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필드

 


Killing Fields / វាលពិឃាត
1. 개요
2. 학살의 시작
3. 크메르 루주의 집단 학살
3.1. 학살 방법
3.2. 뚜올 슬렝
3.3. 마지막 피난처인 프랑스 대사관
4. 크메르 루주의 실각과 캄보디아의 내전
5. 잊힌 학살
6. 긴 내전의 끝
7. 학살에 대한 논란
7.1. 300만명이 죽었다?
7.2. 누구의 책임이 가장 큰가?
8. 영화화


1. 개요


1960~70년대에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대량 학살.
좁게는 크메르 루주 정권이 사람들을 대규모로 처형한 사건을 말하며, 넓게는 이를 전후로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학살을 일컫는 말이다. 해골이 야지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사진들로 유명하다. 이 사건은 나치와 함께 포스트 모더니스트에게 '근대의 실패', '이성의 실패'를 드러내주는 사례로서도 주장된다.
1965-79년 캄보디아의 인구 변화#
1965년
6,602,000명
1970년
7,394,000명
1975년
7,500,000명
1979년
6,729,000명
하지만 이 통계도 1975년의 인구가 딱 떨어지는 750만 명으로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듯,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려운 추측성 통계. 이후 설명하겠지만, 1970년 론 놀의 쿠데타 이후로 1993년 총선거 이전까지의 캄보디아는 혼란이 지속되었던 상황인지라 도저히 제대로 된 통계를 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2. 학살의 시작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캄보디아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에게 점령당했다. 이를 틈타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은 1945년 3월 12일에 캄보디아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1946년에는 다시 프랑스의 보호 하로 돌아와 독립은 소멸하게 됐다. 시아누크 국왕은 끈질기게 독립 운동을 계속해 1947년에는 헌법을 공포하였고, 1949년에 프랑스 연합 내에서 독립할 것을 선언하였다. 1953년에는 경찰권, 군사권을 회복해 완전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시아누크는 비동맹·중립 외교 정책을 표명했다.
1965년 5월, 시아누크는 북베트남에 폭격을 행하는 미국에 대해 단교를 선언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어수선한 동남아시아였지만 시아누크 정권 시대에는 내전은 격화되지 않았고, 식량이 풍부하여 수입에 의지할 필요도 없었으며, 대량의 난민도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 시기 동부 캄보디아 지역은 사실상 북베트남의 실효 지배 하에 있었으며 대규모 지하 터널 네트워크를 통한 보급(호치민 루트)을 확보하고 있었다. 미군에 의해 '성역'으로 지칭되던 이 지역에 타격을 주기 위해 미 정부는 국제법을 위반한 비밀 작전을 추진했다.
1969년 3월, 미 공군이 '아침 식사 작전'이라 불리는, 동부 캄보디아 지역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하였으나 그 효과는 미미했다. 북베트남 남부전선 사령부(COSVN)에 타격을 주긴 했으나 호치민 루트를 절단하지는 못했고 COSVN의 이동에 따라 '점심 식사 작전' 또는 '메뉴 작전'이라 불리는, 폭격 지역 확대를 실행했지만 폭탄 사용량만 늘 뿐이었다. 남베트남과 미국의 혼성군의 월경 작전인 슈메이커 작전도 무익하게 끝났다.
그리고 1970년 3월에 군부와 미국에 의해 친미 쿠데타가 일어났다. 중립정책을 펴던 시아누크 국왕은 축출되었고, 론 놀이 집권하게 됐다. 캄보디아에서는 폭격이 더욱 격화되었으며, 캄보디아의 농업은 황폐화되었다. 수십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이로 인해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이로 인해 100만 명 이상의 피난민이 수도 프놈펜으로 몰려들었다. 농업 생산이 격감한 캄보디아로서는 이 난민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고, 이는 오직 미국의 식량 지원으로만 유지될 수 있었다.
닉슨 정권이 베트남전의 월남화를 추진하면서 결과적으로 미국의 캄보디아 공격은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할 시간만을 벌어주는 역할을 했을 뿐, 오히려 내전의 확대를 부추켜 결국 크메르 루주가 캄보디아에서 정권을 잡게 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2]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함에 따라 캄보디아나 남베트남 군이 메울 수 없는 공백을 남겼다.
이러한 혼란상을 파고 든것이 크메르 루주였다. 크메르 루주는 1960년에 설립되었으나, 론 놀의 독재 정권과 미국의 맹폭으로 인한 혼란을 파고 들어 세력을 확장했다. 해외에 있었던 시아누크 국왕도 크메르 루주를 지지하며 복귀를 꾀했다. 이들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으며 민족주의자들, 농민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늘려나갔다. 그들은 사회주의의 실현과 지나치게 친미 성향이었던 론 놀 괴뢰정부를 전복하자는 것에서 이해가 일치하여 자칭 혁명을 주도하게 되었다. 민심을 잃어버린 론 놀 정권은 1973년 3월 29일 미국이 베트남으로부터 완전 철수함에 따라 치명타를 입었다. 1975년 4월 17일 세력이 약해진 론 놀은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이후 크메르 루즈가 수도 프놈펜에 입성하였고, 잠시 동안 시아누크 국왕이 상징적인 수반이 됐다.

3. 크메르 루주의 집단 학살


좁은 의미에서 말하는 킬링 필드는 이 학살을 말한다.
1976년, 크메르 루주는 시아누크 국왕을 연금시키며 국명을 민주 캄푸치아로 개칭하였다. 하지만 황폐화된 농업 조건에서 프놈펜에 몰려든 난민들을 감당하는 건 불가능했고, 더 이상 미국의 식량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프놈펜의 난민들을 농촌으로 돌려보내야만 했다. 여기에 사상적 측면이 더해졌다. 캄보디아 공산당은 창건 때에는 사회주의 이념을 고수했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마오이즘을 추종하고 있었고[3]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문화대혁명 식으로 몽땅 농촌으로 쫓아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니 문혁보다 더더욱 '''막장이었다.''' 문화대혁명은 적어도 그저 '''안경을 쓰고 있다고 죽이지는 않았다.'''
이 병크를 저지른 크메르 루주의 수장 폴 포트는 프랑스 유학시절 사회주의에 심취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일종의 열성 엘리트로서 지식과 학력은 제법 높았지만 사회 운영이나 갈등 조정에 관한 지혜가 부족했다. 게다가 가치관도 상당히 잘못되어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처음에는 시아누크가 복귀하면 사회가 안정화될것이라며 환영했던 민심이 괴상한 정책의 시행으로 떠나가기 시작하자, 폴 포트는 더욱 막장화된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각지에서 집단 농장을 설치하고 '''사회주의식 새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도시 주민들을 모조리 그곳으로 내몰았다.[4] 이와 함께 뚜얼 슬랭 같은 수용소도 많이 건설되었고, 반혁명 사상을 품고 있다고 의심되는 이들이나 외국과 관련이 있는 이들, 스파이로 의심되는 자들은 고문하고 처형했다. 정부가 정치 범죄자나 경범죄자들에게 처음에는 경고장을 보냈지만 경고장이 두 번 이상 나오면 "재교육"을 위해 호출했다. 이는 거의 확실한 죽음을 의미했다. 이외에도 종종 정부에서는 '혁명 이전의 삶과 그때 저지른 '범죄'[5]를 자백하도록 장려했으며 이를 용서해주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곧 비밀경찰 산데바르가 끌고 가서 정치범 교화소에 '''고문을 받고 처형되기 위해''' 끌려간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사실상 고등 교육 이상을 받은 캄보디아 국민은 말살당했는데,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그저 '''안경을 쓰고 있어서 지식인처럼 보인다고''' 붙잡아 집어넣은 사례도 있었다.[6] 그런데 박해의 대상이 된 지식인들이 죽거나 숨거나 탈출하여 사라지자 그 대상이 농민들 중 협조적이지 않은 자들로 확대되었다. 나중에는 당 중앙을 제외한 크메르 간부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살해되는 내부투쟁으로까지 변해버렸다. '''말 그대로 캄보디아 전역이 사지(死地), 즉 킬링 필드로 변모해 버렸다.''' 그리고 이 지식인 학살은 문화대혁명처럼 캄보디아 교육에 크나큰 '단절'을 가져왔다. 한창 교육 현장에 종사해야 할 교사들마저 다 학살당했기 때문. 현재 캄보디아 30~40대 교사들 중에는 "'과학 실험을 직접 해본 적이 없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기술이나 예산 문제도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이러한 '단절' 때문이다. 자기들이 못 배웠는데 다음 세대를 잘 가르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일단 크메르 루주 반군 실무자들은 대부분 농촌 출신의 젊은이들이 많았다. 당시 캄보디아는 도농간 격차가 엄청났던데에다가 1960년대 후반 이후의 혼란기로 인프라 개발이 지체되면서 전기가 안 들어오는 시골도 부지기수였고 교육을 받지 못한 문맹자도 많았다. 그들에게 도시 문명의 모든 것은 부의 상징이자 증오의 대상으로 보였고 자동차, 라디오, TV, 전자기기는 "있는 놈"들의 물건이었다.[7] 이러한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잡혀간 사람도 엄청나게 많았다. 당대 한국 기준으로 보면 TV는 1970년대에 들어와서야 보급되기 시작했고 자동차는 아직 대중화되기조차 전이었지만 라디오는 한국이 한창 가난했을 시절인 1960년대에 대중화되었고 이는 다른 개발도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크메르 루주 정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베트남 측에서는 300만 명으로 발표하였고 유사한 연구도 있었으나 과장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미 국방부는 120만 명, 예일 대학의 조사에서는 17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여기에는 처형 뿐만 아니라 강제 노동으로 인한 과로사,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들도 포함된다. 소련 붕괴 이전 핀란드 중립국 조사단의 추산은 전쟁 중 사망자 60만, 크메르 정권하에서 100만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 모든 통계는 추정치이며, 다만 수십만 명이라는 것이 확실할 뿐이다. 현재는 대략 80만 명으로 보는 쪽이 많은 편이다. 다만 문화대혁명의 희생자 150만(?)과 비교하면 이것도 전혀 적은 것이 아니지만 당시 캄보디아의 700만 인구와 중국의 8억 인구의 차이를 생각하면 엄청난 인적 자원의 손실이다.
크메르 루주는 초강경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고, 화교, 참파족, 베트남인 등 당시 캄보디아 내에 거주하고 있던 소수민족들을 학살하였다. 이는 제노사이드의 범주에 속하며 당시 국가 간부회 의장 겸 총리였던 키우 삼판도 2003년에 증언을 하면서 자신도 현재 제노사이드라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8] 특히 학살은 민족주의적 감성에 의해 중국계와 베트남계에 집중되었다.[9] 여기서 수십만 명의 베트남계 캄보디아인들이 학살당했고, 이것은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고 기세등등하던 베트남으로부터 엄청난 어그로를 끌었다. 크메르 루주와 베트남 사이에 극한의 외교적 대립이 이어졌고, 결국 1978년 12월 25일, 베트남군은 망명한 캄보디아 난민으로 캄푸챠 민족구국통일전선을 조직하고 크메르 루주 장교로서 베트남에 망명한 헹 삼린을 내세워 폴 포트 타도를 기치로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3.1. 학살 방법


증언에 따르면 고압선을 이용한 전기충격과 물고문은 물론 사람을 고문 침대에 눕혀 놓고 쇳덩어리로 머리를 짓누르는 방법을 사용했으며 반동으로 몰린 사람들이 과거 정권에 협조했다고 불지 않을 때는 도끼로 손을 자르거나 여성의 유방이나 성기 등 인체의 연약한 부분을 예리한 칼 등으로 도려내기도 했다. 게다가 크메르 루주는 반동분자를 산 속 나무에 묶어 이 나무를 오르내리며 먹이를 찾는 열대 붉은왕개미들로 하여금 살을 파먹도록 하기도 했다.[10]
크메르 루주들은 사람을 고문할 때 사진을 찍고 옷을 모두 벗도록 했고, 고문 기술자들은 고문 센터에서뿐 아니라 사람을 구덩이에 처넣기 직전에도 고문을 가했다. 가장 흔한 방법은 눈을 가린 뒤 팔을 뒤로 묶고 몽둥이를 이용해 죽이는 것이었다. 당시의 고문 중에는 드릴 같이 생긴 도구로 뒤통수를 뚫거나 디딜방아처럼 생긴 도구에다 머리를 넣고 찧어 죽이는 고문까지 있었다. 반동으로 낙인 찍힌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묻힐 구덩이를 파게 하고 밖으로 나와 가장자리에 서게 한 뒤 몽둥이로 뒤통수를 쳐서 구덩이로 밀어넣어 죽였다고 한다. 캄보디아에 전시된 그림이나 자료를 보면 사람들의 팔을 뒤로 묶고, 목과 목을 서로 연결해 구덩이에 묻어버리기도 했다.
게다가 크메르 루주는 반동분자들의 씨를 말린다면서 잡힌 사람의 3대를 없애버렸는데 젖먹이 아이들까지 살해했다. 또한 아이들이 훗날 보복할 수 있으므로 이를 방지한다는 이유로 죽여버렸다. 죽인 방식도 잔인하기 짝이 없는데 갓난아이들이나 애들을 마치 개구리를 잡아 길바닥에 패대기쳐 죽이듯 팔이나 다리를 잡고 몸뚱이를 바위나 시멘트 바닥 또는 통나무 등에 내려쳐 살해했으며 심지어 마을에 스피커를 달아서 온 마을 사람들이 희생자의 소리를 듣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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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가시가 많은 나무에 패대기치는 크메르 루주
또한 갓난아이를 공중으로 던져서 사격연습용으로 이용하기도 했으며 그 외에도 손톱을 뽑거나, 여자의 연약한 유두를 도려내기도 했다. 총알을 아끼기 위해서 구덩이에 사람들을 생매장하거나 사람들을 우물에 넣어버리기도 했다.
크메르 루주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이기도 하며 폴 포트 정권의 잔학상을 그린 아카데미상 수상 영화 ‘킬링 필드’의 실제 주인공이었던 행 응오르[11]는 "크메르 루주는 물고기를 훔친 부이 소판(당시 31세)이라는 친척을 인민재판에 회부, 죽인 뒤 간을 꺼내 요리해 먹었다."라고 폭로하기도 했다.

3.2. 뚜올 슬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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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뚜올 슬렝에 지식인으로 붙잡혀온 아이들. 사진을 자세히 보면 발과 발이 서로 연결되어 묶여 있다.
크메르 루주의 가장 악명 높은 수용소로는 S-21 보안감옥인 뚜올 슬렝이 있는데 독나무 언덕을 뜻하는 이 수용소는 크메르 루주 정권 이전에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조상의 이름을 따서 붙인 고등학교였으나 전쟁이 끝난 후에 고문소와 수용소로 개조되고 S-21 보안감옥으로 불린다. 약 '''1만 7천 명'''이 이곳에 수용되었으며 '''살아서 나간 사람은 12명'''에 불과하다. 크메르 루주는 자신들이 죽인 사람들의 통계기록을 정확히 작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용자 수를 2만 명 이상으로도 예상한다.
여기에는 캄보디아 국민 말고도 해상에서 나포된 외국인들도 수용되었고, 모두 죽었다. 79명의 외국인 기록이 남아있으나 수용소에서 일한 전직 사진사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는 더 있었다고 한다. 2012년 8월, 무명의 기부자가 캄보디아 문서 관리소에 기부한 S-21 감옥 수감자들의 사진 1427장 중 서양인의 사진이 2개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한 장은 1978년에 싱가포르에서 하와이를 향해 배를 타고 가다가 캄보디아 해상으로 진입하는 바람에 나포되어 끌려왔던 미국인 크리스토퍼 에드워드 디랜스(Christopher Edward DeLance)[12]의 것으로 확인되었고 나머지 한 장은 프놈펜의 프랑스 대사관 직원으로 일했던 앙드레 가스통 쿠티뉴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처
수용소에 시신 묻을 자리가 없자 쯔응아익이라는 프놈펜 남쪽의 과수원이었던 곳에[13] 수용자를 옮겨 죽인 후 묻었다. 쯔응아익에서도 8,895구의 시체가 나왔다고 한다.
크메르 루주가 실각하고 내전도 끝난 이후 학살의 현장이 되었던 뚜올 슬렝(S-21) 형무소와 쯔응아익 매장지는 박물관으로 탈바꿈하여 현재까지 관광객을 받고 있다. 뚜올 슬렝의 경우 원래 프놈펜 도시 한복판에 있던 학교라 비교적 최근에 들어선 주택지 사이에서 그 시절의 모습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참고로 해 질 무렵엔 폐관해서 조명이 없기 때문에 밤에 근처를 지나거나 높은 건물에서 학교 부지를 내려다 보면 이런 공포가 또 없다.
참고로 여기 소장이던 '깡 겍이우(កាំង ហ្គេកអ៊ាវ, 널리 알려진 Duch-두치[14][15]라는 별명으로 짧고 간결하게 알아두자.)'는 크메르 루주 정권이 무너지자 달아나서 한적한 곳에서 숨어 살다가 1995년 정체가 드러나자 재빨리 교회로 도망쳐서 회개한다며 자칭 목사가 되어버렸다. 졸지에 학살자를 봐주는 종교라며 비난이 쏟아졌고 결국 1999년 뚜올 슬렝에서 살아남은 현직 형사가 그를 알아보고 체포하면서 목사짓도 막을 내렸다. 그리고 2009년 40년형을 선고받았고 이마저도 종신형으로 바뀌었다. 복역중이던 그는 2020년 9월 2일, 교도소 안에서 만 77세로 죽었다. 오래전부터 앓던 병으로 인한 자연사.

3.3. 마지막 피난처인 프랑스 대사관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을 장악할 당시 외국인과 캄보디아인들이 유일하게 대피할 장소가 남아 있었는데, 바로 프놈펜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이었다. 당시 대사관으로 대피한 인원은 외국인과 캄보디아인을 합쳐서 약 3000여 명으로 추정한다. 대사관 측은 크메르 루주와 안전 보장을 위한 협상을 벌였지만 크메르 루주 측은 캄보디아인은 외국인 남성과 혼인한 여성[16] 및 그 자녀들만 남기고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내보내라고 했고, 그러지 않으면 대사관으로 들어가는 식량과 전기/수도를 차단함은 물론 외국인 당신들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고 협박했다. 결국 대사관 측에서는 캄보디아인들 '솎아내기' 작업을 거쳐 크메르 루주가 요구한 대로 대문 밖으로 쫓아내야 했다.[17] 이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위에 나온 그대로이다. 이후 대사관에 남은 사람들은 약 1달 뒤인 1975년 5월에 프랑스와 크메르 루주 간의 협상이 간신히 타결되면서 트럭에 실려 태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 내용은 아래의 동명의 영화에도 묘사되어 있다. 단, 영화에서 여권을 위조하여 딧 프란을 구하는 것은 영화에서 창작한 내용이다.
이 당시 대사관에는 한국인 남성도 1명이 있었으며, 무사히 태국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4. 크메르 루주의 실각과 캄보디아의 내전


크메르 루주의 대학살로 수십만의 난민이 발생했고 친 베트남 성향이 강하던 동캄보디아에서 대규모 학살이 벌어진다. 베트남은 1979년 1월 6일, 캄보디아 프놈펜을 공략한다, 원래부터 태국과 더불어 동남아의 최강자였으며, 이에 더해 베트남 전쟁으로 단련된 베트남군은 SS처럼 풋 사과에 불과한 크메르 루주를 손쉽게 박살내버리고 프놈펜에 입성한다. 결국 폴 포트, 이엥 사리 등의 크메르 루주는 태국 국경 근처까지 쫓겨나고 유폐에 가까운 상태에 있던 시아누크는 다시 북경에 피신했다. 1월 10일 베트남은 헹 삼린을 수장으로 하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Kampuchea)을 수립했고 크메르 루주킬링필드는 일단 베트남의 침공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헹 삼린의 캄보디아는 베트남의 괴뢰 정권이라는 이유로 세계 각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고. 79년 직후에는 킬링필드가 서방권에서 묻혔기 때문에 마침 미-중 수교 이후 밀월관계에 있던 중국과 미국의 어그로를 동시에 끌었다. 우선 중국은 버르장머리 없는 베트남에 대한 징벌행위로서 무력침공을 비밀리에 모의, 대외적으로는 캄보디아 해방 등을 명분으로 1979년 2월 17일, 중국군이 국경을 월경하며 중월전쟁이 발발했다. 그리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치욕을 잊지 않고 '''베트남을 엿먹이기 위해 크메르 루주를 지원한다.''' 미국은 외교적으로 베트남을 '''"아시아의 프로이센"'''이라 지칭하며 깡패 국가로 간주하면서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면서, CIA를 동원해 '''마약을 팔아가며''' 크메르 루주를 지원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미국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크메르 루주는 타이 국경 근처의 그들의 본거지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1982년 크메르 루주는 (베트남이 만든)캄보디아 중앙정부에 반대하는 2개의 비공산계열 크메르 단체들과 같이 연합전선을 형성해서 명목상 시아누크를 지도자로 한다. 결국 베트남은 크메르 루주를 격파하고도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동시에, 미국과 중국의 지원을 받는 잔존 크메르 루주 게릴라 세력과 베트남전과도 같은 게릴라전을 벌이고 휘말리게 된다.(...응?) 이 상황에서 후술하겠지만 베트남은 외교적 정당성을 위해 크메르 루주의 학살을 적극적으로 홍보한다. 내전은 장기화되었고 내전기 동안의 사망자 역시 수십만 명으로 추산된다.

5. 잊힌 학살


사실 70년대와 80년대 초까지는 킬링필드 실상이 외부에 잘 알려지지 못했다. 당장 크메르 루주는 외국인 기자들을 다 쫓아내고 학살을 은폐하는 정책을 폈고, 미국은 크메르 루주 정권 수립 직후에 크메르 루주 정권의 대규모 학살을 주장했지만 베트남 전쟁 직후 미국의 신뢰성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라 친미 국가의 정부조차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당시 대규모의 캄보디아 난민 문제로 골머리를 썩던 태국이 그나마 주장하긴 했지만 그 영향은 미미했다. 거기에 80년대 초에는 미국 정부가 베트남에게 엿먹이기 위해 크메르 루주를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크메르 루주의 학살 주장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본격적으로 킬링필드가 알려진 것은 19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크메르 루주를 몰아내면서 알려지기 시작한다. 물론 베트남이 순수한 의도로 이런 악행을 알린 건 아니였고, 국제사회에서 주권국가를 침공했다는 반대여론이 전세계적으로 퍼지게 되자 국제 여론을 달래기 위해 크메르 루주가 저지른 대학살을 외부에 공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베트남은 S-21수용소 뚜올 슬랭에 박물관을 만들고 이것을 소련과 동유럽은 물론 서방에도 공개했고, 프놈펜 외곽의 다른 킬링필드도 찾아내서 공개했다. 서방기자들은 원하면 캄보디아 전역의 킬링필드를 돌아보고 취재할 수 있었고, 이 취재를 바탕으로 크메르 루주들의 천인공노할 만행들이 전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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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까지 뚜올 슬랭 박물관(S-21)에 전시되어있던 '''해골 지도'''이다. 형무소 내에서 발굴된 유골로 캄보디아 지도를 만들어 놓았으나 반인륜적이라는 인권 단체 등의 거센 비난으로 인해 철거되고 현재는 안치되어 현지에서는 더 이상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18] 대학살이 관광상품이나 다름없이 전락해버린 이러한 맥락 속에서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할 때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킬링필드를 과장했다고 주장하는 서적도 있다. '아시아의 기억을 걷다'
그 이후 캄보디아 언론인 딧 쁘런(ឌិត ប្រន)의 탈출 기행을 다룬 뉴욕 타임즈 기사[19]를 토대로 84년에 동명의 영화가 만들어지고, 서방에 크메르 루주의 학살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 참고로 일부에선 당시 공산권과 유럽, 일본 등의 좌파 정당이나 언론은 '''우파에 의한 철저한 기만 선전'''이라고 주장했다고 알고 있으나, '''당연히 당시 상황을 잘못 이해한 것'''. 마오이즘을 지지하던 좌파들도 있었으나, 킬링필드를 가장 필사적으로 홍보하던 베트남[20]은 바로 그 호치민의 후예다. 그리고 소련은 베트남을 지지했고, 중국과 미국[21]이 크메르 루주를 지원하던 개판인 상황이었다.

6. 긴 내전의 끝


어쨌든 수렁에 빠져 있던 베트남군은 1989년 9월에 캄보디아의 자치능력 향상과 동구권 혁명 여파로 철수했고, 괴뢰정권 캄푸치아인민공화국은 자동 해체됐다. 당시 총리에 있던 훈센은 베트남군이라는 배경을 잃고 세력이 약화되어 내전은 더욱 수렁에 빠졌다. 결국 1990년 6월 4일~5일, 도쿄에서 크메르 루즈와 시아누크 전 국왕의 FUNCINPEC, 손 산 전 총리의 KPNLF 등 3개 정파가 참가하는 평화를 향한 직접 대화의 장소로서 캄보디아에 관한 도쿄 회의가 개최되었다. 다음해 1991년 10월 23일, 캄보디아 평화파리협정이 개최되어 최종 합의문("국제 연합 캄보디아 잠정 통치기구(UNTAC)"의 설치, 무장해제와 내전 종결, 난민의 귀환, 제헌의회 선거의 실시 등)에 19개국이 승인함으로써 20년에 이르는 캄보디아 내전이 종결되었다. 캄보디아 평화 파리 협정으로 훈 센 정권과 민주 캄푸치아 연합정부를 통합한 네 계파에 의한 캄보디아 최고 국민 평의회(SNC)가 결성되었다. 다음 해 1992년 2월부터, 유엔 캄보디아 잠정 통치기구(UNTAC)가 평화유지 활동을 시작하였다.[22] 1993년 5월에는 국민의회 총선거가 실시되어 입헌군주제가 채택되고, 시아누크 국왕이 복위된 후 국민들도 절망을 버리고 점차 자신의 힘으로 나라를 가꿀 의지를 얻었다.
하지만 크메르 루즈의 수장인 폴 포트가 1998년 사망하여 잔존세력이 완전히 소탕되기 전까지 앙코르와트 유적군의 외곽 지역(쁘레아 뷔히어, 오다 멘쩨이)은 장갑차를 타고 가야 할 만큼 완전한 평화라고 부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79년에 크메르 루주가 베트남군에 의해 전복될 당시 베트남 괴뢰정부 쪽에서 크메르 루즈 축출에 가담한 인물들은 여전히 정치권에서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들이 바로 지금은 총리가 되어 몇번째 연임하고 있는 훈 센과 93년 정부 수립 이래 굳건한 여당인 CPP(캄보디아 인민당)의 주요 인물들. 그런데 사실 훈 센은 부패한 독재자인지라, 캄보디아는 아직도 영 좋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또한 내전기의 베트남과 괴뢰정부에 대해서는 책임을 거의 묻지 않는 편이다. 물론 캄보디아의 개판 상황에서 베트남이 한 일이 아무래도 그나마 나은 건 사실이긴 한데;;
21세기 들어 UN과 캄보디아 정부가 '''학살과 반인권 범죄 처벌에는 시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념에 입각, 크메르 루주 전범재판소(ECCC)를 설립하여 사건 발생 이후 거의 30년만에 비로소 책임자에 대한 처단이 시작되었다. 이미 주범들 중 다수는 처벌을 받지 않고 사망한 지 오래이기에 사실상의 처벌보다는 위의 이념을 명시하기 위해 실시하는 재판이라고 볼 수 있다.
2007년 7월 3일 재판소는 죽음의 감옥이라 불렸던 S-21 교도소 깡 겍이우 소장을 첫번째로 기소하여 2010년 7월 26일 징역 35년 형에 대한 확정 판결을 내렸다. 2011년 6월 27일에는 사건의 주범 4인방인 크메르 루주 정권 서열 2위 누온 체아(85)를 비롯해 이엥 사리(85) 전 외무장관, 그의 부인 이엥 티릿(79) 전 내무장관, 키우 삼판(79)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와 캄보디아 정부 등 여러 정치집단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이들에 대한 재판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크메르 루주 정권 부역자들 다수가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캄보디아 정부[23]와 일각에서 또 다른 킬링필드를 만든 주범으로 여겨지는 미국 정부의 비협조가 가장 큰 장애물로 지적된다. 이렇게 재판이 지연되고 있는 가운데 피고인 중 하나인 고령의 이엥 사리가 단죄받기 전에 먼저 지옥으로 도망쳐버렸다. 그럼에도 재판은 여전히 현재진행형.
2014년 8월 7일, 전범재판소는 누온 체아 당시 공산당 부서기장과 키우 삼판 전 국가주석에 대해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하면서 지체되다가 2년만에 다시 종신형을 선고하였다.#
2018년에는 킬링필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날(5월 20일)을 국가공휴일로 지정했다.
2019년 8월 4일에 폴 포트 정권의 2인자 누온 체아 전 공산당 부서기장이 사망했다.# 2020년 9월 두크'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진 카잉 구엑 에아브가 사망했다.#
프놈펜으로부터의 서한: 왜 대부분의 중국 관광객은 킬링필드를 가지 않는가?#

7. 학살에 대한 논란



7.1. 300만명이 죽었다?


반공을 국교(?)삼던 1980년대 도덕이나 교련 교과서에서도 나오던 널리 알려진 정보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는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 당시에 주장했으나, 과장된 것이었다. 이 정보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은 학살에 대한 초기의 연구 때문. 완전히 개판이었던 캄보디아에서 신뢰할만한 통계를 찾는 건 불가능했고, 가능했던 것은 태국 일대의 난민수용소에서 사망율을 추산한 뒤 인구에 대입하는 방법 뿐이었다. 하지만 사실 피난민들은 일반 국민들보다 훨씬 높은 사망율을 보였던 것(당연히 도망친 사람들이 훨씬 상황이 심각했을 것이니까.) 현재는 시아누크 퇴위 이후 평화조약까지 희생된 수로 100만~200만을 추산하지...만 그것 이상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하는 정도.

7.2. 누구의 책임이 가장 큰가?


그 희생자의 확실한 수를 추산하기는 힘들고 구체적인 기간 내의 피해자의 숫자를 추산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하지만 우선적인 책임은 크메르 루쥬에 있다는 것은 명확할 것이다. 그들은 좁은 의미에서의 킬링필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전후의 내전기 동안에도 희생자의 숫자를 불리는데 엄청난 역할을 했다. 이들에 대한 재판과 처벌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그나마 작은 위안일 것이다.
미군 폭격에 의한 사망자는 다른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정확히 계산된 바 없다. 미군이 캄보디아에 쏟아 부은 폭탄의 투하량은 539,129톤에 달한다.[24] 고엽제를 비롯한 화학 무기는 여기에 또 별도로 더해진다. 그리고 캄보디아 동부는 메콩강 하구와 톤레삽 호수 등의 담수 공급원이 집중되어 있어, 언제나 식량 생산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차적인 폭격의 희생자와는 별개로, 식량생산에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는 말. 이를 무시한다면 캄보디아의 전쟁 이전 경작이 가능했던 논 가운데 80%가 불모지로 변했고, 380만톤에 달했던 쌀 생산량은 66만톤으로 줄어들어 이로 인해 프놈펜으로 농촌에서 인구가 몰려든 걸 설명할 방법이 없다. 론 놀의 쿠데타, 이후 크메르 루쥬에의 지원 등은 둘째쳐도, 폭격으로 인한 희생자에 대한 책임이 없을 수는 없다. 일부 주장에 의하면 헨리 키신저가 사실 크메르루주 만큼이나 악독한 학살자였으며 킬링필드를 일부러 부각시켜서 자신들의 학살을 덮으려고 한다는 주장이 있으며, 이로 인해 헨리 키신저를 전범으로 재판을 받게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관련기사. 미국 책임론은 놈 촘스키 같은 서방세계 리버럴 진영에서 종종 펼치는 주장이다. 국내에서는 김용옥이 이 주장을 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중국은 수십만명 이상의 중국계 캄보디아인들이 크메르 루쥬의 인종 청소에 인해 학살당했음에도 중월전쟁을 통해 베트남을 공격해서 크메르 루쥬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베트남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측도 깨끗한 건 아니다.
여하튼 현재의 캄보디아에서는 '''베트남군이 크메르 루주의 폭정에서 해방시켜준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방군이라고 보기에는 영 찝찝하다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원래 역사적으로도 베트남이 캄보디아 영토 일부를 뜯은 적이 있고, 태국과 함께 캄보디아 내정에 간섭해먹은 적이 있어서 사이가 나쁜데다가 내전과정에서 베트남이 캄보디아 내에서 여러가지 이권을 가져갔던 면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의견이 강한 것이다.#

8. 영화화


  • The Killing Fields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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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한 장면. 사진 속 인물이 걸어가는 곳에 흙 속에 파묻혀 널부러져있는 건 '''전부 사람의 뼈'''다.
'''제57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 촬영상, 편집상 수상작 /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색상 후보작'''
1984년 영국에서 만든 영화인데 오랫동안 이걸 미국영화라고 서술되어 있었다. 감독은 프랑스계 영국 감독인 롤랑 조페 (Roland Joffé)인데 프랑스어에 능통하며 프랑스계 유태인이다. 1440만 달러로 만들어 전세계적으로 3760만 달러를 벌어들였는데 한국에선 1985년 6월 1일에 개봉. 국내에서는 반공 영화로 간주하여 초중고교에서(!) 학교 단체관람을 주도하면서 서울관객 92만 5천이라는 엄청난 대박을 기록했다.[25] 이는 당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급 이상 대박이자 지금으로 쳐도 전국 관객 800만 이상급이다. 공산정권에 의한 학살이 부각된 내용 덕분(?)에[26] 반공 메시지 선전과 맞아 떨어지면서 80년대 땡전뉴스로 대표되던 당시의 국내 언론에서도 열렬히 찬양했다.
뭐 이렇게 한국에서 흥행도 반공 분위기를 탔다는 비아냥이 나오지만 그래도 영화 자체는 상당한 수작이며 음악도 상당한 평가를 받았다. 땡전뉴스의 선두주자 KBS도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이틀 전에 이 영화를 1TV 명화극장에서 긴급 편성해 방영했는데,[27] 시기가 시기인지라 몇몇 언론에선 비판 여론이 있었다.
영화 킬링필드 메인테마. 영국의 뮤지션 마이크 올드필드타레가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편곡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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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조페 감독은 미션과 이 영화로 꽤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시티 오브 조이(1993), 주홍글씨(1995) 감독을 맡으면서 흥행, 비평으로 말아먹고 영화 슈퍼 마리오를 제작하여 쫄딱 망했다. 2000년대 와서는 4.4.4라는 쏘우 아류작을 감독하기도 하며 2011년에 한국에선 <호세마리아 신부의 길>이란 제목으로 개봉한 (There Be Dragons)를 감독해 3600만 달러 제작비를 날려버린 440만 달러 흥행을 기록하고 평도 그냥 그렇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젠 예전 명성을 날리며 듣보잡 감독 신세가 되었다. 사실 이사람은 80년대부터도 과대평가 되어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감독이다.[28] 2017년에는 The Forgiven라는 영화를 감독해 데스몬드 투투(포레스트 휘태커가 연기했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는데 평은 그냥 그런 범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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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주연배우였던 '행 솜낭 응오(Haing S. Ngor)'[29]는 실제로 가족과 약혼자를 캄보디아에 남긴 채 탈출한 인물이며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30] 살아생전 캄보디아 난민들을 위해 기부를 많이 했고 이 작품 이후 간간히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인으로 출연하는 영화의 출연료를 기부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홍금보가 나오는 동방독응에서도 베트남인으로 출연했다!!
그는 1996년 2월 25일에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아파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검사측 주장으로 크메르 루주의 보복성 암살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와 당시 화제가 되었으나 수사결과 거리의 아시아계 불량배 일당들이 돈을 노리고 벌인 강도 살인이었음이[31] 드러났다. 그리고 이때는 크메르 루주도 서북부 산간 오다 멘쩨이 지방에서 오늘내일 하면서 근근히 버티고 있던 수준이라 미국까지 가서 보복 암살을 벌일 여유도 없었다.[32] 되려 영화가 한창 개봉하던 80년대 중순이었으면 모를까?
범인은 모두 3명으로 1998년 판결이 내려졌는데 탁 선 탄은 징역 56년형. 인드라 림은 징역 26년, 제이슨 찬은 16년형이 내려졌다.
범인들은 단순 강도 살인으로 중형을 받았지만 재판시 검찰측의 일부 증거 조작으로 인해서 2005년 판결이 뒤집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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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솜낭 응오가 연기한 실존 인물 딧 쁘런 씨는 2008년에 미국 뉴저지주 뉴브런즈윅에서 사망했다. 향년 68세.
킬링필드를 모티브로 하였다. 영화 자체의 배경은 21세기 현대의 캄보디아이지만, 작중 캄보디아의 상황은 킬링필드를 일으킨 크메르 루주 시절과 판박이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주인공 가족을 구출하는 세력은 하필이면 베트남군. 이 때문에 이 영화는 캄보디아에선 개봉하지 못했다.
  • 그들이 아버지를 죽였다 (2017, First They Killed My Father)
안젤리나 졸리 감독의 다섯 번째 작품으로,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했다. 실제 킬링필드의 생존자인 작가이자 인권운동가인 로웅 웅이 집필한 동명의 회고록을 원작으로 하였다. 다만 이 영화는 베트남군을 순수한 해방군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에 캄보디아 내에서는 평이 엇갈린다. 연출도 좀 서양인 티가 나는 편이다. 이 영화 제작엔 상술한 리티 판이 참여했다. 예고편 영상
  • 서구인이 아닌 캄보디아인의 시선을 다루고 있는 감독이라면 리티 판 감독이 있다. 내전으로 가족 전체가 프랑스로 망명해 프랑스에서 영화를 공부한 감독으로,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오가며 작업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유명해진 영화 라이스 피플부터 시작해 다큐멘터리 작업인 미싱 픽처, 추방자까지 영화 커리어 자체가 킬링필드를 중심으로 삼고 있고, 비평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 미국 폭격과 그에 따른 각종 식량난, 재해로 인한 사망이 120만 명 이상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폭격의 1차적 희생자만 캄보디아에서 60만 명, 라오스에서 35만 명에 달한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키신저 재판》참조.[2] 베트남전 시기에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행한 대규모 폭격의 성과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으나 효과가 없었던 것으로 본다. 월맹군의 보급도 차단하지 못했던 비효율적 폭격으로 식량난과 재해가 발생했다는 건 말 그대로 언어도단이라 보는 입장도 있으나, 그 폭격 자체가 상상 이상으로 비효율적이었다. 폭격할 베트콩 운송 트럭을 발견하지 못하자 결혼식장을 대신 폭격하고 돌아갔을 지경(...). 게다가 애초에 호치민 루트가 대규모 땅굴망을 기반으로 한지라 폭격으로 차단할 수 있는 성격의 보급로가 아니었다.[3] 폴 포트 본인이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같은 짓을 옹호하는 발언을 몇 번 하기도 했다.[4] 어느 정도냐면 수도인 프놈펜에 '''5000명'''만 있었을 정도.[5] 여기에는 자유시장 활동뿐만 아니라 국제 구호 단체나 정부 기관과 접촉한 것, 심지어는 단순히 외국인과 만난 것도 포함되었다.[6] 정작 폴 포트 본인은 '''눈이 나빠서 안경을 항상 쓰고 다녔다(...).'''[7]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1966년에 TV방송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당시 캄보디아의 정세가 혼란하여 경제사정이 좋을 리는 없었기 때문에 텔레비전의 대중화는 요원한 상태라서 부유층의 물품이기는 했다. 사실 캄보디아와 다르게 경제가 성장중이던 인도네시아와 태국에서도 TV는 아직 부자들이나 가질수 있는 물품이었던 시절이었고(TV가 대중화 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한국에서도 1975년 기준으로 3가구 당 1대꼴로 TV가 보급되었을 때로 도시지역은 어느 정도 TV가 보급되었지만 시골이나 달동네에서는 저녁이나 주말이면 TV본다고 TV있는 집에 가거나 만화방에 가는 것이 보편적인 풍경이었을 만큼 아직 보편적인 대중매체는 아니었다. 다만 캄보디아에서도 자동차는 2020년 기준으로도 아직은 있는 놈들의 물건이기는 하지만(...).[8] 다만 크메르 루주에도 소수 원주민들이 상당히 많았다. 화교나 베트남인은 나라가 없는 게 아니었으며 참파족은 이슬람교를 믿었고 원래부터 다른 원주민들과 사이가 무척 나빴으며 공산당이나 사회주의 노선과 매우 거리를 뒀기에 미움을 받아왔다. 되려 많은 소수 부족들이 크메르 루즈의 편을 들었고 이들이 10년 넘게 내전을 벌이는 일에 큰 도움이 됐다. 오죽하면 폴 포트가 죽었을 때 소수 부족들은 매우 슬퍼했는데 학살자이던 폴 포트가 이들에겐 매우 관대했기에 그랬다고 한다.[9] 화교들은 캄보디아의 경제를 꽉 잡고 있었고 베트남계도 마찬가지였다.[10] 1996년 6월 7일에 타전된 방콕발 연합뉴스 기사의 일부분.[11] 훗날 미국에서 피살.[12] 태국산 마리화나 밀수업자로, 공급책인 Ron Jackson과 접선하기 위해 싱가포르에서 태국으로 이동하는 중에 캄보디아 해상에 진입하여 동료인 Michael Deeds와 함께 나포되었고, 뚜올 슬렝에서 고문 끝에 CIA를 위해 어부들을 포섭하고 캄보디아 군의 활동을 정탐하는 중이었다는 진술서를 남기고 처형되었다. 이 때가 11월 말인데 한 달 뒤 베트남의 침공으로 크메르 루주는 축출됐다. 출처: Thai Stick: Surfers, Scammers, and the Untold Story of the Marijuana Trade. by Peter Maguire[13] 화교들의 무덤으로도 쓰였다.[14] 이 사람이 피고인으로 선 재판인 '케이스 001'을 다룬 책 '자백의 대가'의 국내 번역본에서는 '두크'라고 번역했다.[15] 중국계 캄보디아인이다.[16] 외국인 여성과 혼인한 캄보디아인 남성은 국제결혼 사실에도 불구하고 잔류 가능 대상에서 제외.[17] 인권국가를 자처하던 프랑스가 이 사건으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음은 물론이다.[18] 참고로 안치된 장소는 바로 옆에 있는 선반이다.[19] 이를 쓴 시드니 섄버그(Sydney Schanberg)는 이 기사로 퓰리처상을 수상한다.[20] 이것마저도 자신들의 침략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홍보였다.[21]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해서 도와줬을 뿐 미국은 친미정권인 론 놀 정권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반미 좌파정권 크메르 루즈와는 당연히 사이가 나빴다. 미국은 킬링필드가 대외적으로 많이 알려진 후에는 주로 반공자유민주노선의 크메르 민족 해방 전선(KPNLF)을 더 지원했다.[22] 이 와중에 외국군을 위한 매매춘이 극성을 부렸고, 그 결과 에이즈가 창궐하기 시작했다. 답이 없다.[23] 당장 훈 센 총리 역시 크메르 루주 경력이 있다. 물론 훈센은 시아누크 국왕의 명을 받아 론놀 군부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움직인 왕당파에 가까웠고 크메르 루주의 과격함에 질색하여 베트남으로 망명하였다.[24]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투하된 투하량은 총합 18만 톤. 도쿄 대공습과 같은 인구가 밀집한 대도시에 대한 전략폭격이 없어 사망자 비율이 더 낮을 수도, 최소한의 방공망과 대응체계, 의료시설과 방재시설도 없는 무방비 상황이었으므로 더 높을 수도 있다.[25] 이 시기만 해도 관객수는 서울 관객만 집계되었었다. 지방, 심지어는 직할시(오늘의 광역시)인 부산, 대구, 대전 관객도 집계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수도권 인구 집중 현상도 지금 보다 덜 한 시절이라 서울 관객 100만이면 지방 관객까지 추산할 경우 최소 200만 이상이 관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당시 초중고교 가릴 것 없이 이 영화를 단체 관람했었다.[26] 하지만 정작 영화 본편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민간인이 사망하는 등 미국의 악행들도 많이 부각되는 편이다.[27] 같은 시기 MBC 주말의 명화에서도 베트남전을 다룬 반공영화 <워버스(War Bus)>(1985)를 긴급 편성했다. 이 영화는 실화를 토대로 만들었지만 이탈리아와 필리핀 합작 저예산 영화로 쏟아져나온 막장 베트남전 영화 중 하나로 감독이나 배우들은 듣보잡임에도 일단 반공 영화랍시고 개봉하고 더빙하여 방영까지 한 것. 유튜브에 무자막이긴 해도 풀버젼으로 올라와 있다. 제목처럼 전쟁 와중 스쿨버스를 타고 달아나려던 백인들이 미 해병 몇 명을 만나 겪는 이야기.[28] 미션은 작품성은 좋지만 영화 속 서구중심주의적, 기독교중심주의적 색채가 짙다는 부정적인 평이 있다.[29] 그는 캄보디아 화교이다. 성씨는 吳(오)씨이다.[30] 비중을 보면 주연인 샘 워터스톤보다도 오히려 이쪽이 주연이라 인종 차별이 아니냐는 논란이 거셌다. 이때문인지 워터스톤은 그다지 화려하게 주목받지 못하고, 이후에도 저예산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주로 출연했다. 그나마 현재는 NBC의 '로 앤 오더', HBO의 '뉴스룸' 등에서 비중있는 조연으로 활약 중.[31] 사건 보고서에 의하면 강도를 만난 응오는 롤렉스 시계를 풀어주었지만 가족의 사진이 있는 목걸이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로 살해되었다. 다만 이 부분은 현재도 논란이 있다.[32] 후일 생포된 크메르 루주 고위 간부는 이 살인이 폴 포트의 직접 명령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