신이야."라고 톡쏘는 말로 답했다고 한다.
3. 그 외
로댕의 사망 후 그의 주거 및 전재산은 만년의 작업장이었던 파리의 호텔 비롱에 그의 미술관을 개설한다는 조건으로 국가에 기증되었다. 1916년 국립로댕미술관이 발족되어 조각의 대표작은 물론 데생·수채화 등도 전시되고 있다.
미국의 필라델피아미술관에도 로댕미술관이 부설되어 있으며 로댕의 작품 가운데 《세 그림자》 《이브 흉상》 《영원한 청춘》 등은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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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유명한 작품은 위의 《생각하는 사람》[9] 이다. 원래는 지옥의 문이라는 조형물의 일부였고 작은 크기였는데 나중에 위 사진과 같은 큰 조형물이 별도로 제작되었다. 실물 사이즈는 여러 종류가 만들어졌으며 로댕의 관여가 없는 것, 심지어 사후에 만들어진 것도 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이그노벨상에서는 '생각하다 떨어진 사람'으로 패러디 되었다. 또 다른 패러디로 타카라토미가 2013년 11월에 내놓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화가 알폰스 무하와 잠시 교류했으며, 무하는 이 시기 로댕의 영향으로 잠시 조각을 했다.
주문받은 작품을 정해진 기일보다 훨씬 넘겨서 제출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게다가 예술가로서의 자부심 때문에 선주문을 넣은 사람들의 요구사항을 작품에 거의 반영하지 않고 자기 주관대로 만들어 잦은 불화를 빚기도 했다. 일례로, 프랑스가 낳은 위대한 소설가인 오노레 드발자크의 동상을 만들어달라는 의뢰를 받았을 때, 의뢰인인 파리 시측에서 발자크를 최대한 멋있게 표현해 달라고 요구했더니, 웬 못난이 하나를 만들어 가지고 오자 시청 측에서 어이없어 했다. 로댕 본인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표현하느라고 그의 못생긴 얼굴을 고증한 것 뿐이라고(...) 해명했으나, 이 때문에 되려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인간문화재급의 조각가라는 사람이 한용운 선생의 동상을 만들었는데, 그 모습이 고고한 독립운동가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초라한 외모의 땡추로 표현한 바람에, 서울 시민들과 서울특별시장의 분노를 산 격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시공탐정 겐시군(한국판 제목은 사차원 탐정 똘비)에서는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담당 성우는 이시카와 히로미.
심즈 4에서는 생각하는 사람을 오귀스트 심로댕이 만든 앉아있는 사람 조각상으로 패러디했다. 가격은 600시몰레온이며 설치 시 환경을 +3 올려준다.
이 조각상은 프랑스의 조각가 오귀스트 심로댕의 초기작 중 하나로서 대중의 인지도가 낮은 작품에 속합니다. 거듭된 거절과 실패는 그를 철학적 상념으로 이끌었고 결국 이 조각의 자매 작품인 생각하는 사람이 태어났지요. 앉아 있는 작품은 대중으로부터 같은 수준의 인정을 받지는 않지만, 조각가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좋습니다. 익명의 아티스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철학이요? 그놈의 허세! 1880년대에 심로댕은 유행을 좇는 힙스터일 뿐이었어요."
4. 대표작
[1] 영어 위키백과의 로댕 문서에서는 François-Auguste-René Rodin(인물정보란)과 François Auguste René Rodin(본문)을 둘 다 병기한다. [2] 정신박약아였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호적에도 넣지 않고 로즈 성을 따르게 된 사생아로 만들어서 로댕 부모조차도 이해를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로즈는 로댕 부모와도 잘 지냈다고 한다.[3] 상속권 문제로 주변에서 권유하여 결혼했다. 친한 사람들을 불러 결혼식도 올렸는데, 로즈는 결혼 2주만에 로댕보다도 몇 달 먼저 세상을 떠나 정작 결혼의 진짜 이유였던 상속권 문제는 상관없어졌다. 이후 상속은 정부에 귀속된다. 사실, 법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사실혼 관계로 살면서 평생을 자신에게 헌신한 아내 로즈에 대한 미안함때문에, 어차피 결혼식을 치를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는 아직 로댕이 조각가로 성공하기 전이었기에 생활고에 시달렸고 그래서 식을 치를 여력이 없었는데, 이후에 그가 큰 성공을 거두어서 재산 상속 문제가 거론될 만큼의 부를 얻자, 부부가 평생의 소원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 때문에, 로즈가 결혼식 이후 고작 2주 만에 사망하자, 로댕은 큰 상실감에 빠졌다.[4] 이 작품이 처음 나왔을때 많은 곳에서는 엄청난 극찬을 받았으나 어느 모 예술 평론가가 신문에 투고한 글에서 석고뜨기를 했다는 음모론을 펼치며 작품 평가가 깎아 내려졌다. 이로인해 프랑스와 벨기에에서는 그가 석고뜨기 전문가로 이름이 난 탓에 평가가 절하되기도 했다. 로댕은 필사적으로 이 작품을 박물관에 계속 두고 싶었으나 여론 악화로 인해 내려지고 만다. 그 뒤부터 로댕은 언론사를 극도로 두려워했다고..[5] 릴케 같은 경우 로댕의 조수였는데 너무 나대는 탓에 주위에서 안 좋은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로댕은 릴케와 싸운 후에 절교했으나 나중에 화해한다.[6] 물론 카미유와의 사랑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비극적 사랑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로댕 때문에 카미유의 삶이 비극이 되는 구조라서...[7] 단, 로댕은 스승의 입장이었고 재능이 있었지만 이 경우는 서나가 연우에게 작화를 지도했으며 연우가 서나에 비해 만화적 소양이 부족하다. 거기다가 로댕은 제자가 없어도 천재 조각가였지만 이 작자는...[8] 로댕의 조각상의 모조품이 한국에 있다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진품이다. 애초에 청동을 깎은 것이 아니라, 원형은 석고로 제작되어 청동을 녹여 부어 만드는 것이다. 마치 판화와 비슷하다 볼 수 있겠다. 때문에, 청동상을 보면, 몇번째 에디션이라는 식으로 설명이 되어있기도 하다.[9] 이 작품은 로댕의 다른 작품인 《지옥의 문》 건너편에 배치되었으며, 《지옥의 문》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조각한 작품이다. 즉,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 문 앞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며 이 사람들을 도와줄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