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니 게임
1. 1997년작 오스트리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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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 1995년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미카엘 하네케는 이후 2009년, 2012년 칸 영화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2번이나 받았고 칸 영화제 감독상 및 그랑프리도 받은 바 있는 거장이다. 다만 이 영화 이전엔 비평가들에게만 인지도가 있는 감독이었지만, 이 영화로 대중적/비평적 인지도를 얻게 된다. 심지어 프랑스쪽 러브콜을 받는데 성공해 이후엔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다.[1]
전반에는 일반적인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와 비슷한 스타일로 진행된다. 먼저 부부와 남자아이로 구성된 한 부유한 가족이 차를 타고 별장에 휴가를 오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된다.[2] 이 가족의 평화로운 휴가는 이웃집에서 온 한 낯선 청년이 등장하면서 점차 위태해진다. 처음엔 계란을 빌리러 온건가 싶더니, 실수인지 고의인지 계란을 깨뜨리면서 점점 억압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 전반만 보면 괜찮은 공포/스릴러 영화이다. 멀쩡하게 생긴 이웃 청년이 자기 집으로 침범해 온 뒤 서서히 정신이상적인 행동을 보이며 평화를 위협하고 공포로 몰아가는 과정을 그리는데, 담담한 어조로 차분하게 그려내면서 완급조절도 좋다.[3]
영화는 공포스러움 넘어 폭력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은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 별 이유도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들이라는 것. 일반적인 할리우드 영화라면 여주인공이 어떻게든 반격해서 아들을 구한 뒤, 둘이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해피 엔딩을 맞이하겠지만...
'''이건 그런 영화가 아니었다.'''
여주인공[4] 의 어린 아들이 옆집으로 도망쳤다가 끌려온 뒤 게임을 속행하려 숫자를 세다가 아들이 도망치려 하자 총으로 쏴버린다. 눈 앞에서 산탄총에 맞아서 살해당한다.[5][6] 어린애라고 봐주고 살려두는 거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옆집에서 장총을 하나 가져오게 되는데... 이게 문제적 장면의 시작이다. 아들이 사망하자 부부는 당연히 괴로워하고 오열한다. 남은 주인공 부부마저 다 살해당하고 끝나는가 싶었는데, 이렇게 되면 게임 시작도 못하겠다며 갑자기 청년들이 사라진다.[7] 기회는 이때다 싶어, 골프채에 맞아 다리를 못 쓰는 남편은 일단 집에 두고 여주인공이 도움을 청하러 도망치게 된다. 길가 풀 숲에 숨었다가 차가 오는 것을 보고 뛰어나와 손을 흔드는데, 차에는 역시나 그들이 타고 있다.[8]
모두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다시 게임이 시작되는데, 여주인공이 틈을 노려 총을 집어들어 두 청년 중 하나를 호쾌하게 사살한다. 이때 웬일로 감독이 친절하게 살인마의 몸이 총에 맞아 터져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9] , 관객들이 이제 좀 영화가 볼만하구나 느끼는 순간, '''다른 청년이 급하게 리모콘을 찾아 들더니 리와인드 버튼을 눌러 화면을 거꾸로 돌려버린다'''... 영화 클릭 마냥 무슨 초능력으로 그러는 게 아니고, 보면 알겠지만 작중의 내러티브를 아예 파괴하는 장치로 작가의 직접 개입 같은 것이다.[10][11]
결국 친구도 다시 살려 놓고, 여주인공은 다시 끌려가고 가족 모두가 몰살당한다. 사실 이 시점에서는 관객에게도 희망적인 생각은 별로 남아있지 않아서 그냥 그려려니 하게 된다. 다음날 아침, 입에 테이프가 여러 겹으로 붙여진 채 손이 앞으로 묶인 여주인공이 보트에 태워진 채로 두발을 묶인 뒤 호수로 끌려간다. 여주인공은 그곳에서 남편이 보트에 놓고 온 칼로 탈출을 시도해보지만 이미 청년들은 알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마지막으로 호수에 여주인공을 밀어넣으면서 일을 끝마친 사이코패스 청년이 보트를 타고 '''초반에 잠깐 나왔던 이웃의 집에 가서 계란을 빌리며''' 영화는 끝이 난다.
미디어속 폭력에 무감각해져가는 현대의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는 영화로,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대체로 굉장히 기분나빠했다... IMDB 트리비아에도 97년 칸 영화제 상영도중 충격을 받은 관객 및 평론가 일부가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는 얘기가 있다. 실제로 하네케의 다른 영화들은 좋아하면서도 이 영화만 극렬하게 까는 평론가들과 감독도 있었을 정도다. 특히 자크 리베트가 이 영화를 극혐하고 까댔던 걸로 유명하다.
한 영화잡지에서 소개한 "악인이 승리한 영화" 세 편중 하나. 다른 하나는 주유소 습격사건[12] 이고 나머지 하나는 브래드 피트 주연의 파이트 클럽.[13]
결론으로 말하면 관람객과 시청자들에게 '''의도적으로 불쾌감을 주려는 작품'''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며, 만약 이것을 보고 불쾌해하거나 마음이 답답해지면 감독의 의도는 성공한 것이다.
부부 역을 맡은 주자네 로타어와 울리히 뮈에는 실제로 부부 사이며 이 영화의 성공으로 국제 무대에 알려지게 되었다. 울리에 뮈히는 이후 타인의 삶으로 한국 관객들에게 다시 알려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둘 다 타계한 상태이다. 참고로 피터를 연기한 프랑크 기링도 2010년 담낭염으로 사망해 고인이다.
델리스파이스의 노래 '고양이와 새에 관한 진실 (Or 허구)'의 후반부에 나오는 소리는 이 영화와 <끌로드 부인>에서 나온 소리라고 한다.
2. 1의 리메이크작인 2007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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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하네케 감독 본인이 직접 리메이크 하였다. 나오미 왓츠 및 팀 로스 등 유명한 배우가 나온다. 그래도 피해자 가족들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없다... 그리고 그 악명 높은 리모콘도 또 나온다...
평은 미묘. 컷 하나하나를 그대로 복사했다고 밝힐 정도로 원본에 충실하지만 배경의 이질감이 줄어버려서 별로라는 평도 있다. 원작을 본 사람이라면 굳이 볼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원작과의 분위기는 약간 다른데, 원작은 화면이 따뜻한 색감에 집안 가구들도 색채가 노란색이라서 "평화로운 별장에 폭력이 들이닥치는 아이러니"를 강조하는 느낌인데 반해 리메이크는 차가운 색감의 화면에 가구들도 죄다 하얀색 투성이라 애초부터 "불길한 일이 터질거 같은 분위기"를 암시하는 느낌이다. 악역들도 원작의 청년들은 복장이 좀 기이해서 그렇지 외모는 멀쩡한데 리메이크는 둘다 음침한 금발벽안이라 누가 봐도 싸이코 2인조(...). 전체적으로 원작보다 더 "전형적인 미국식 스릴러 분위기"를 강조한 듯.
애당초 하네케 감독은 이걸 리메이크한 이유에 대해 '''자막 읽기 싫어하는 미국인들을 위한 안내서'''라고 설명했으니...
로저 에버트 공식 사이트의 짐 에머슨이 리뷰에서 영화에 별점 반개를 주며 이게 무슨 영화냐고 대차게 깠다.# 대략 요약하면, 너님이 심리학 전공이고 무슨 얘기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는데, 우리가 영화관에서 보고 싶은 건 영화지 심리학 학위논문을 영상물로 꾸민 게 아니라는 게 그 리뷰의 대략적인 요지였다.
다만 세월이 지나고 나서는 똥까지 예술이랍시고 내놓는 마당에 심리학 논문 정도는 감지덕지라는 평. 리메이크 이유인 '미국인들을 위한 안내서' 역할에도 충실했으니, 이후로는 감독이 원했던 그 반응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좋은 영화란 소린 결코 아니다.
[1] 하얀 리본은 제외.[2] 이때 부부가 클래식 음악을 틀며 곡을 맞추는 놀이를 하기 때문에 배경으로 클래식 음악이 나오다, 갑자기 타이틀 로고와 함께 아방가르드 뮤지션 John Zorn의 무지막지하게 하드하고 불안한 느낌을 주는 음악이 연주되는데 이때부터 뭔가 괴이한 포스를 뿜기 시작한다. 2007년판 오프닝 참고.#[3] 그러나 문제는 감독의 목적이 그게 아니었다는데 있다... "애초에 공포 영화를 의도하지도 않았고, 미디어 속 폭력에 대한 메세지를 주기 위해 굉장히 폭력적이되, 아무 의미없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영문 위키백과 퍼니 게임 문서 인용.)[4] 사실 여러모로 살인마 청년들이 더 주인공에 가깝긴 하다.[5] 청년들이 왔다던 옆집으로 도망치는데, 가보니 청년들이 그 집의 주인이나 가족이 아니었고, 원래 주인 가족은 청년들에게 살해당한 상태였다.[6] 극초반부에서 청년들이 이 집의 가족들과 골프 연습을 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아마 주인공 가족과 비슷하게 이 때는 이웃집 가족들로 살인 게임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청년들이 주인공네 집에 계란을 빌리러 온 시점에선 이웃집 가족들은 이미 살해당한 후였을 듯. 골프 장면에선 청년들만 대사를 하지 주인부부는 뒤에 멀뚱멀뚱 서 있고, 이웃집 주인과 청년이 집에 찾아왔을 때도 집주인 쪽은 묘하게 쩔쩔매는게 그 암시.[7] 하지만 알고보니 자신들의 게임에 리스크를 넣기 위해 일부러 도망친 척 한 것이었다[8] 아내가 밖에 나가서 히치하이킹을 히는 동안 남편은 고장난 전화기를 고쳐서라도 구조 요청을 하거나 아들 시체에 옷을 덮어주거나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집에 들어오자 아내인 줄 알고 불렀더니 '''문 밖에서 골프공이 굴러온다.''' 절망감이 극대화되는 묘사.[9] 사실 의도된 것으로, 영화에서 주인공 가족에게 가해지는 폭력들은 가능한 드러나지 않게 감추고, 살인마 청년에 대한 폭력은 과장되게 드러내서 대비한 것이다. 후술되는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청년의 죽음으로 관객이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망가뜨리기 위해 일부러 던져주는 복선 같은 것이다. 즉, 정의의 이름으로 영화에서 행해지는 살인과 그 살인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관객에 대한 조롱이다. 본격 관객 가지고 노는 영화.[10] 만화로 비슷한 예를 들면, 파레포리의 한 장면처럼 작가의 손이 지면 위에 개입해 내용이 다시 그리는 걸 생각하면 된다. 지면 위의 컷을 가로지르는 손이 그려지고 손에 쥐어진 펜이 컷 안의 내용을 바꾸는 식으로 말이다.[11] 영화에서 계속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미디어 속 폭력에 대한 반감의 시선이다 보니, 감독이 이런 식으로 개입해서 영화 자체의 폭력과 스릴러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들을 사용한다. 리모콘 장면 전에도 청년이 갑자기 카메라를 마주보며 관객에게 말을 거는 장면들이 있다. 사실 관객에게 말 거는 장면만 해도 네러티브가 흐트러지는 와중에 감독의 냉소적인 훈계가 느껴지는데, 리모콘을 쓰는 장면에 이르면 거의 관객에 대한 조롱 수준이 된다. 끔찍한 악당이 강력한 폭력으로 제거될 때 관객이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의도적으로 뭉개버리면서 당황스런 감정을 유발한 뒤, 관객 자신에게 질문하게끔 유도하는 것인데, 솔직히 관객의 일차적인 반응은 황당이나 짜증일 수밖에 없다. 감독이 무례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12] 그나마 이건 주인공 4인방도 알고 보면 불행한 과거가 있는 인물들이고 한 번씩은 인정을 보여줄 때도 있다. 주유소 사장을 비롯한 상대역들도 피해자라고 하기엔 패악질이 만만치 않았고.[13] 근데 이쪽의 악역(?)인 타일러 더든도 하는 행동이 다른 할리우드 영화에나 나올 악당 같아서 그러지만 악인이라 부르기는 힘들다. 오히려 주인공에 가까운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