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타 마나미
1. 개요
'''비상천녀(飛翔天女).'''
'''1990년대 일본 여성 프로레슬링을 대표하는 선수이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프로레슬러 중 한 명.'''
일본의 前 프로레슬러.
2. 데뷔
1971년 3월, 일본 혼슈 남서쪽 시마네현에서 출생한 토요타 마나미는 어릴적 체조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으나, 1986년 당시 일본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던 전일본 여자 프로레슬링에 투신하여, 프로레슬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최고의 여성 프로레슬러로 이름을 날렸던 재규어 요코타로부터 트레이닝을 받았으며, 훗날 수많은 명승부를 만들었던 야마다 도시요, 시모다 미마, 미타 에츠코[2] 와 함께 데뷔했다. 1987년 8월, 나카무라 사치코와의 싱글매치로 데뷔전을 가진 후, 유망주로 성장해가던 토요타 마나미는 1989년 5월, 요코하마아레나에서 개최된 레슬마린피아드에서 시모다 미마와 ‘도쿄스윗하트’라는 이름으로 태그팀을 이루어 동기생 야마다 도시요, 미타 에츠코 팀과의 명승부를 연출하며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10대 후반에 불과했던 4명의 여성 프로레슬러의 경기는 베테랑들 못지 않는 기술과 격렬함, 그리고 빼어난 경기 운영까지 보여주며 갈채를 받았다. 특히 토요타 마나미는 남다른 운동 능력과 함께 아름다운 브릿지와 저먼 슈플렉스를 선보이며 두각을 나타내었다.
토요타 마나미의 첫 타이틀은 1989년 11월, 다카하시 미카를 제압하고 획득한 전일본여자 싱글 챔피언[3] 으로 세 차례 타이틀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특히 프로 입단 동기생 야마다 도시요와 같은 해 12월 9일에 치룬 방어전은 30분 시간 초과 무승부로 끝났으나 협회로 부터 그 해 최고의 경기로 선정되었을 만큼 격렬했던 명승부였다.
1989년 12월, 야마다 도시요전. (전일본여자 싱글 타이틀전)
이어서 토요타 마나미는 1990년 6월 17일 저팬 그랑프리에 출전하여 2년 선배였던 호쿠토 아키라와 호타 유미코를 차례로 누르고 불과 만 19세에 우승하는 이변을 일으키며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다. 기세를 몰아 한달 뒤에는 WWWA 세계 챔피언이었던 불 나카노에게 도전했지만, 10분도 지나지 않아 패배하며, 아직은 미완의 대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말았다. 그러나 토요타 마나미는 1990년 10월 7일, 도쿄에서 바이슨 기무라[4] 를 제압하고 WWWA 올 퍼시픽 챔피언 타이틀[5] 를 획득했으며, 1991년 1월 11일 호쿠토 아키라의 도전을 받아, 호쿠토를 부상시키며 TKO로 방어에 성공했으나, 같은 해 3월, 호쿠토의 태그팀 파트너였던 미나미 스즈카[6] 에게 패퇴하며, 타이틀을 상실했다. 1991년 5월 26일에는 아쟈 콩과 싱글 매치에서 만났는데, 어느덧 메인 메인 이벤터 급으로 성장한 이후 처음 맞붙은 경기에서 당초 기골이 장대한 아쟈 콩이 유리하다고 전망되었으나 토요타 마나미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끝에 30분 시간 초과 무승부로 끝났다. 이 해 9월 7일에는 동기인 야마다 도시요와 다시 맞붙으나 이번에도 30분 시간 초과 무승부가 되었다.
3. 태그팀으로의 대성공
커리어 초창기, 시모다 미마와 팀을 이루었던 ‘도쿄 스윗하트’는 세간으로부터 제2의 뷰티페어, 또는 크래쉬걸스가 될 것이라 기대를 모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토요타 마나미와 시모다 미마는 서로의 호흡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팀을 해체하였다. 토요타 마나미는 당시 싱글매치에서 자주 대전하여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어 갔던 동기생인 야마다 도시요를 태그팀 파트너로 맞이하게 되는데, 이 새로운 태그팀은 곧바로 가시적인 효과를 얻게 된다. 토요타 마나미가 기계 체조 선수 출신으로 화려한 공중살법을 중심으로 한 테크니션이었다면, 야마다 토시요는 나가요 치구사를 롤모델로 하여 강력한 킥과 스피드있는 공격에 두각을 나타냈던 프로레슬러로 서로의 상반된 스타일은 서로를 보완해주기에 적합했다. 전성기로 다달아가던 두 젊은 여성 프로레슬러는 1992년 1월 19일 도쿄에서 카오루 마에다와 레이디 아파치팀을 꺾고 UWA 세계 여성 태그팀 챔피언 타이틀[7] 을 쟁취하며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1992년 3월에는 아쟈 콩, 바이슨 기무라가 팀을 이루었던 ‘정글 잭’을 누르고, 커리어 최초로 WWWA 세계 태그팀 챔피언 타이틀을 최초로 쟁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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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중에도 토요타 마나미는 싱글 매치 레슬러로 빼어난 활약을 이어가는데, 1992년 4월 25일, IWA 세계 여성 챔피언 타이틀[8] 을 획득하여, 총 8차 방어에 성공했다. 여덟 차례의 방어전 중 가장 유명한 경기는 역시 태그팀 파트너 야마다 도시요와의 경기였는데,[9] 1992년 8월 15일, 도쿄 고라쿠엔홀에서 야마다 도시요와 서로의 머리카락을 걸고 맞붙었던 IWA 세계 여성 챔피언 타이틀 매치는 프로레슬링 팬들에게 회자되는 토요타 마나미의 명승부로 기억되고 있다. 격렬한 혈투 끝에 피니쉬 무브인 저패니즈 오션 싸이클론 슈플렉스로 타이틀을 방어한 토요타 마나미가 경기 후, 울음을 터트리며, 자신의 머리를 일부 자르고, 야마다 토시요의 삭발을 막으려고 했지만, 야마다는 덤덤히 삭발을 받아들였다. 이 경기는 데이브 멜처가 5성 만점을 줬고,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1992년 올해의 경기 5위에 이름을 올린다. [10] 데이브 멜처는 토요타 마나미의 은퇴 직전에 그녀의 커리어를 돌아보는 칼럼에서 이 경기를 토요타 마나미 커리어 사상 최고의 경기라고 평가했다.
1992년 8월, 야마다 도시요전.
야마다 도시요가 다시 태그팀 파트너로 복귀한 뒤, 1992년 11월 26일, 전녀의 드림러쉬에서 JWP의 다이너마이트 간사이와 오자키 마유미를 상대로 또하나의 명승부를 일구어내며, WWWA 세계 여성 태그팀 타이틀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이 경기 역시 데이브 멜처로부터 5성 경기로 평가된 타이틀 매치로, 토요타 마나미의 물오른 경기력을 감상할 수 있는 명경기이다. 1993년 4월 2일, 단체대항전 드림슬램 I[11] 에서 FMW의 쿠도 메구미와 컴뱃 토요타를 상대로 승리했던 토요타 마나미-야마다 도시요 팀은 1993년 4월 11일 드림슬램 II에서 다이너마이트 간사이-오자키 마유미팀과의 리턴 매치에서 패배하며 WWWA 세계 여성 태그팀 타이틀을 상실[12] 하나, 이 경기 역시 1993년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올해의 경기로 선정된 역시 빼어난 경기였다.
1993년 12월, 다이너마이트 간사이 & 오자키 마유미전 (WWWA 세계 태그팀 타이틀전)
1993년 12월 6일, 재경기에서 토요타 마나미와 야마다 도시요가 복수에 성공하며, 타이틀을 재탈환하여 이 간사이-오자키와의 퓨드를 종결시켰다. 이 타이틀은 1994년 10월 9일, 이노우에 쿄코, 이노우에 타카코 팀에 패배하며 내주게 되었다. 이후 토요타 마나미는 싱글 매치에 더욱 집중하여 수많은 최고 수준의 경기를 남기며 당대 최고의 여성 프로레슬러로 커리어를 일구어 나간다.
4. WWWA 세계 챔피언
1994년 8월 24일, 이노우에 쿄코를 상대로 벌였던 WWWA 올 퍼시픽 챔피언 타이틀전에서 승리한 토요타 마나미는 기존에 보유했던 IWA 세계 여성 챔피언 타이틀과 함께 통합 챔피언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WWWA 올 퍼시픽 챔피언 타이틀은 토요타 마나미 본인에게는 통산 두 번째 획득인데,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이제 최고 권위의 타이틀인 WWWA 세계 타이틀로 향하고 있었다. 이윽코 1994년 11월 20일, 도쿄돔에서 WWWA 세계 챔피언 아쟈 콩과 격렬한 경기 끝에 패배[13] 하였으나, 이 경기 역시 데이브 멜처에 의해 5성 경기로 꼽히며, 토요타 마나미의 주요 명승부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14] .
세계 챔피언 타이틀 도전권을 드디어 획득한 토요타 마나미는 1995년 3월 26일, 전녀의 Queendom III 흥행에서 당시 2년 4개월간 장기 집권하던 아쟈 콩을 드디어 제압하며, 제39대 WWWA 세계 챔피언에 오르게 되었다. 역시 데이브 멜처에 의해 5성 경기로 평가되었던 완벽한 승부였다.
같은 해, 5월 7일 그녀는 이노우에 쿄코를 도전자로 맞아 벌였던 WWWA 세계 타이틀 방어전을 치루었다. 최전성기에 다다른 두 여성 프로레슬러는 수많은 피니쉬 무브를 작렬시키며 무려 1시간동안 경기를 이어갔으나, 무승부를 기록하게 되는데, 이 경기는 경기의 시간과 격렬함, 운영 능력에 있어 남성 프로레슬러의 경기를 능가하는 명승부로 1995년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올해의 경기로도 선정되었다. 특히 절정에 다다른 토요타 마나미의 운동 능력과 경기 운영 능력, 완벽에 가까운 테크닉, 믿을 수 없는 맵집과 스태미너, 그리고 소름돋을 정도의 정신력까지 감상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경기로 여성 프로레슬링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경기로 꼽히고 있다.
같은 해, 6월 27일, 라이벌이었던 아쟈 콩의 도전을 받아 세계 타이틀 방어전을 치뤘으나, 패배하며 챔피언 타이틀을 내주고 말았다. 당시 세계 최고의 두 여성 프로레슬러의 라이벌리가 초절정에 다달았던 순간인데, 두 여성 레슬러가 발산하는 엄청난 카리스마와 경기력으로 또 하나의 명승부로 역시 옵저버 뉴스레터를 통해 5성급 경기로 선정된 치열하고 살벌하기 까지 한 혈투였다.
세계 타이틀 상실 후, 과거 태그팀 파트너였던 시모다 미마를 상대로 재기전을 펼쳤는데, 이 역시 데이빗 멜처로부터 5성 경기로 선정될 정도로 세계 최고 수준의 프로레슬링을 선보였다. 그녀보다 체구가 큰 레슬러를 상대했던 이전 명승부들과 달리 그녀와 비슷한 테크니션인 시모다 미마를 상대로 여성 프로레슬링의 진수를 선보였는데, 운동 능력에서 최전성기를 달리던 그녀를 시모다 미마가 견녀대기는 역부족이었다.
1995년 9월, 저팬 그랑프리에 나선 토요타 마나미는 9월 2일, 도쿄 일본무도관에서 열린 4강전에서 2년 선배 호쿠토 아키라와 또하나의 기막힌 5성 경기를 선보이는데, 경기 초반부터 격렬한 공방을 주고받다가 테이블 범프도 몇차례 선보인 끝에 호쿠토 아키라[15] 가 개발한 기술인 노던 라이츠 밤을 2번이나 시전해 경기를 승리한 장면은 유명하다. 다음 날, 결승에서 호타 유미코를 제압한 그녀는 생애 두번째 저팬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하며 WWWA 세계 챔피언 타이틀에 넘버원 컨텐더로서의 권리를 갖게 되었다.
이윽코 토요타 마나미는 1995년 12월 4일, 아쟈 콩으로부터 챔피언을 뺏어온 다이너마이트 간사이에게 도전하여 승리를 거두며 생애 두번째 WWWA 세계 챔피언에 오르게 되었다. 같은 해, 12월 25일 도쿄 고라쿠엔 홀에서의 메인 이벤트로 토요타 마나미 퀸즈 로드 트라이얼 30이라는 이벤트가 열렸는데, 이는 선수 한 명당 1분의 경기 시간을 두고 총 30경기를 치르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벤트가 열렸다는 것은 토요타 마나미가 일본 여성 프로레슬링의 상징적인 존재로 우뚝섰다는 증거.
토요타 마나미는 1996년에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끌어 갔으며, 1월 22일 호타 유미코전, 3월 31일 이노우에 쿄코전을 포함하여 WWWA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방어하며 전성기를 이어갔다. 또한 6월 22일에는 레슬러 경력 초기의 태그팀 파트너였던 시모다 미마와 오래간만에 다시 태그팀을 결성하여 WWWA 세계 태그팀 챔피언 타이틀을 2년만에 탈환했으며, 1997년 1월까지 총 3차 방어를 달성했다. 다만 1996년 12월 7일에 토요타 마나미는 이노우에 쿄코에게 패하며 WWWA 세계 타이틀을 내주고 말았다.
이제 토요타 마나미의 인기는 최고조에 올라있었고, 연말에 미국과 일본의 많은 프로레슬링 상을 수상했고, 일본의 TV 쇼 프로그램에 다수 출연할 정도로 셀럽이 되어 있었다. 한 TV쇼에서는 남성 팬이 4,500달러를 내고 토요타 마나미와 5분간 진흙탕에서 레슬링을 벌이는 이벤트도 있었다고.
5. 전녀에서의 커리어 말년
1997년부터 전일본 여자 프로레슬링의 재정 상황이 나빠지며[16] , 토요타 마니미의 활동 범위도 조금씩 축소되게 되었다. 아쟈 콩과 이노우에 쿄코와 같이 토요타 마나미와 라이벌리를 형성했던 스타 레슬러 들을 비롯하여 총 14명의 레슬러가 이 해 전녀를 떠났으며, Arsion, NEO 등 신흥 단체로 레슬러들이 모이며 전녀의 위상은 흔들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전녀에 충성을 맹세하며 잔류했던 토요타 마나미는 여전한 활약을 보였으나, 타이틀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1998년에는 과거보다 부쩍 체중이 불어나고, 그동안 고수했던 검정색 레오타드를 기초한 링코스튬을 붉은 색으로 바꾸며 비쥬얼을 다르게 보여주기도 했다.
토요타 마나미의 통산 세번째 WWWA 세계 챔피언 타이틀은 2000년 1월 4일 찾아오게 되는데, 약 3년만에 탈환한 이 타이틀을 약 8개월간 방어에 성공했으나, 같은 해 9월 17일 이토 카오루에게 타이틀을 내주었다. 토요타 마나미의 네번째이자 마지막 WWWA 세계 챔피언 타이틀은 2002년 2월 24일 요코하마에서 이토 카오루에게 복수에 성공하며 찾아왔으나, 당시 전녀는 그 다음달인 3월 지상파 중계도 종료되는 등 더욱 막장화되었으며,그녀도 협회와 갈등을 겪었고, 같은 해 7월 6일 다시 만난 이토 카오루와의 타이틀전에서 패배한 뒤, 막장이 된 전녀의 상황을 참을 수 없었던 토요타 마나미는 16년간 정들었던 단체를 떠나게 되었다.
1997년 이후, 단체 내외의 상황때문에 토요타 마나미는 활동 폭이 줄어 들었고, 경기에 집중할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 또한 라이벌 선수들의 타 단체 이적으로 그녀와 더 이상 명승부를 만들어낼 선수들도 줄어들었던 상황. 마침 체중도 급격히 불어나며 그녀는 전성기에서 점점 내려오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6. 이후의 커리어
2002년 전녀에서 퇴단한 뒤, 토요타 마나미는 프리랜서로서 과거 멤버들과 함께 각종 행사에 참여하여 경기를 했는데, 2008년엔 우리나라에 방문해 MBC에서 방영한 NKPWA 세계 프로레슬링 챔피언 결정전에서 참가하여 태그 매치를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2010년 9월에는 미국 여성 프로레슬링 단체 Shimmer에 등장하여 뒤늦게 미국 지역 데뷔를 갖기도 했다. 이후 계속하여 커리어를 이어가던 그녀는 2017년 11월 3일, 요코하마에서 남녀 선수 가리지 않고 50명과 차례대로 한 명씩 1분 한판 승부로 붙는 투혼을 발휘한 것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7. 플레이 스타일과 영향
파워, 스피드, 기술, 체력, 경기 운영 능력을 모두 갖춘 프로레슬링의 먼치킨같은 존재였다.
파워하우스 계통으로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하거나 탁월한 킥력으로 상대방에 타격을 주는 스타일이라기 보다는 어릴 적 기계체조 선수로 활동했던 경험으로 다져진 유연한 신체와 운동 능력을 활용한 수플렉스, 공중살법[17] 등 다양한 기술로 상대방을 무너뜨리는 테크니션이었다. 특히 유연한 몸덕에 브릿지를 많이 쓰는 수플렉스 기술에 있어선 독보적이었으며, 어지간한 수플렉스에는 실수 없이 브릿지를 완벽하게 넣어주며 바로 핀으로 이어 버렸다. 또한 유연한 신체는 상대방이 서브미션을 걸어도 고통없이 방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높이와 스피드를 갖춘 공중살법도 유명했는데, 3단 로프에서 링 밖으로 몸을 날리는 미사일 드롭킥과 문설트도 그녀의 시그니처 무브. 그녀가 구사하는 기술의 난이도가 워낙 높아 다른 레슬러들이 카피하기 불가능했다. 또한 팬들을 몰입하게 하는 경기 운영 능력과 상대방의 기술을 매끄럽게 접수하는 능력도 탁월. 스태미너, 맵집, 정신력은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였다.
다만 한편으로는 철저한 연습보다는 타고난 재능에 의존하며 활동했기 때문에 은퇴를 앞둔 시점에선 몸이 매우 망가져 있었다고 한다. 현역 시절 내내 큰 부상은 없었지만 그 대신 작은 위험요소들이 오랜 세월 누적된 듯. 2017년 인터뷰에선 "역시 노력하던 사람이 끝까지 남는 것 같다. 나도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노력하고 싶다."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건강에 무리없이 활동하는 동기 시모다 미마를 부러워하며 연습 부족에 대해 후회했다고 한다.
토요타 마나미는 이러한 완벽한 테크닉과 신체 능력, 정신력으로 여성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명경기들을 만들어냈으며,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가 선정했던 올해의 경기에 선정된 경기 중 여성 프로레슬링 경기는 대부분 그녀의 매치라고 간주해도 될 정도.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에서는 1995년 남녀 프로레슬러를 통틀어 그 해 최고의 프로레슬러로 토요타 마나미를 선정했고, 2009년에는 팬들의 투표로 역대 최고의 여성 프로레슬러로 선정된 바 있다. WWE 여성 프로레슬러인 리타, 나탈리아 등이 그녀에 대해 존경을 표했다.
8. 주요 경력
전일본 여자 프로레슬링
- WWWA 세계 싱글 챔피언십 (통산 4회)
- WWWA 세계 태그 챔피언십 (통산 3회)
- IWA 세계 여자 챔피언십 (통산 1회)
- UWA 세계 여자 태그 챔피언십 (통산 1회, 초대 챔피언)
- 올 퍼시픽 챔피언십 (통산 2회)
- 전일본 싱글 챔피언십 (통산 1회)
- 재팬 그랑프리 우승 (1990, 1995, 1998, 1999년. 최다 우승 기록)
- 태그 리그 더 베스트 우승 (1993, 1994, 1996, 1999, 2001년. 개인 최다 우승 기록)
GAEA JAPAN- WWWA 세계 태그 챔피언십 (통산 3회)
- IWA 세계 여자 챔피언십 (통산 1회)
- UWA 세계 여자 태그 챔피언십 (통산 1회, 초대 챔피언)
- 올 퍼시픽 챔피언십 (통산 2회)
- 전일본 싱글 챔피언십 (통산 1회)
- 재팬 그랑프리 우승 (1990, 1995, 1998, 1999년. 최다 우승 기록)
- 태그 리그 더 베스트 우승 (1993, 1994, 1996, 1999, 2001년. 개인 최다 우승 기록)
- AAAW 싱글 챔피언십 (통산 1회)
- AAAW 태그 챔피언십 (통산 1회)
JWP 여자 프로레슬링- AAAW 태그 챔피언십 (통산 1회)
- JWP 인정 무차별급 챔피언십 (통산 1회)
- JWP 태그 챔피언십 (통산 1회)
OZ 아카데미- JWP 태그 챔피언십 (통산 1회)
- OZ 아카데미 인정 무차별급 챔피언십 (통산 1회)
- OZ 아카데미 인정 태그 챔피언십 (통산 2회)
WWWD- OZ 아카데미 인정 태그 챔피언십 (통산 2회)
- WWWD 세계 싱글 챔피언십 (통산 1회)
9. 둘러보기
[1] 위키피디아에 등재된 공식 체중 기준. 사실 나이에 따라 몸무게가 급격히 변했는데, 데뷔 시절에는 63kg, 최전성기였던 20대 중반에는 65kg, 여전히 전성기를 이어갔던 20대 후반에는 68kg, 전녀에서의 말년이었던 30대 초반에는 72kg까지 체중이 불어난다. 말년인 40대에는 78kg까지 육박한다.[2] 174cm라는 우월한 피지컬을 가졌으나, 싱글 매치 레슬러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대신 시모다 미마와 함께 Las Cachorras Orientales라는 태그 팀으로 유명했다. 데스 밸리 드라이버의 창시자로 유명.[3] WWWA 세계 챔피언(일명 레드벨트), WWWA 올 퍼시픽 챔피언(일명 화이트벨트)에 이어 서열 3위에 해당하는 타이틀로 신인들이 정상에 오르기 위해 거쳐가는 타이틀로 여겨졌다.[4] 170cm의 신장에 75kg의 체중의 탄탄한 하드웨어를 보유했던 여성 프로레슬러로 불 나카노의 옥문당 초기 멤버이자 아쟈 콩의 정글 잭 파트너였다. 손날을 이용한 케사기리 챱이 특기였다. 전녀의 기획홍보부장 로시 오가와는 그녀에 대해 “링 위에서의 기무라는 결코 계산적인 타입이 아니었고, 경기 도중에 텐션이 올라가면 룰을 무시하고 날뛰는 스타일이었다”라고 설명했다.[5] 전일본 여자 프로레슬링에서 WWWA 세계 챔피언에 이어 서열 2위의 타이틀이었다.[6] 호쿠토 아키라와 마린 울브스라는 태그팀으로 활약했으며, 173cm의 우월한 피지컬을 보유했던 여성 프로레슬러이나, 메인 이벤터보다는 조연의 느낌이 강했던 선수였다. 다만 기본기가 탄탄하고, 기술의 정확도가 높아 ‘프로레슬링 선생님’으로 불렸다.[7] 멕시코의 UWA(Universal Wrestling Association)가 인증하는 챔피언쉽. UWA에 여자 선수가 부족했던 관계로 챔피언쉽은 주로 전녀에서 열렸다.[8] 원래는 캐나다에 있는 단체의 타이틀이지만, 나가요 치구사가 해외 원정에 갔을 때 획득하여 일본으로 가지고 왔다. 해당 단체는 소멸했지만 이 타이틀은 살아남아 일본에 정착했다.[9] 1995년 9월, 9차 방어전에서 레지 베넷에게 패하며 타이틀을 상실했다[10] 이는 프로레슬링에 대한 서구권과 동양권의 문화 차이에서 기반하는 반응이기도 하다. 동양권(주로 일본 프로레스)에서는 프로레슬링 전반에 일본 특유의 명예와 무사 정신이 가미되어 있어서, 지고 나서 머리를 깎는다는 것이 마치 루차 리브레에서 지고 나서 마스크를 벗는 것만큼이나 중대하고 선수 커리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은 문화가 있다. 멜처가 보기에는 자신이 북아메리카 사람인 걸 감안하더라도 '왜 이겼는데 자기가 머리를 깎나?'라고 느껴졌을 수도 있다.[11]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전녀, JWP, FMW, LLPW선수들이 출전한 전일본 여자 프로레슬링 창립 25주년 기념한 올스타전으로 결과는 대성공. 경기들이 길어지는 바람에 메인 이벤트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시간이 자정을 넘어 막차가 끊기는 사태가 발생했다. 허나 경기에 빠진 관중들이 흥행을 끝까지 관람한 뒤 경기장 근처 전철역에서 첫 차를 기다리며 밤을 새기도 하는 등 전설적인 흥행 기록을 남겼다.[12] 이는 전녀의 타이틀이 최초로 다른 단체에 유출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13] 엄밀히 말하면 이 경기는 타이틀전이기보단 빅에그 레슬링 유니버스 토너먼트 경기였다.[14] 케니 오메가 또한 이 경기를 자신에게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 경기라고 얘기했다[15] 토요타 마나미는 2년 선배인 호쿠토 아키라에게 "호쿠토 너는 한 번도 날 이긴 적이 없구나"라는 말로 도발했고, 이에 분노한 호쿠토 아키라와 수년째 항쟁을 벌였다.[16] 1997년 10월. 어음 부도에 의한 은행거래 정지 처분을 받는다. 동시에 사옥 건물의 소유권은 채권자에게로 이동했지만 차용하고 계속 사용했으며, 후지 TV의 ‘전일본 여자 프로레슬링’ 중계가 종영되고 후지 TV에서의 중계권도 일시 소멸되었다.[17] 평소 연습이나 스파링에서는 무서워서 잘 하지 못했으나, 경기 중에는 분위기에 도취되어 구사했다고.[18] 현재까지 유일한 여성 수상자[★] 밑줄이 승리자. 다자간 매치의 경우 이름 옆 (O)가 핀폴자, (X)가 피핀폴자.[19] 현재까지 여성 선수로는 최다 선정[20] 제 1전 12초 만에 다이너마이트 칸사이가 스플래시 마운틴 파워밤으로 야마다에게 승리, 제 2전 15분 7초 만에 토요타가 다이너마이트 칸사이에게 저패니즈 오션 사이클론 수플렉스로 승리, 제 3전 31분 11초 만에 오자키가 토요타에게 둠스데이 레이저즈 에지로 승리.[21] 시간제한 무승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