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메르 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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ខ្មែរក្រហម(Khmerokraham)
1. 개요
2. 좌익무장단체 시절
3. 크메르 루주 정권시절
4. 게릴라 투쟁에서 해체까지
5. 과거사 청산과 전범재판
6. 관련 문서
7. 출처


1. 개요


'붉은 크마에'라는 뜻으로, 1967년 탄생한 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무장단체. 80년대 국내 언론이나 교과서를 통해 알려진 이름인 크메르 루주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975~79년 캄보디아를 지배하였으며, 자유민주주의 관점에선 공산주의의 나쁜 점을 설명할 때 단골 소재가 되기도 한다.
이원복 교수 학습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 따르면, 해당 단체명은 원래 1960년대 시아누크 국왕이 캄푸치아 공산당이나 공산당 지지자들을 지칭할 때 쓰인 호칭이라 한다.

2. 좌익무장단체 시절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아 탄생하게 되었으며, 베트남 전쟁 시기 세력을 확대하여 캄보디아 농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사실 '''붉은 크마에가 세력을 확장하고 인기를 얻게 된 배경에는 미국의 직간접적인 영향이 크다.''' 베트남 전쟁 과정에서 미군은 베트콩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캄보디아 지역도 폭격을 가했으며, 친미 우익세력의 쿠데타를 획책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캄보디아는 중립국이었으므로 캄보디아의 루트를 통해 미군을 공격하는 베트콩들을 처리할 수 없었다. 물론 미국이 그냥 아무 생각없이 벌였던 것은 아니었다. 본래 캄보디아는 소련과 미국 사이에서 줄다리기 외교를 하고 있다가,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이후 미국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친소 친중 정책을 폈었다.
1960년대 캄보디아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 의회를 장악하며 사실상의 독재정치를 펼쳤고 또한 1960년대 중반부터 경제성장이 침체하기 시작하면서 시아누크에 대한 반발이 조금씩 늘어나며 이념대립도 심해지는 등 상태가 점차 나빠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1970년 우익 쿠데타가 벌어져 론 놀에 의한 친미정권이 수립되었는데 론 놀 정권은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벌어지는데도 못본체 하는 무책임한 행태를 보였고, 경제정책에서도 무능하기 짝이 없었으며 특히 당시 군부도 학살에 가담하기는 마찬가지인 막장이었기에 캄보디아 내에서 반미 정서가 팽배해졌다. 거기에다가 시아누크가 크메르 루주와 손을 잡으며 지지기반을 급속히 늘릴수있었고 결국 1975년에 론 놀 정권을 무너뜨리고 1975년 캄보디아의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3. 크메르 루주 정권시절


처음에는 시아누크와 손을 잡았기에 민심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 이후에는 시아누크를 축출하고 각종 괴상한 정책으로 대중의 기대를 저버리자 반발이 일기 시작했는데 크메르 루주는 이러한 반발을 '''킬링필드'''라는 참혹한 대학살극으로 억눌렀다. (이 통치 시기에 관해서 민주 캄푸치아 문서를 참고바람.)
이후 베트남에게 뺏긴 고토회복을 개드립치며 베트남과 국경분쟁을 벌이며 충돌하다가, 베트남군과 베트남을 지지하는 캄보디아 공산동맹군의 공격으로 정권이 붕괴한다.
1975년 집권 직후에는 미국의 상선을 납치하고 승무원들을 인질로 잡아가는 마야게즈호 피랍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때 인질 구출 작전을 시도한 미군은 여러가지 실책을 저지르며 38명의 전사자를 냈고, 3명은 아예 시신조차 찾지 못하고 여전히 실종 상태이다. 게다가 정작 인질들은 크메르 루주 측에서 그냥 석방해서 미군은 헛수고만 한 셈이 되었다.

4. 게릴라 투쟁에서 해체까지


정권은 붕괴되었지만, 폴 포트와 그 세력은 국제사회로부터 합법정권 지위를 잃지 않은 채 잔존하여 게릴라전을 벌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 미국은 도미노 이론과 진영논리에 따라 배후에서 크메르 루주세력을 지원했다.[1] 덕분에 미국이 학살자들을 지원했다고 엄청 욕먹고, 지금도 크메르 루주를 이념적으로 비난하면 그러한 크메르 루주를 지원했던 미국은 뭐냐라는 식으로 반론당하기도 하며, 캄푸치아인민공화국 대신 크메르 루즈를 인정한 국제사회 역시 책임이 있다.
1989년 베트남 철수 후 '캄보디아국' 창설 때 손 산의 KPNLF, 시아누크 전 국왕의 FUNCINPEC과 같이 참여해 새 정권구성을 논의했고, 1991년 UN 중재로 내전(이 내전 양상이 조금 복잡하다.)은 종식되지만, 크메르 루주는 이 협상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6년 평화협상이 체결되면서 크메르 루주에 속했던 이들이 속속 캄보디아에 귀순하게 되고, 1999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재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5. 과거사 청산과 전범재판


그러던 가운데 21세기에 들면서 UN의 지원하에 캄보디아 전범재판소가 설립되고, 근 30년 만에 학살에 가담한 크메르 루주 인사들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2] 물론 이러한 재판은 단순히 크메르 루주라는 이유로 묻지마 처벌을 벌인 것은 아니다.
사실 크메르 루주에 속했다가 회개한 이들은 많다. 크메르 루주가 지배할 당시 살기 위하여[3] 크메르 루주에 가입하여 학살에 앞장서거나 동원된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의 범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후 피해자들을 찾아가 사죄하고 용서받은 뒤로 머리카락을 밀고 승려들이 된 전직 크메르 루주 간부들도 많다. 이들은 피해자들을 찾아가 발을 씻겨주면서 용서를 빌었다.[4]
가장 첫 번째로 재판이 이루어진 것은 S-21 교도소[5] 소장이며, 일급 고문자였던 카잉 구엑 에아브(Kaing Guek eav 또는 lew. 1942~2020[6] 일명 두크(Duch) 동무위키미디어)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는 1979년 베트남 침공으로 크메르 루주 정부가 무너지자 신분을 숨기고 달아나 한적한데서 숨어살다가 1995년 그를 알아본 이들에게 공격받아 아내가 죽고 또 달아났다. 그는 기독교 목사가 되어서 교회를 차리고 선교에 앞장섰다가 그를 알아본 현직 형사[7]에게 잡혀서 1999년 구속되었으며 상소가 기각되어 2009년 2월에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2010년 징역 3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했으나 유엔 전쟁범죄 법정은 2012년 항소를 기각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태도는 재판 당시 캄보디아 여론을 격분시켰다. 지난 10년간 회개했다며 자신의 죗값을 치르는 듯한 모습을 취하다가 정작 재판에선 난 억울하다며 '''하나님의 힘으로 회개했으니 용서해달라는 소리'''를 하며 왜 목사인 자신을 외면하냐며 교회들을 원망하는 말까지 하여 재판에서 야유를 받았다. 더욱이 죄는 인정하지만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개드립을 쳐댔다. 즉, 자신은 상부의 지시를 받은 중간 관리자에 불과하다는 것. 그러면서 왜 중간 관리자에 불과한 자신이 먼저 처벌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도 주장했다.
재판과 관련한 '리더스 다이제스트' 기사를 발췌해보면.

이 현장을 보던 랑 뚜야우 페르난데스 목사(두크를 모르고 목사로 추천하던 인물이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카잉 구엑 에아브를 옹호하려던 모든 마음이 사라지고 말없이 쳐다봤을 뿐이었다. 바로 그도 크메르 루주에게 형과 아버지를 잃었고 시체도 찾지 못했으며 그 또한 어릴적에 수용소에서 맞아 남은 상처가 몸에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과거를 뉘우치는 말이라도 했더라면 그를 용서했을지 모를테지만 카잉 구엑 에아브 홀로 종교적으로 회개했다는 말에 그는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목사가 아니라면 가서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참고로 카잉 구엑 에아브를 체포한 형사의 어머니도 크메르 루주 대원에게 호되게 고문당해 절름발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 대원도 승려가 되어서 나중에 찾아와 어머니의 발을 씻으며 용서를 빌었고 어머니는 그를 용서해주었다고 한다. 그 형사도 어머니가 용서하고 자신도 용서한다고 했지만 이런 거랑 대조적인 두크의 저런 발언을 보면서 절대로 용서못한다고 이를 갈았다. 이와 관련한 서적으로, 당시 재판을 지켜보았던 프랑스 언론인 티에르 크루벨리에가 쓴 『자백의 대가』(2012)가 있다. 다소 제국주의적인 시각[8]이 있긴 하지만 꽤나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후에도 전범 재판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크메르 루주 정권의 2인자였던 누온 체아 전 부서기장, 이엥 사리 전 외무장관, '''키우 삼판 전 국가주석'''[9], 이엥 티리트 전 내무장관의 재판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킬링필드에 전혀 관련이 없으며 잘못한 것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어서 전 세계인의 공분을 사고 있다. 특히 키우 삼판의 말이 더 가관인게 '''1988년까지 학살에 대해 전혀 몰랐다'''라느니 정책결정권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그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한다라는 희대의 개드립까지 쳤다.[10] 게다가 캄보디아 정부 또한 "이번 재판이 마지막 전범재판"이라는 태도로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있어 이들에 대한 유죄 판결이 내려질지,[11] 그리고 다른 전범들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재판을 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당장 재판이 진행중이단 이엥 사리는 판결이 내리기도 전에 노환으로 불 지옥으로 떨어졌다.

6. 관련 문서



7. 출처


  • 먼나라 이웃나라 시즌2(지역/주제편) 17권: 동남아시아, 천년 문명의 신비에서 21세기 변화와 개혁의 주역으로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18. p125~128.

[1] 당시에는 베트남이 공산화된 이후, 라오스와 캄보디아가 공산화되었다. 이후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했었다.[2] 이때엔 크메르 루주의 핵심 중의 핵심이었던 폴 포트가 죽은 뒤였다. 이미 그는 1998년에 사망.[3]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인 경우도 많았다.[4] 참고로 동남아에선 남의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한마디로 내가 머슴이 되어 당신을 대접한다는 뜻과 모든 진심을 다하여 사죄한다는 뜻이다. 참고로 '''동남아에서 함부로 남에게 내 발 씻겨라 소리를 농담이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태국 대사관 근무한 이가 쓴 책자에서 한국인이 태국인에게 이 발냄새나는 게...라고 술 취하여 한 말에 분노한 상대방 태국인이 병으로 얼굴을 난도질당해 수십바늘을 꿰멘 일이 있다. 하지만 태국 현지에선 무죄로 처리되었다. 이슬람권에서도 마찬가지. 조지 W. 부시에게 신발을 던졌던 이라크 기자인 문타다르 알자와디를 봐도 그렇듯이 신발로 남을 치는 것은 나랑 죽을 각오로 싸우자는 선전포고로 정말 이렇게 하면 피범벅 싸움판이 벌어진다. 더불어 발바닥을 남에게 내미는 것도 모욕이다. 모스크 앞에 발을 씻는 세면대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5] 일종의 캄보디아판 아우슈비츠이자 정치범수용소. 20만이 넘는 사람들이 강제로 끌려와 고문당했다. 여기서 공식적인 사망자는 1만 7천 명이지만 수감자들의 증언을 보면 그 몇 배는 더 된다고 한다. 크메르루즈 집권 시절, 교도소들이 다 그렇지만 소장이 직접 고문을 전문으로 하는 경우는 여기가 유일했다고. 정신무장이란 이름으로 똥을 먹게 하지 않나, 아이들을 죽이게 하는 명령을 내렸다든지 아주 지옥이었다. 그러니 여기 소장이니 잊힐 리가 없었다.[6] 9월 2일,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익명의 제보자에 따르면 수년간 폐 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7] 바로 두크에게 잡혀서 고문받았던 수용소 수용자였기에 잊을 수가 없었다.[8] 프랑스였다면 달랐다는 식의 뉘앙스라든지,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식민지배했던 과거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라든지.[9] 흔히 사회주의 국가 특성상 국가원수는 바지사장인 경우가 많으나 '''이놈은 아니다.''' 오히려 폴 포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놈 별명부터가 캄보디아의 히틀러다.'''[10] 이게 얼마나 개드립이면 애초에 킬링 필드가 '''이 미친놈 머리에서 나온 거다.'''[11] 유죄 판결이 내려져도 이들이 그 죄의 대가를 치룰 지도 불분명하다. 다들 하나같이 70~80세를 넘은 고령이라 최종판결 전에 폴 포트처럼 죽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