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게즈호 피랍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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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포사건을 다룬 미 국방부 기관지인 성조 지(Stars and Stripes, 星條紙)의 보도이다'''미국 선박이 공격 받아'''
'''나포 배후는 캄보디아'''
1. 개요
미국 선적의 컨테이너선 마야게즈(mayaguez)호가 캄보디아 인근 공해상에서 크메르 루주 해군 초계정에 나포된 사건.
베트남전에서 철수한 미군의 공식적인 '''마지막 작전'''이기도 하다.
2. 마야게즈호
마야게즈(mayaguez)호는 미국 선적의 컨테이너 화물선으로 승무원 39명이 타고 있었다.다만,순수 민간 상선은 아니고 미국대사관의 기밀물자 등을 선적했다.##
여담으로 당시에는 마야궤즈호 사건으로 불렀으나 2000년대 이후의 기사에는 마야게즈호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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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피랍사건
1975년 5월 12일, 마야게즈호가 캄보디아 인근 공해상[1] 에서 크메르 루즈 해군 초계정[2] 에 피랍되는 사건이 발생한다..캄보디아 초계정에서 RPG-7을 사격하며 위협하자 마야게즈호는 SOS신호를 보냈고 이 신호를 인도네시아 탐사회사와 호주 선박이 접수해 미국측에 알리게 된다.
이에 미군에서는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당시 저자세로 일관했던[3] 아픈 경험 때문인지 초강경 대응을 하기로 결정한다.
미 해군은 P-3초계기를 동원해 나포된 마야게즈호를 찾아냈으며 F-111, A-7, AC-130등의 항공전력과 미드웨이급 3번 항공모함 CV-43 코럴시(Coral Sea)[4] , 구축함 헨리 B. 윌슨, 구축함 홀트 등의 군함 및 해병대를 주축으로 한 220명 규모의 구조대를 편성한다.
미군 관측기가 나포된 승선원을 태운것으로 의심되는 소형함정이 코탕(Koh Tang)섬으로 간다고 보고했지만, 캄보디아 본토인 캄퐁 솜(Kompong Som)으로 가는 것인지 코탕섬으로 가는것인지 특정하지 못하고 있던[5] 미군 수뇌부는 승선원이 캄퐁 솜으로 압송되었다 하더라도 코탕섬을 점령하여 억류된 승선원과 교환할 협상용 카드로 삼기위해(...) 점령작전을 입안한다.
미군 수뇌부는 부대를 2개로 나누어 한쪽은 나포된 마야게즈호를 탈환하고, 한쪽은 승선원들이 억류된것으로 의심되는 코탕섬을 점령하기로 한다.
5월 15일 아침, 태국에서 헬기 3대를 타고 온 해병대 59명, 해군 인양전문가 6명, 공군 폭파전문가 2명, 육군 통역관 1명 이 구축함 홀트에 도착했으며, 구축함 헨리 B. 윌슨까지 합류해 마야게즈호를 탈환하기 위해 '''아침 6시 30분''' 출발한다. A-7공격기에서 최루가스 투하를 신호로[6] 해병대 병력이 마야게즈호에 돌입하였지만, 배를 점거하고 있어야할 크메르 루주는 한명도 남김없이 도망간 다음이라 무혈입성하여, 마야게즈호를 탈환하는데 성공했고 구축함 홀트가 접안하여 예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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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9시 30분''', 인근 해상을 초계중이던 P-3 오라이언 초계기가 작은 어선을 발견했고, 이를 크메르 루주의 반격으로 간주하고 구축함 윌슨에 알리면서 총원 전투배치 지시가 하달되었지만 마야게즈호의 승선원으로 밝혀저 구조작업을 벌여, '''마야게즈호와 승선원 전원이 무사 귀환'''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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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코탕섬 점령작전
마야게즈호와 승무원들이 모두 무사히 귀환한 것과는 다르게, 코탕섬 점령 작전은 시작하기도 전에 잡음이 나오고 있었다.
미군은 코탕섬의 수비대 병력을 기관총과 박격포등으로 무장한 100~200명 정도의 적은 인원만 있다고 판단하였지만, 이게 실수였다. 캄보디아 크메르루즈는 베트남을 적대시하였기에 베트남을 감시하고자 이 작은 섬에 꽤 많은 병력과 장비를 준비시켰다는 게 뒤늦게 알려진다. 게다가, 코탕섬을 감시하던 AC-130건쉽에서 섬 곳곳에 배치된 40mm 대공화기를 발견하여 보고 하였지만 묵살했으며, 작전에 투입할 헬기도 강습훈련을 전혀 한적이 없었으며[7] , 헬기의 중량제한 때문에 박격포등의 중화기를 동원하지 못하였다. 대신 공중지원을 받을 예정이긴 했다.
5월 15일 새벽 '''4시 14분''', 코탕섬을 점령하기 위한 병력을 태운 공군 제21특수전 비행대 소속 CH-53,제40항공구조비행대 소속 HH-53 헬기 4대가 출발하였고, 계획보다 약간 늦은 6시 정각 섬의 동쪽과 서쪽에 각 2대씩 착륙한다. 섬의 서쪽 해안에 병력을 강습할때 까지 적의 대응이 없어서 작전은 순조롭게 잘 되는 듯 했다. 그러나, 레이더 장비와 여러 준비를 했던 섬이었으니 크메르루즈 측은 이미 알아차려서 무장을 하고 기다렸을뿐이다. 결국 미군들이 헬기에서 병력들이 내리기 시작하자 크메르 루즈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헬기 강습 작전에서 가장 취약한 착륙시기를 노려 사격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집중사격으로 엔진 1기를 피격당한 헬기는 병력을 내리자마자 황급히 상승해 현장을 이탈하려고 했지만 얼마 못가 바다에 불시착했고, 다른 1기는 연료통을 피격 당한채 겨우 이탈 하였다.
섬 동쪽으로 착륙하려던 헬기들도 집중 사격을 받아, 한대는 해변에 추락하고 한대는 파손된상태로 겨우 태국의 미군 기지로 귀환한다. 크메르 루주의 집중사격과 헬기의 추락으로 다수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냈으면서도 서쪽해안의 작은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선발대가 격렬한 저항에 놓이자 후발대의 작전도 차질을 빚게 된다. 동서 해안에 병력을 추가하는 것에서 이미 교두보를 확보한 서쪽 해안에 병력을 집중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하여, 크메르 루즈의 격렬한 저항 속에서도 헬기를 추가 투입하여 60여명의 해병대가 서쪽 해변에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다.
5. 영향
전사자가 41명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38명이며 3명은 실종된 상태다. 생포된 후 크메르 루즈에게 살해 되었다는 목격담도 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2008년 러시아 기업등이 캄보디아 정부와 코탕섬 임대계약을 완료하면서 코탕섬 일대를 리조트로 개발할 계획이라 실종된 3인에 대한 유해발굴작업을 서두르고 있다고 한다.##
워낙 개판인 작전이었던 탓에 밀리터리 실패열전(호비스트 출판사) 실패한 작전편에 수록 되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작전의 성패에 대해 전술적 목적이었던 마야게즈호의 탈환과 승조원 전원 무사귀환이라는 큰 성과를 낸 작전인지, 아니면 전사자만 41명을 기록한 실패한 작전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6. 관련항목
[1] 크메르 루즈는 캄보디아 영해를 침범했다고 주장했다.[2] 정작 이 배는 론놀 친미정권 시절 미군이 원조한 미국제였다.[3] 억류된 승무원만 80명이라서 함부로 구출작전을 펼치기도 어려웠고, 당시 베트남전을 치르고 있던 와중에 구출작전이 자칫 전면전으로 비화될수도 있어서 신중하게 대응하다보니 결과적으로 북한에 끌려가는 모양세가 되어 초강대국 미국의 체면을 구기게 된다.[4] 훗날인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연관이 된 선박이기도 하다.[5] 코탕섬과 본토인 캄퐁 솜은 거리가 가깝고 방향 또한 비슷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육지인)인천으로 가느냐 근처의 영종도로 가느냐 정도의 차이다.[6] 이 때문에 작전병력들이 방독면을 착용하고 있다.[7] 조종사 구출이나, 전투정찰이나 수색이 주임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