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1. 개요
太祖
동아시아의 역대 왕조들에서 사용된 군주에게 올리는 묘호 중 하나.태(太)
光啓于禩(광계우사) : 천대(千代)에 빛을 뿌리다
2. 의미
묘호 중에서도 최고의 묘호. 대개 한 국가를 창건한 창업군주나 실질적으로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추존 군주, 대개 창업군주 자신이 직접 태조 묘호를 받는 경우가 많고, 종종 창업군주의 아버지가 실제적인 공이 많은 경우 이 묘호를 받게 된다. 즉, 왕조국가판 국부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고황제라는 시호도 함께 받는다. 비슷하게 창업군주에게 많이 붙이는 묘호로 고조(高祖)가 있는데, 태조보다 사용 빈도는 적은 편이다.
대체로 실제 재임한 황제 중에서 첫 번째 황제가 태조를 받는 경우가 많지만, 건국 이전에도 업적이 넘사벽이라면 가끔씩 추존황제가 태조가 되고 1대 황제가 다른 묘호를 받기도 한다.[3][4]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는 '''왕조를 창건한 건국자는 거의 자동적으로 태조란 묘호가 붙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오대십국시대나 오호십육국시대처럼 대혼란기에는 수많은 개국 인물들이 당당하게 태조란 묘호를 받기도 한다. 보통 이런 왕조의 경우 태조 다음이나 2,3대 황제시절에 몇대 못가 국가가 멸망하는 경우가 많아서 태조 - x - 말제로 왕조가 끝나는 아스트랄의 극치를 보여준다.
창업 군주인 만큼 제왕으로서의 행적보다는 그전에 입지를 다지던 과정의 행적이 더 눈에 띄는 경우가 많기에, 묘호보다는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흔하다. 한국의 경우 '고려 태조', '조선 태조'보다 각각 '왕건', '이성계'라 불리는 경향이 훨씬 많다.
3. 군주 목록
3.1. 한국사
3.1.1. 신라
태종 무열왕, 원성왕(열조)과 더불어 묘호가 전해지는 단 셋뿐인 신라 왕이다. 원래 고대 중국에서는 묘호를 아무 군주한테나 올리지 않았다. 모든 군주에 묘호를 올리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때부터이고, 한반도의 경우 고려가 처음이다[14] . 아마 신라 역시 그런 관례에 따라 극히 일부의 군주에게만 묘호를 올렸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누가 태조 묘호를 받았는지 언급이 없어 누가 태조인지는 여러 설이 있다.
신라에 태조라고 부르는 왕(또는 추존왕)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근거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조에 '태조대왕'이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것과 진흥왕 순수비, 흥덕대왕묘비 파편, 김인문묘비 등의 신라 상대와 하대까지 여러 금석문에서 태조라는 왕을 거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라의 무열왕에게 태종이라는 묘호를 올렸다는 것은 그 이전 태조의 존재를 전제로 했다고 봐야 한다. 태조가 없는데 태종이 갑자기 등장할 수가 없으며, 태조라고 불리는 사람이 아예 없었는데 무열왕한테 묘호를 처음 올릴 것이라면 그를 태조라고 해야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태종이라고 했다는 건 태조가 따로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어차피 신라 때 만들어진 진흥왕 순수비에서 태조가 거론되니 태조라고 부르는 왕(또는 추존왕)이 있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대체 누가 태조라고 불렸느냐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는 것 뿐이고. 오늘날 당시의 역사를 적은 기록이 금석문들 외에는 전하지 않고[15] 남아있는 책 중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도 신라가 멸망하고 수백년이 지난 고려 중기 때 편찬된 것이라 자료의 한계로 빠진 정보들이 꽤 있다. 때문에 신라 당시에 누구를 태조라고 불렀는지 확실치 않다. 그래서 학자들 사이에 여러 설이 있는데 언급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 혁거세거서간 - 신라 첫 군주. 그런데 가능성이 높지 않다. 박씨가 비록 왕위는 놓쳤다지만 주요 귀족으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만약 박씨의 시조이기도 한 박혁거세의 권위를 함부로 드높이면 당시 왕위를 독점하고 있던 김씨 왕조의 정통성에는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아래 주석들도 참고할 것.
- 미추 이사금 - 신라 김씨의 첫 군주. 당시 신라는 박혁거세의 시조묘(始祖廟)와 별도로 김씨 세습을 강화하기 위해 신궁(神宮)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김씨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박혁거세보다는 김씨 왕(추존왕 포함) 중에 누군가를 태조로 추봉하여 권위를 높이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미추 이사금을 태조로 추정하는 사람들은 태조가 최초의 군주에게 주로 붙인다는 점에서 김씨의 첫 군주인 그를 태조로 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 김알지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는 신라의 군주가 아니었지만 후대에 왕으로 추존하고 태조라는 묘호를 올렸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 김성한/김세한 - 김알지의 아들. 알에서 태어났다는 김알지는 김씨의 신성성을 강화하기 위해 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낸 인물이고 실질적 김씨의 시조는 김성한이라는 설도 있다.
- 석탈해 - 신라 첫 군주가 박혁거세가 아니라 석탈해로 보기도 한다. 오늘날 박씨와 김씨(무열계: 후손 현존 여부는 일단 차치하고..) 중심의 신라사 기술 문제점을 지목하는 입장이다. 문경현 교수에 따르면 신라에 박씨 왕은 없었다. 그리고 2국통일이며 남북국 시대다. 고인이 되신 이근직 교수에 의하면, 현재 경주 신라 왕릉은 7기만 주인을 알 수 있다. 오릉 및 삼릉은 통일신라(학계에서는 '대 신라'로 호칭)시대 귀족묘라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논지들로 석탈해를 국가 시조로 지목하는 것이다. 신라 태조는 후대에 추존된 왕이다. 시기에 따라 그 대상이 바뀌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3.1.2. 백제
한국의 기록에는 전하지 않고, 일본의 사서인 《속일본기》에 백제의 태조가 도모왕이라고 기록돼 있다. 고대에는 인명 표기가 통일되지 않은 채 여러 가지로 쓰였으므로 이 도모왕은 발음이 비슷한 고구려 시조 주몽(추모)일 가능성이 높다. 이상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온조왕이 유리왕에게 밀려나 이주하여 백제를 세운 뒤 동명왕을 모시는 사당을 지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기 때문에 백제 왕실이 주몽의 정통 후계자를 자처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백제는 고구려 왕을 비정통 또는 방계로 취급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주몽을 태조라고 높였을 가능성은 예상할 수 있다.
당시 백제에서 왕들이 묘호를 안 썼는데 이상하지 않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으나 고대에는 매우 중요한 업적을 세운 군주에게만 묘호를 올렸기 때문에 이렇게 특정 왕만 묘호를 받은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든 군주에게 일일이 묘호를 올리기 시작한 건 당나라 때부터이며, 한반도 왕조 중에서는 고려가 최초이다(단 원나라의 간섭을 받기 시작하면서 중단됐다가 조선이 건국되면서 부활함). 이런 기록이 사실이라면 고구려는 주몽을 태조라고 안 하고 다른 왕을 태조라고 추존했는데 반해 백제는 오히려 주몽을 태조라고 추존한 게 돼서 주목된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동명성왕을 태조로 추존했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신라본기 문무왕조에서 왕이 고구려 왕자 안승을 왕으로 봉할때 '태조 중모왕(太祖 中牟王)'이라는 이름을 언급한다. 시호 중 '중모(中牟)'는 위에서 적은 것처럼 주몽의 다른 표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를 볼때 주몽이 태조로 추존됐을 가능성 역시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태조대왕의 시호는 어떻게 설명해야되는지 의문이 생긴다.
일본측 정사서인 속일본기 연력 8년조에 백제 왕족 후손들이 일본 칸무 덴노에게 자신의 조상의 내역을 보고하는 내용 중에 백제가 태조라는 묘호 사용한 것을 분명히 밝혔다. 때문에 묘호를 안 썼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른 기록도 아니고 백제 왕족 출신 도래인들 입에서 나온 말이 기록된 거기 때문이다.
3.2. 중국사
3.3. 베트남사
4. 기타
- 김해 김씨 족보에서는 금관가야 수로왕을 태조로 쓰고 있다. 물론 당시에 그랬다기보다는 후대에 김씨들이 추존한 것이지만, 중국식 묘호의 개념을 가야에 적용한다면 수로왕의 묘호는 태조가 되었을 게 확실하니 억지는 아니다.
- 북한의 김일성의 별명이기도 하다. 이유는 물론 북한을 '김씨조선'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독재 정권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 가끔 현대그룹 창업주였던 속칭 "왕회장" 정주영 전 회장도 가끔 태조라고 불리기도 했다. 특히 왕자의 난 때문에...
- 한국사의 태조들은 유달리 유훈이 무시당하는 징크스가 있다. 왕건의 훈요 10조는 결국 대부분 지켜지지 못했고, 이성계는 유언으로 미리 고향의 묫자리를 부탁해뒀지만 아들 태종은 무시하고 한양 근처에 묻었다. 심지어 김씨 조선 태조조차도 혁명렬사릉에 묻어달라는 유훈이 씹히고 핵종의 지시로 금수산태양궁전에서 엠버밍 처리되어 영구보존 중이다.
[1] 한 왕조에서 태조와 공이 버금가는 임금.[2] 태조와 비슷하게 창업군주에게 붙는 묘호지만 사용 빈도는 적음.[3] 예를 들면 조위는 위나라가 건국되기 전에 사망한 조조가 태조이며, 서진 역시 진나라 건국 전에 사망한 사마소가 태조고 1대 황제인 사마염은 세조가 됐다.[4] 대개 태조의 뒤를 이어 등극하는 2대 군주는 태종이라고 묘호가 붙는 경우가 많다. 이는 보통 국가를 창건하는데 태조와 함께 큰 공을 세운 경우도 많고, 왕조의 창건자가 죽은 다음 국가의 질서를 재편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2대 군주가 다 그런 것은 아니므로 다른 묘호가 붙은 사례도 많다.[5] 흔히 알려진 동명성왕의 이름은 주몽인데 주몽은 삼국사기에서 나오고 추모는 삼국사기 뿐만 아니라 광개토대왕비에서도 나온다.[6] 신라 문무왕이 보장왕의 아들 안승을 왕으로 봉할때 '태조 중모왕'이 안승의 시조라고 언급하였다.[7] (일본 신찬성씨록 기준)온조의 친아버지[8] 시조 비류설에 따르면 주몽은 비류와 온조의 친아버지가 아닌 양아버지다. 친아버지는 북부여 해부루왕의 서손인 우태로 우태는 백제 시조 구태설에 나오는 구태와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9] 묘호가 아니라 시호일 가능성 있음[10] 김해 김씨 족보에 기록된 묘호이다.[11] 신라태조 성한의 존재는 족보 같은 신빙성 낮은 사료뿐만 아니라 흥덕왕릉비 파편 등 당대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김성한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아들 김세한(金勢漢) 또는 김열한(金熱漢)으로 추정되는데 신라인들이 김알지의 아들 김세한을 신라의 태조로 추존했다는 얘기가 된다. 참고로 경주 김씨 족보와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알지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김성한은 바로 이 김세한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12] 신라본기 신문왕조.[13] 본래 이름은 알다시피 이성계지만, 왕위에 오르면서 피휘를 위해 개명했다.[14] 단 원 간섭기 이후 한동안 중단됐다가 조선 건국 후 재개된다.[15] 신라의 관찬사서였던 국사는 소실됐어 전해지지 않는다.[16] 시호인 고제(高帝)의 높임말이다.[17] 위나라 문제는 세조와 고조라는 두 가지 묘호를 갖고 있다.[18] 이후 고조(高祖)로 바뀌었다.[19] 이후 의조(義祖)로 변경되었다.[20] 이후 충무황제(忠武皇帝)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