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포트

 



'''민주 캄푸치아 총리
캄푸치아 공산당 서기장
폴 포트
Pol Pot'''
'''이름'''
'''썰롯 써(សាឡុត ស, Saloth Sar)'''
'''출생'''
1925년 5월 19일
프랑스령 캄보디아 껌뽕톰 주
'''사망'''
1998년 4월 15일 (72세)
캄보디아 우떠미안쩨이 주
'''국적'''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image]
캄보디아 제1왕국 [image]
민주 캄푸치아 [image]
'''학력'''
프놈펜 기술고등학교
프랑스 무선공학학교
'''신장'''
175 cm
'''정당'''
캄푸치아 공산당
'''종교'''
불교무종교 (무신론)
'''배우자'''
키우 뽀너리
1. 개요
2. 생애
2.1. 유년 시절
2.2. 공산주의 입문
2.3. 베트남에서의 반미 투쟁
2.4. 쿠데타를 통한 집권
2.5. 집권
2.7. 몰락과 최후
3. 기타
3.1. 폴 포트가 죽인 사람의 수
3.2. 남은 추종자들
3.3. 그 외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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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본주의자는 죽어주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민을 돕는 길이다."

''도시는 개조될 수 없지만 인간은 개조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땀을 흘리며 농사를 지어 봐야 농사일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됩니다.''[1]

- 폴 포트 평전 517p

''숙부, 저는 숙부의 순수했던 교사 시절이 그리워요.''

- 폴 포트의 조카가 킬링필드에 경악한 뒤에 쓴 글.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이자 총리.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동남아시아 역사상 최악의 학살자'''.
본명은 썰롯 써(សាឡុត ស).[2] 폴 포트(Pol Pot)란 이름의 정확한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불어 Politique potentielle, 영어 Political potential(정치적 가능성)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다.
킬링필드 대학살의 주도자로 폴 포트가 집권하는 기간 동안 캄보디아의 인구는 750만 명에서 672만 명으로 줄어들었고, 당시 평균 수명은 14.5세까지 떨어졌다.[3] 폴 포트는 이 모든 업적(?)을 고작 집권기간 3년 6개월 안에 이루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전체 인구 7명 중 '''최소''' 1명[4]이 죽었다니 실로 기가 막힐 뿐. 하루에 평균 630명이 죽은 꼴이다. 총인구대비 사망자를 따지면, 2020년 기준 대한민국에서 대략 '''720만 명이 죽은 셈'''이다.[5] 이 정도 사망률이 나타나는 것은 경신대기근처럼 유례 없는 기상변화가 생겨 온 국민이 기아에 빠지거나, 6.25 전쟁처럼 전 국토가 포화에 휩싸이는 극단적인 상황 외엔 없다.
폴 포트는 1975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베일 속의 인물로서 실체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비밀의 유지가 혁명의 기본원칙이라고 강조한 인물이기 때문이였다. 심지어 그와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폴 포트의 출생일과 본명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훗날 폴 포트로 알려지는 써(ស)[6]는 1925년 5월 19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프렉스바우브(ព្រែកស្បូវ) 마을에서[7]에서 아버지 로트와[8] 어머니 사이에서[9] 태어난다. 당시 써의 집안은 마을에서도 부농이었고 여기에 사촌누나 메악이 시소와스 모니봉 왕자[10]의 첩으로 들어갔다. 모니봉이 27년 왕위에 오르자 메악은 사실상 왕비가 되었고, 1930년에는 이복누나 로응이 모니봉의 다른 후궁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써의 가문은 왕족와 연결되었고, 그 덕에 써는 상당히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낸다. 훗날 이 인간이 한 행보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배경이다.
어찌되었든 아버지 로트는 써에게 서양식 고등교육을 시키기로 마음먹고 맏형 수옹과 같이 프놈펜으로 보낸 뒤 캄보디아 전통대로 여섯 살 때 왕립 불교사원인 왓보툼(វត្តបទុម) 사원에 들어가 사미(동자승)로 교육받은 뒤 1935년 9월 가톨릭계 학교인 미셰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절에는 후궁인 이복누나와 자주 만났는데, 어린 소년이라 금남구역인 후궁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성적은 형편없었어서 원래 6년과정인 미셰학교를 유급으로 43년에야 졸업했다. 써는 당시 캄보디아의 유일한 중등 교육기관인 시소와트 고등학교에 입학하려 했지만 낙방하였고, 운좋게도 막 신설된 콤퐁참 근처의 프레아 시아누크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 시절에도 성적은 제법 나아졌지만 바이올린과 축구를 좀 잘한다는 것 말고는 크게 특출나지 않았다. 그렇게 1947년 써는 중학교 생활을 마친뒤 예전에 떨어졌던 시소와트 고등학교에 입학했다.[11] 정말 아이러니한 사실은 고등학교 시절 친한 친구 가운데 론 논이 있었는데 훗날 폴 포트 때문에 축출당하는 캄보디아 대통령 '론 놀'의 친형이다. 어찌되었든 써는 운좋게 입학은 했지만 48년 진학시험에는 떨어졌고 공업학교인 프놈펜 기술학교에 목공반으로 편입했다. 근데 이때도 재수가 터졌는지 당시 이 프놈펜 기술학교에서는 성적우수자 3명을 프랑스 대학에 국비유학생으로 보내주었는데 써가 편입한 그해에 갑자기 5명으로 대상이 늘었고 써는 과거 학교에서 쌓아둔 지식 등을 통해 49년 여름에 국비장학생에 선정돼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1949년 10월 써는 프랑스 파리의 프랑스무선공학학교(École Française de Radioélectricité)[12]에 국비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이때 먼저 입학한 먼 친적이자 친분이 있던 시소와트 소모노퐁[13]의 도움으로 파리의 부촌인 아미요 가에서 지방장관의 아들들과 같이 하숙했다. 이후 소모노퐁의 권유로 크메르학생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이 시작되고 이과정에서 이엥 사리, 손 센, 키우 썸펀 같은 훗날 크메르 루주 지도부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1950년 11월 켕반삭의 집에서 하숙하게 된다. 그리고 51년 중순쯤 공산당 세포조직인 마르크스클럽을 거쳐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공산당 활동을 시작했다.
파리시절 친구들 가운데 폴 포트와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크메르 루즈에 의해 처형되는 서구 지향적이고 개방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들과는 다투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들의 차이는 필명에서부터 나타났는데, 다른 동료들이 ‘자유 크메르’나 ‘크메르 노동자’같은 이름을 선호한 데 반해, 폴 포트는 ‘순수 캄보디아’ 같은 필명을 고집했다.
폴 포트는 세 차례나 낙제한 끝에 1953년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프랑스군의 탄압에 맞서 캄보디아 독립 운동이 시작되던 상태였는데, 이에 폴 포트는 형제인 살롯 차이를 따라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캄보디아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2.2. 공산주의 입문


공산주의, 반외세 운동에 참여한 이후 베트남의 반불 저항 운동에 동참하며 여러가지를 배우게 된다. 하지만 적어도 이 시절 친구, 동료로서 이후 크메르 루주와 거리를 둔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잔혹한 성격이라든지 음흉한 면은 없었다고 하며 과묵하고 예의 바르며 수더분한 인상이었다고 한다. 적어도 이 시절은 조국을 생각하고 외세로부터 조국을 구하자는 순수한 면(!)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베트남 사람들과의 충돌과 갈등으로 베트남과 손잡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다고 여기게 되었으며 캄보디아가 독립하고 한때 선생으로 착실하게 지내던 적도 있지만 서서히 반왕정 활동을 하면서 시아누크 비밀경찰에게도 수배 대상이 되어 밀림으로 잠적했는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소수 원주민들과 친해지면서 이를 계기로 공동체 의식, 나아가 독자적인 공산주의 정신(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인 나라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3. 베트남에서의 반미 투쟁


1960년대 중후반 베트남 전쟁 와중에 소수 원주민들이 주역이 된 공산당 분파인 크메르 루주(크마에 크롬-ខ្មែរក្រហម, 의미는 붉은 크메르) 창설에 기여했다. 나아가 북베트남중국의 지원 아래 무력 저항으로 캄보디아 왕정에 맞섰다.
이 무렵 크메르 루주는 미미한 세력에 지나지 않았으나 론 놀이 주도한 군부 쿠데타에 맞서고자 여러 세력을 끌어들이려던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 덕에 상당수 무기 지원 및 수를 급격히 늘어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게다가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베트콩을 지원하는 물자 운송로인 호치민 통로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지났기 때문에 미군이 캄보디아에 마구잡이 폭격을 하면서 국경에서 많은 사망자를 내자 국경에 살던 많은 소수 원주민들이 분노하여 크메르 루주에 들어오면서 갈수록 세력이 커져가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반미적 투쟁으로 민중들 지지까지 크게 얻었다.

2.4. 쿠데타를 통한 집권


'''"우리는 어떤 외부 세력과도 연계되지 않은 깨끗한 승리를 거두었다. 민주 캄푸치아는 앞으로 고립을 택할 것이다."'''

- 1975년 수도 프놈펜을 함락시킨 후 승리연설에서 한 연설

이렇게 론 놀이 무능함만 보여주고 특히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크메르 루주가 급부상하기 시작했고, 시아누크도 크메르 루주를 지지하며 더욱 입지가 커졌다. 당시 사람들은 "론 놀이 얘기하면 부하들은 졸기 시작한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무능했던 데다가 반공주의를 내세워 미군이 일으키는 학살을 방조하고 군부에서도 학살사건을 일으키며 민심이반을 더욱 부채질했다. 결국 1975년 폴 포트가 론 놀 군부를 뒤엎으면서 크메르 루주 정권을 설립했다. 이른바 민주 캄푸치아의 탄생이었다. 론 놀은 달아났지만, 미처 달아나지 못한 론 놀의 수하들과 가족들을 잡아다 학살한 뒤 그냥 내다버리고, 공산당을 장악하고 공무원 및 군부를 대대적으로 숙청한 다음 반외세 및 반자본주의를 기조로 소련이나 중국과 다른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표명했으며 전 국민 머릿속에서 자본주의 요소를 없애 공산주의로 무장된 투사로 기르려고 했다.

2.5. 집권


[image]
집권하던 시절의 모습
[1] 이런 말을 남겼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농업 생산량을 대폭 줄어들게 만들었다.[2] 나무위키에서는 본명인 썰롯 써로도 이 문서로 올 수 있다.[3] 중세 영국에서 흑사병이 창궐할 당시 영국인의 평균 수명이 17세 정도였다.[4] 인구 자연증가분을 감안하면 7명 중 1명은 어디까지나 최소수치다.[5] 대구광역시(250만)와 부산광역시(350만), 그리고 대전광역시(150만)까지 통째로 증발했다고 보면 되겠다.[6] 후술하겠지만 썰로라는 성은 나중에 붙은 것으로 어린시절에는 성이 없었다.[7] 현재 캄보디아의 콘폰틈프(ខេត្តកំពង់ធំ) 주의.[8] 후대에는 샬롯 펜으로 알려졌는데 이 이름은 훗날 프랑스가 식민정책으로 모든 캄보디아 인들에게 성을 붙이면서 개명한 이름이다.[9] 어머니의 개명후 이름은 넴속이지만 개명전 이름은 불명이다.[10] 프랑스가 명목상으로 내세운 국왕으로 일제강점기의 이왕직이었던 영친왕과 유사하다.[11] 써의 중학교 시절 성적은 중간 정도였는데 정말 예외적인 경우였다고 한다.[12] 지금의 EFREI이다.[13] 써의 형부이자 전대왕인 모니봉 왕의 조카로의 후궁인 누나덕에 친분이 있었다.

우리는 그동안의 투쟁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 전혀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것이다. 과거로부터 모든 것을 단절하고 전통은 사라질 것이다. 화폐와 경제체제가 사라져 국가가 인민들의 모든 것을 돌보는 사회를 건설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캄보디아 건설을 위해 수도에 있던 3백만의 인민을 농촌으로 분산시켰다. 이제 농촌은 혁명의 전초 기지가 될 것이며 인민들은 앞으로 사라지게 될 여러 도시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체가 될 것이다.

- 1984년의 폴 포트.[14]

프놈펜을 점령한 크메르 루주는 가장 먼저 모든 도시인들을 강제로 농촌으로 이주시킨 뒤 농사를 짓게 했다.[15] 폴 포트는 '모든 인민은 농경 산업에 집중해야만 하며 나아가 위험이 되는 모든 요소, 대중 문화 및 퇴폐하고 위험한 사고 방식을 가진 이들은 필요 없다.'는 원리를 내세웠다. 이리하여 안경을 써도 위험 분자로 몰려 강제 수용소로 와서 종일 막노동에 시달려야 했으며, 지옥 같은 고문에 엉터리 식사만 줬고 나아가 어떤 것도 의심하지 말라는 법칙을 만들었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은 그들의 동료라도 죽여버렸다.
'아무 생각하지 마라. 하는 말에 1초도 안 걸려서 무작정 답해라. 뭔가 생각하거나 답변이 늦는다면 그것은 위험한 요소이다.'라면서 대답이 늦는 것만으로도 채찍질에서부터 온갖 고문이 이어졌다. 그리고 사회주의 공화국으로서 아이들은 국가가 키우며 부모는 아이들과 떨어져 사회적 생산(농업)에 기여하면 된다는 말도 안 되는 교육 방식을 강요하면서 인민들을 경악하게 했다.
외국어와 소수 민족의 민족어 사용이 금지되고, 외국과의 무역도 단절되었다. 다만 오래 전부터 우호 관계를 유지하던 중국과는 예외적으로 부분적인 교역이 이루어졌다. 쌀과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이 중국으로 반출되었고, 중국에서 무기가 대량으로 들어왔는데, 무기는 잃어버린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해서 베트남과의 전쟁에 사용했다.

2.6. 킬링필드


이렇게 크메르 루주 정권이 괴상한 정책을 시행하여 론 놀 정권의 폐단을 청산하고 나라를 정상으로 되돌릴 것이라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자 민심이 이반하여 시위와 반발이 이어졌고, 강경방침으로 모든 것을 바꾸었다.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는 극단적인 방침이었다. 총알을 아끼고자 칼과 몽둥이, 그리고 그 유명한 손을 묶고 비닐 봉지를 머리에 씌워 질식시키는 방식[16]까지 동원됐다. 농민 이외에는 모두 다 가짜라고 생각했던 크메르 루주는 '''영어를 할 수 있다는 명목으로, 손바닥에 굳은 살이 없다는 이유로,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사회의 장애물로 취급해서 죽여버렸다.''' 아이들을 나무에 패대기 쳐 죽이면서 나무에 스피커를 달고 혁명가를 틀어서 비명소리를 덮었다는 이야기, 유독 가시가 많은 설탕나무로 사람을 매질해서 죽였다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도 전한다.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 정권은 자본주의나 외국과 관계되어 있는, 또는 관계되었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개인의 사유 재산과 시장 경제는 박살이 났고 수도 프놈펜의 시민은 노동자들을 제외하고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전에 있던 화폐 제도는 폐지되었으며, 프놈펜 중앙은행은 폭탄으로 폭파된 후 집단 농장이 캄보디아 곳곳에 세워졌다.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 공무원, 교수, 교사, 의사, 약사 등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중산층보다 잘 사는 사람들은 무조건 처형해야 할 대상이었다.
또한 손을 보고 손바닥에 못이 배기지 않은 사람들은 무조건 부르주아로 몰아서 그 사람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까지도 학살했다. 크메르 루주는 총알을 아끼기 위해서 구덩이에 사람들을 생매장하거나 사람들을 우물에 넣어 버리기도 했다. 심지어 농민이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오해하여 죽이거나, 국제적인 경기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운동선수를 2천 명이나 학살하기도 했다.
또한 미군공습이 있다는 명분으로 2일~3일 정도만 수도에서 나가도록 도시 거주자에게 명령하여 도시인들을 지방에 있는 집단 농장에 이주시켰다.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환자나 나이가 많은 노인, 임산부와 노약자도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으며 농장에는 링거를 꽂은 상태로 링거를 당기면서 걷는 환자와, 혼자서 출산하는 임산부들도 많았는데 그 풍경은 가히 지옥과도 같았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증언에 의하면, 가족이 행방불명이 돼서 그 가족이 돌아올 때까지만 집에서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자 크메르 루주는 그렇게 집에 있고 싶다면 죽을 때까지 집에 있으라면서 문에 쇠사슬을 묶은 채로 감금했고 물도 마시지 못해서 결국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캄보디아 내 기독교인 수는 약 1만 명 정도였는데,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는 그중 9천 명을 죽이고 종교행위와 포교활동을 금지했다. 프놈펜의 가톨릭 성당과 바탐방의 캄보디아 복음교회는 폐쇄되었고, 난민 수천 명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태국 국경으로 탈출했다.
이러한 무자비한 정책으로 농촌의 노동력은 어느 때보다 많았지만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아와 기근에 시달렸다. 캄보디아는 해마다 2백만 톤의 쌀을 수출하는 국가였지만, 1975~76년에는 비축한 쌀이 전혀 없었고, 1977년이 되어서야 쌀 수만 톤을 수출할 정도로 국가가 초토화되었다.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거나 일할 동기가 부족했으며, 집단 농장의 수확량이 예전보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캄보디아 국민의 삶도 무섭게 하나가 되어갔다. 모든 사람들은 검은색 옷만을 입어야 했다. 심지어 무엇을 먹고, 언제 잠을 자며, 어디에서 살고, 심지어 누구와 결혼할지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고 오직 국가만이 정할 수 있었다. 결혼식은 최소 10쌍을 모아서 정부 기관 주관으로 합동 결혼식 형태로 치뤄졌다. 또한 보통 일주일에 두 번씩 열리는 생활모임 시간엔 자아비판이 강요되었는데, 고참 지도부의 지휘하에 각자 자신이 잘못한 일과 최근에 한 활동을 공개적으로 자백했다. 남녀노소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크메르 루주의 모든 간부들이 참여해야 했다. 이 자아비판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은 상호감시와 잘못에 대한 고발이였기 때문에 서로를 계속 경계하고 의심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폴 포트는 1978년에 크메르 루주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을 인식하고는 국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서 가족끼리 개별적인 식사를 허용하고, 여러 가지 색으로 된 옷을 입어도 좋다는 조치를 시행하기도 했다. 물론 그와 동시에 집권 이래 최대의 숙청 작업도 진행되어서 이때에도 수만 명이 처형당했다.
누온 체아 전 인민대표의회 의장의 부인 킴 세인은 당시 폴 포트와 그의 측근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손 센 국방장관 부인 등과 함께 건물 1층에 살고 남편(누온 체아), 폴 포트, 이엥 사리, 키우 썸펀이 3층에 살고 있었다. 근무 장소이기도 하고 숙박 장소이기도 했다. 폴 포트는 암살을 피하기 위해 잠자는 곳을 때때로 바꾸고는 했다.

내가 맡은 일은 이들에게 하루 세 번의 식사를 만드는 것이었다. 밥 이외에 반찬은 두 종류뿐이고 간부 식사도 결코 사치하지 않도록 정해져 있었다. 남편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식사를 나를 때뿐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최고 간부 집단 식사뿐 아니라 외국에서 손님이 와 요리사가 요리할 때 입회하는 일도 했다. 요리사가 독을 넣지 못하도록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이들을 노린 독살 미수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출처

결국 750만 인구를 4년 만에 672만 명으로 줄여 놓은 가운데 1975년에는 영해에서 미국 상선 마야궤호를 나포하면서 이에 미국이 구출 작전을 벌였으나 실패로 끝나자 이를 마치 미국을 이겼다는 투로 홍보하기도 했다.

'''"베트남 놈들을 정글 속 원숭이들처럼 깩깩거리며 죽게 하라"'''[17]

하지만 이런 와중에 크메르 루주는 캄보디아 내 베트남 사람들까지 대거 학살 및 숙청하였고, 베트남을 선제 공격하도록 지시하여 베트남 마을 두 개를 박살냈다. 이때 먼저 베트남을 공격한 이유에 대해서는 베트남에 대한 역사적 반목과 폴 포트의 깊은 불신으로 인한 피해망상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또한 원래 역사적으로도 캄보디아인들은 베트남을 증오했으며[18], 킬링필드 때문에 묻혔지만 론놀 정권도 베트남 양민에 대한 학살을 자주 실행했다. 그럼에도 크메르 루주 몰락 이후 베트남의 괴뢰 정권이 캄보디아에서 상당한 지지 세력을 유지했다는 것은, '''민족 간 반목까지 잊어버릴 정도로 얼마나 크메르 루주가 막장이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결국 폴 포트는 계속 베트남을 자극하던 것도 모자라 무력으로 베트남을 선제공격했고, 분노한 베트남의 공격으로 1979년 민주 캄푸치아 정권은 사실상 무너져 베트남의 괴뢰 정권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이 세워진다. 이때 후퇴한 크메르 루주는 밀림으로 들어가 산발적인 저항을 하게 된다.
이때 미국은 베트남을 막고자 크메르 루주를 지원했고(...), 미국의 이같은 개입은 지금까지도 국제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는다.[19] 그러나 국제사회조차 이를 비난할 자격도 없는 게, 이들 스스로도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불법 괴뢰정부라 보며 크메르 루주를 합법정권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2.7. 몰락과 최후


[image]
말년의 폴 포트
[14] 출처 : Grant Evans & Kelvin Rowley 共著, `Red Brotherhood at War`[15] 그렇게 도시에서 이주한 사람들을 크메르어로 '새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크메르 루주 정권의 경계 대상으로 이래 후술할 숙청과 고문의 대상이었다. 반대로 원래 농촌에 살던 '옛 사람'이라는 계층은 비교적으로 정치적 탄압이 적었다.[16] 국가주석 키우썸펀의 아이디어.[17] 민주 캄푸치아 헌법에 따른 국가수반 키우 삼판이 했다는 말도 있다.[18] 특히 역사적으로 악연이 깊은데 호찌민이 위치한 메콩강 일대 영토가 원래 캄보디아의 영토였는데 이를 참파를 병합한 베트남이 집어 삼켰으며, 베트남이 캄보디아의 내정에 간섭한것은 물론이고 캄보디아의 국체 전체를 집어삼킬뻔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물론 태국도 강성했기 때문에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당연히 이러한 이유로 캄보디아에서 베트남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19] 이때의 지원으로 인해서인지 크메르 루주 민병이 M16 소총을 든 사진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베트남의 개입으로 크메르 루주의 민주 캄푸치아 정권은 캄보디아의 주도권을 잃었고 이 때 베트남의 괴뢰정권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이끌고 있던 훈 센이 부각되었다. 훈 센은 이때 주요 자리들을 거친 후 1985년 32세 나이로 총리가 되었다.[20] 정글로 도망친 폴 포트는 공식적으로 크메르 루주 총지도자에서 물러났으나 실세로서 계속 막후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결국 부하들과 충돌했다. 1989년에 베트남군의 철수로 캄보디아국이 성립되자 시아누크의 민족연합전선(FUNCINPEC), 손 산의 크메르인민국가해방전선(KPNLF)과 함께 새 정부 구성을 논의코자 했다.
그 사이 훈 센의 정부군, 베트남군과 전투가 격렬해지면서 크메르 루주들 사이에도 내분이 심화됐다. 폴 포트는 옛날부터 함께 해 온 동료들보다 전투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따 목 참모총장을 의지했다. 이후 1990년대에는 따 목이 폴 포트를 대신해서 간부들을 회의에 소집할 정도였다.
한편 폴 포트파의 내분은 더욱 심해졌고, 1995년 부하들의 배신으로 폴 포트는 암살 위기를 겪기도 했다. 또한 중국 원조를 착복한 배신자로 규탄 받은 이엔 사리는 1996년 숙청에 겁을 먹어서 병사 4천 명을 이끌고 투항했는데, 폴 포트로서는 큰 타격이었다.
그러던 중 1997년 6월 10일 밤에 폴 포트의 최측근이자 민주 캄푸치아의 국방장관인 손 센 일가가 참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당시 손 센은 휴대전화로 캄보디아 정부의 훈 센과 은밀히 교섭을 했는데, 폴 포트가 이 사실을 알고 배신자라 하여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병사들은 지시를 받고 손 센과 가족을 모두 사살했다.
따 목은 폴 포트가 그의 오른팔이었던 손 센을 살해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1997년 7월 25일 돌연 손 센 일가 살해죄로 폴 포트를 구속해 인민 재판에 회부하여 종신형을 선고했고, 폴 포트는 모든 힘을 잃고 가택연금을 당했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폴 포트는 산 중턱에 있는 집에 연금되었는데 조잡한 헛간이었다. 폴 포트의 젊은 아내인 미아스와 경호원, 키우 썸펀의 아내가 폴 포트의 시중을 들었지만, 폴 포트는 이미 심각한 심장병과 고혈압을 앓는 데다 암에 걸린 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폴 포트는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죄를 후회하지 않았고 죽기 전에 했던 인터뷰에서조차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뻔뻔스럽게 주장했다. 그는 "나는 투쟁을 수행했을 뿐 사람을 살해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라, 내가 야만인으로 보이는가. 아직 내 정신은 말짱하다.", "75~78년의 통치기간 중 우리의 운동이 실수를 저지르긴 했어도 이는 베트남 침공으로부터 캄보디아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나는 투쟁을 수행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폴 포트는 그밖에 정적에 대한 학살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고 주장했다. 악명 높았던 '뚜올 슬렝'을 물어 보자 그 고문소에 대한 '존재 자체'를 부인했고, 아사 등을 포함한 대량학살은 모두 베트남 측이 했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또 지난 6월에 발생한 손 센 일가 살해 사건에[21] 대해서는 자신이 처형을 명령했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그는 "손 센과 그 가족만의 처단을 명령했을 뿐 어린애들까지 죽이라고 하진 않았다"고 주장했다. 자료
그러던 중 1998년 4월 빌 클린턴 행정부가 폴 포트를 인도적 범죄 혐의로 체포해 재판을 받게 할 방침을 밝혔고, 캄보디아 정부군의 공격이 심해지는 가운데 간부 중에는 폴 포트를 미국에 인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당시 폴 포트는 머리를 검게 염색한 상태였는데, 크메르 루주 조직이 완전히 와해되는 중이었던 탓에 태국으로 도망칠 준비를 했던 때문이라고도 하나, 따 목이 폴 포트를 태국 난민캠프를 경유해서 미국에 넘길 요량으로 위장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폴 포트는 대단히 쇠약해져 있었지만 스스로 걸을 수 있을 정도였는데 1998년 4월 15일이었다.
16일에 구금장소 이동이 예정되었었는데, 15일에 폴 포트는 심장마비로 급사해버렸다.[22] 그러나 당시 정황이 석연치가 않아 온갖 반인륜적 범죄의 책임을 전부 폴 포트에게 떠넘기려던 크메르 루주 지도자들에 의해 살해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인터뷰를 하러 찾아갔다가 그가 죽은 직후 미망인과 대화한 기자 네이트 테이어에 따르면, 폴 포트 본인의 부탁으로 부인이 음독 자살을 도와준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 출처 링크
많은 크메르 루주 간부들은 폴 포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옛 지도자와 연루될까 두려워 모른체 했고, 폴 포트를 가택연금시킨 따 목은 “지금은 폴 포트가 거름보다 못한 존재가 됐다.”고 말했다. 옛 부하들은 외딴 시골에 폴 포트의 시체를 들고 가 가족들과 옛 정권의 2인자였던 누온 찌어가 보는 앞에서 '''폐타이어, 쓰레기와 함께 화장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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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포트의 장례식
[20] 이후 훈 센은 2019년 현재까지도 총리이다. 훈 센 문서 참고.[21] 폴 포트의 축출을 야기했던 당시의 사건으로 모두 14명이 학살당했으며 이 중엔 젖먹이 손 센의 손자들까지 있었다.[22] 이원복 교수 학습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 따르면 "혁명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유언을 남긴 걸로 돼 있으나, 사실무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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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포트의 묘지
폴 포트의 사망 이후 키우 썸펀 등을 비롯한 크메루 루주들은 내전에서 패배하고 1998년 12월 누온 찌어와 키우 썸펀은 투항했으며, 1999년 3월 따 목 참모총장이 구속되고 결국 모든 크메르 루주 세력들은 체포되어 현재도 재판을 받고 있다.

3. 기타



3.1. 폴 포트가 죽인 사람의 수


폴 포트의 정권 시절 죽은 사람들의 숫자는 정확할 수가 없다고 한다. 미국의 폭격 및 내전에서 제대로 피해자 규모도 통계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교도소들은 공로를 부풀리기 위해서 위험 분자를 제거했다고 사망자를 일부러 더 많이 기록했다고 한다. 그래서 기록으로는 처형되었다고 하지만 막상 베트남군이 몰려와서 해방된 수용소에서 살아 있던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반대로 처형 기록이 전혀 없음에도 시체조차도 찾지 못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상당수 기록도 파기되었고 남은 기록도 워낙에 엉망인 상황에서 정확한 사망자 파악은 이뤄지지 못하게 되었다. 현재까지 수집된 자료에 따른 추정치는 대략 70만~250만 사이에 이른다.

3.2. 남은 추종자들


캄보디아 내 소수민족들은 폴 포트를 추앙하는 이들이 꽤 있다. 캄보디아 안에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던 그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크메르 루주 시절 정치적 발언권이나 경제적 혜택을 주었기에 자발적으로 크메르 루주가 된 사례도 많았다. 그리고 축출되고도 크메르 루주가 밀림 속에서 10여 년에 이르는 내전을 벌였던 것도 이들의 지원과 지지가 컸던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폴 포트가 죽어서 화장될 때 원주민들 중에서는 되려 슬피 울던 이들도 꽤 되었고 지금도 신성시하여 제사까지 지낸다고 한다.[23] 그래서 동유럽의 발트 3국, 슬로베니아, 비셰그라드 그룹, 근처의 베트남에선[24][25] 이들을 보고 또라이라며 매장시켜버리거나, 왕따를 시켜버리는 일이 생긴다고 한다. 한 마디로 비셰그라드 그룹을 비롯한 구 공산권에선[26] 저 소수민족들을 정신병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젊은 세대들은 주류민족과 동화가 되든 동화를 거부하든간에 캄보디아의 경제가 성장할수록 추종하는 기성세대를 '저 꼰대들, 정신병원에 보내버려?' 또는 '미친 거 아냐?'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한 마디로 너무 근시안적이라는 것이다.

3.3. 그 외


  • 말년에 폴 포트가 외국 기자와 한 인터뷰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링크 주로 기존에 알려져 있던 사실들을 폴 포트가 직접 반박하는 내용으로, 크메르 루주의 리더가 된 과정이나 비밀주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크메르 루주가 벌인 학살에 대하서는 실수로 칭하는 등 어느 정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긴 하나, 모든 것이 베트남에 의한 캄보디아 복속을 피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하며 베트남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공산주의자였으면서도 베트남을 물리치기 위해 자유진영 국가인 태국과도 손잡으려 했던 사실이나, 서방의 지원을 은밀히 받았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프랑스에는 지금도 폴 포트의 동생 및 여러 친척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크메르 루주 정권 시절부터 프랑스로 망명갔다고 하는데 친척이고 형제들이라도 자신의 주장에 동참할 것을 강요하는 폴 포트의 모습을 보고는 기겁하고 프랑스로 달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폴 포트가 죽을 당시 해외 언론들이 이들을 찾아가 인터뷰도 했었다. 다들 착잡한 반응을 보였다고 하는데 폴 포트의 동생은 형도 순수하던 시절이 있었다면서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심지어 그의 형이었던 살롯 셍 역시 똑같은 말을 했다. 이 양반이 맨 위의 숙부의 만행에 경악하여 글을 남긴 조카의 아버지로, 왜 이 형이 오랫동안 알지를 못했냐면 폴 포트의 동생이 도저히 알려줄 수가 없었다고 했다. 형이 충격을 받을까봐. 그러나 끝내 그 사실을 알게 된 폴 포트의 형은 결국 동생을 원망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 미국의 밀덕판 VS놀이라 할수 있는 프로그램 Deadliest Warrior에선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와 사담 후세인특수 공화국 수비대가 가상으로 맞붙는 에피소드가 나온 바 있다. 기습공격으로 5:5에서 2:1로 후세인을 몰아 붙이는 데 성공했지만 후세인의 훼이크에 낚여 사살당하며 패배한다. 링크
  • 기독교에서 무신론을 비판하기 위해, 폴 포트와 히틀러, 스탈린 등이 무신론자라서 사악하고 무자비한 학살을 저지를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무신론자 진영에서는, 이들 학살자의 교조화된 이데올로기가 결국 현재의 기독교 교리와 다를 바 없는 것이 아니냐고 반박한다.
  • 영국의 테너 가수 폴 포츠와 이름이 비슷해 외국에서도 간간히 조크로 엮이곤 한다. 실제로 폴 포츠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한 영화 '원챈스'에도 폴 포트가 언급되었다. 폴 포츠는 폴 포트를 아주 싫어한다.
  • 미국의 하드코어 펑크 밴드 데드 케네디스의 노래 Holiday In Cambodia에 '폴 포트'를 반복해서 외치는 부분이 있다. 이 노래 자체가 허세부리는 미국 대학생이나 특권 의식을 뽐내는 여피족들을, 폴 포트 정권 하의 캄보디아에서 휴일을 보내게 해주겠다고 비판하는 노래이다.

4. 관련 문서



[23] 그러나 이는 시골거주자 한정으로 소수민족이라도 도시에 거주하거나 태어났다면 똑같이 탄압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캄보디아 소수민족들 중에서도 폴 포트를 증오하는 이들과 폴 포트를 존경하는 이들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24] 알다시피 이들 국가는 탈냉전 이후 개혁 개방을 통해 후발선진국~신흥 공업국으로 발돋움한 국가들이다.[25] 다만 루마니아의 경우 경제위기가 닥쳐오자 독재자를 그리워하는 일이 도로 생겨났다.[26] 중국, 심지어 쿠바나 북키프로스, 라오스도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