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미 존
1. 소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동했던 좌완 투수. '''통산 288승, 4710.1이닝의''' 대투수[1] 지만 자신의 이름을 딴 수술로 더 이름이 많이 기억되는 선수다. 무려 '''26년간''' 메이저리그 선수생활을 했는데, 메이저리그 이 부문 공동 1위인 노익장의 화신 놀란 라이언, 19세기 선수(겸 감독)였던 캡 앤슨의 27시즌에 이은 역대 메이저리그 공동 3위 기록이다. 또 다른 26시즌 선수 한명은 19세기 ~ 20세기 초반 선수였던 디콘 맥과이어.[2] 놀란 라이언과 더불어 노익장의 상징과도 같은 리키 헨더슨보다도 1년 더 선수생활을 했다. 하지만 토미 존이 이렇게 오래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다는건 잘 알려지지 않았다. 리키 헨더슨은 야수중에서 1위지만 투수쪽에는 놀란 라이언이 있기도 하고, 그리고 이 아저씨는 후술할 '''수술'''로 인한 유명세가 워낙 압도적이다.
1963년 20살의 나이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소속으로 빅리그에 데뷔한다. 64년까지 빅리그에서 보여준 모습은 20대 초반의 유망주가 보여주는 모습치고는 꽤 괜찮았지만 더 좋은 선수가 탐이 나서 트레이드 매물로 팔렸는지 65년 22살 시즌에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팀을 옮긴다.
화이트삭스에서 포텐을 터트린 토미 존은 화이트삭스에서의 첫해 14승 7패 2.62의 성적에 리그 최다인 5번의 완봉을 기록하는 등 에이스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듬해에도 6완봉으로 리그 최다. 화이트삭스에서 28살이던 71년까지 뛰었는데 10완투를 세번이나 기록하고 매 시즌 최소한 1번은 완봉을 기록하는 등 완투형 투수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1972년 LA 다저스로 이적한다. 다저스로 이적해서도 3년 연속 두자릿수 승수를 올리는 등 기세가 등등했지만, 1974시즌 부상을 당하면서 이듬해인 75년을 통으로 날려먹는다. 하지만 수술 후1976년 성공적으로 복귀하여 이듬해인 77년에는 34살에 나이에 커리어 첫 20승을 기록하면서 노익장을 제대로 보여준다. 1979년 36살의 나이에 뉴욕 양키스로 이적하는데 양키스에서의 첫 두시즌동안 각각 21승과 22승에 2년 합쳐 541.2이닝에 '''33완투 9완봉'''이라는 무지막지한 이닝소화를 보여주면서 명문 양키스의 에이스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 하지만 81년 다시금 부상으로 20경기만 출전하게 되자 39세라는 나이에 부담을 느낀 양키스는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던 그를 82시즌 도중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 보내버렸다. 40살이던 1983년, 데뷔 첫 4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면서 세월앞에 장사없다는것을 보여주었지만 86년에 뉴욕 양키스로 컴백하여 짧은 기간이지만 여전한 피칭을 보여준다. 이후 44살인 1987년에도 두자릿수 승수를 기록하지만 2년 뒤 양키스에서 은퇴한다.
토미 존은 야구 역사상 유일하게 한번의 플레이에 에러 3개를 연속으로 저지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1988년 7월 27일 당시 아메리칸리그 소속이던 밀워키 브루어스전에서 4대 0으로 앞선 1사 1루 상황에서 3번 타자 제프리 레너드의 투수 앞 땅볼을 더듬어서 포구에러(1)->뒤늦게 악송구(2)->그것도 모자라 중계되어 들어오는 볼을 무심코 컷트해 홈으로 던졌는데 덕아웃으로 날아감(3)으로 타자까지 홈인에 성공해 2점을 헌납한다. 이 플레이 이후 존이 주심에게 한 말은 나름 명대사. '''이걸로 골드글러브 받기는 다 틀렸구나...'''[3]
통산기록이 288승 231패 3.34 162완투 46완봉 4710.1이닝 2245개의 탈삼진으로 꽤 훌륭하지만 명예의 전당급이냐고 하면 애매한 성적이다. 이닝 소화만큼은 발군으로, 통산 이닝 20위인데 토미 존보다 이닝 많이 먹고 명예의 전당 멤버가 아닌 사람은 투수 로테이션 같은 개념은 커녕 팀에 투수가 3, 4명이었던 시기인 19세기 선수 바비 매튜스와 원래대로라면 명예의 전당 100% 갔겠지만 영 좋지 않은 스캔들이 있는 로저 클레멘스 이렇게 2명뿐이다.[4] [5] 결국 15번의 기회를 모두 소진하고 말았다.
그러나 베테랑 위원회의 투표에서 꾸준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그의 선구자적인(?) 수술 및 재활 성공으로 '''역대 셀 수 없이 많은 메이저리거와 예비 HOFer가 새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언젠가 베테랑 위원회 추천으로 입성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많다. 실제로 매년 명예의 전당 투표만 다가오면 베테랑 위원회 투표의 뜨거운 감자가 되며, 팬들이나 선수들이나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6]
2. 토미 존 서저리 (팔꿈치 내측 인대 재건 수술)
검색 사이트에 '토미 존'을 검색하면 토미 존 야구 선수 본인보다 수술 얘기만 잔뜩 나올 것이다. 팔꿈치 인대 재건 수술을 일컫는 '''토미 존 서저리'''의 토미 존이 바로 앞서 기술한 이 선수로서 이젠 토미 존 본인보다 수술 이름이 더 유명해져버렸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1974시즌 도중 토미 존은 팔꿈치 부상으로 더이상 등판 할 수 없게 된다. 당시만 해도 팔꿈치 부상을 당한 투수는 그대로 은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LA 다저스의 주치의인 프랭크 조브 박사는 당시로서는 혁신적 발상인 손상되지 않은 인대, 예를 들어 반대쪽 팔의 손목이나 허벅지나 발바닥 등 투수가 별로 쓰지 않을 인대를 채취해서 손상된 인대를 대신해서 새로 만들어 주는 재건 방식을 제안했다. 토미 존이야 어차피 가만 있으나 수술 실패하나 은퇴할 입장이니 승낙했고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후 재활 기간을 거쳐 토미 존은 이전보다 더 좋은 구위를 보여주면서,[7]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이어나갔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대 3위인 26시즌을 빅리그에서 버티게 해준 원동력이 바로 이 팔꿈치 인대 재건 수술인 것이다.
참고로 이런 수술의 경우는 피술자보다는 시술자인 의사 이름이 붙는게 일반적이므로 프랭크 조브 서저리가 되어야 하는거 아닌가 싶지만, 토미 존 서저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프랭크 조브 박사 본인이었다고 한다. 수술 이후 끈질긴 재활을 거쳐서 선수가 복귀하고 좋은 성적을 거둬주지 않으면 수술이 대중화 되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2번째 피시술자는 샌디에고 파드레스의 투수 브렌트 스트롬이었고, 결국 재활에 성공하지 못해서 그대로 은퇴했다. 스트롬은 '자신이 처음이 아니라서 다행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만일 첫 피시술자가 스토롬이었다면 이 수술이 대중화되는데에는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8]
자세한 것은 토미 존 서저리 문서 참조.
3. 복귀 후 여담
- 돌아오자마자 관리고 뭐고 살벌하게 많은 이닝을 던졌다. 복귀한 1976년부터 5시즌을 연속으로 200이닝 돌파(...).
4. 기타
- 43세가 되던 1986년, 그가 환자로 치료 받았던 치과의사의 아들이 장성해 메이저 리그에 데뷔 하고 토미 존에게 멀티히트를 날린다. 그 청년의 이름이 마크 맥과이어.[9] 경기 후 "꼬맹이한테 맞기 시작하다니, 은퇴할 시기군요"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3년이나 더 선수생활을 했다. 맥과이어와의 통산전적은 20타수 6안타 (2홈런).
- 다저스와 양키스의 에이스라는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콩라인이기도 하다. 다저스 시절엔 1977년, 1978년 연속으로 양키스에게 우승을 헌납. 양키스로 소속을 바꾸니 1981년 월드 시리즈에서 양키스가 먼저 2승을 따낸 뒤[10] 폭풍 4연패로 준우승에 그치는 대참사를 직접 경험해야 됐다. 당시 월드시리즈에서 다저스의 양키스와의 시리즈 상대전적이 무려 5연패(!) 포함 10전 8패였으니, 정말 지독하게 불운한 위치선정이였던 것이다. 에인절스로 이적한 이듬해에는 ALCS에서도 에인절스가 2연승 뒤 3연패로 WS 진출에 실패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더 억울한 것은 자신이 못 던졌으면 그러려니 하는데, 존의 PS 통산 성적은 6승 3패, ERA 2.65로 매우 좋았으나, 동료들의 난조로 인해 콩라인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 최근 코로나 19 양성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현재 다리에 힘이 안들어가 거동이 매우 불편하다고 하며, 그의 자택이 있는 캘리포니아의 한 병원에서 치료 받고 있다.
[1] 통산 이닝 20위. 이것 하나만으로도 대투수라는건 알 수 있다.[2] 하지만 디콘 맥과이어의 경우는 부족한 선수 사정으로 인해 플레잉 코치로 활동하며 비상시에 선수로 투입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선수로 뛴 마지막 시즌의 경기는 타이 콥의 관중 폭행 사건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주전 선수를 전부 빼고 동네 주민들을 뽑아서 선수로 쓰는 바람에 48세의 나이로 게임에 나섰던 1경기가 전부이다. 물론 그 경기는 2:24로 참패.[3] "I told the umpire, Richie Garcia, that I think I lost a Gold Glove on that play." http://www.nytimes.com/1988/07/28/sports/john-messes-up-yanks-clean-up.html[4] 못 들어가던 버트 블라일레븐은 드디어 2011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세이버메트릭스의 대두 이후 블라일레븐은 굉장히 지지도가 오르는 추세였다는 점에서 그와 유사한 커리어를 지닌 짐 캇이나 토미 존은 굉장히 아쉬울 것이다. 그리고 토미 존 보다 이닝을 많이 소화한, 명전행이 확실시되었던 그렉 매덕스는 명전 입성 유예가 풀린 2014년이 되자마자 97%의 높은 지지율로 첫 턴에 입성했다.[5] 300승 투수들은 명예의 전당에 거의 다 입성했다.[6] 토미 존 서저리 관련해서 양키스타디움에 초대되기도 했다.[7] 다만 토미 존은 '''토미 존 서저리 최고의 성공사례'''이기도 하다. 현재 의사들은 토미 존 수술로 얻을 수 있는 최대치를 '운이 좋으면 기존 최고 구속과 동일한 구속'이라고 단언하는데, 토미 존은 수술후 수술 직전이 아닌, 인대가 멀쩡했을 때보다도 구위가 증가한 경우이기 때문. 수술후 토미 존의 구위가 증가한 부분에 대해서는 수술보다도 재활 당시 마이크 마셜과 함께 피칭 메카닉을 손본게 유효해서 그렇다고 한다.[8] 여담으로 3번째 피시술자는 당시 꼬꼬마 마이너리거였던 데이빗 웰스이다.[9] http://www.baseball-reference.com/play-index/batter_vs_pitcher.cgi?batter=mcgwima01&pitcher=johnto01 [10] 자신의 2차전 선발승을 포함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