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트 포르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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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dinand Porsche
1875년 10월 3일 ~ 1951년 1월 30일
1. 소개
2. 생애
2.1. 젊은 시절
2.2. 포르쉐의 창업
3. 나치 독일 협조
3.1. 히틀러와의 친목
3.2. 전차 개발
4. 말로
5. 가족관계


1. 소개


공학 박사이자 '''폭스바겐포르쉐의 창업자.''' 메르세데스-벤츠에도 일부분 관여했으며, 하이브리드 자동차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현대의 자동차 기술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여, 1999년에는 "세기의 자동차 전문가"로 인정되어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치에 적극 협조, 전차 제조나 V-1의 개발을 해서 2차대전이 끝난 후 말년에는 옥살이를 했던 흑역사가 있다.

2. 생애



2.1. 젊은 시절


아주 어렸을 시절에도 기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낮에는 아버지의 기계점에서 일을 도우며, 야간에는 현재 체코에 위치한 리베레츠에 있는 황국기계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주경야독식 생활을 이어 나가다가 Béla Egger라는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 후에는 지역 대학교에서 기계에 관련된 수업을 들은 것이 그가 배운 기계학의 전부였다고 한다.

2.2. 포르쉐의 창업


1931년까지 그는 벤츠 등에서 일하다가, 슈투트가르트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자동차 회사인 포르쉐를 창업하기에 이른다. 회사는 꽤 잘 나갔고, 1934년 그는 아돌프 히틀러 총통이 의뢰한 "대중(Volks)을 위한 자동차(Wagen)를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받아들여 폭스바겐(Volkswagen) 비틀을 설계하게 된다. 포르셰 박사는 곧 히총통에게 "위대한 독일 공업자" 라는 명칭까지 받았으며, 그해에 독일 시민권[1] 또한 받는다. 그에 감명받았는지, 그냥 사업상 필요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2] 1937년에 그는 나치당에 가입하게 된다.

3. 나치 독일 협조



3.1. 히틀러와의 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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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보듯이 1930년대부터 그들의 만남은 시작되었는데. 놀랍게도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히틀러와 죽이 잘 맞았는지 그와 굉장히 친하게 지낸 듯하다. 그와 신나게 대화를 나누는 사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아마도 특출난 기술을 통해 독일 민족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싶었던 히틀러와, 독창적인 시도를 즐겨하던 포르셰의 스타일이 잘 맞았던 것 같다. 심지어 히틀러는 체코의 자동차 제조사인 타트라의 차량들을 매우 좋게 보고 포르쉐에게 국민차 개발목표를 제시했는데 포르쉐가 타트라의 T97을 그대로 베껴[4] 폭스바겐 비틀을 만들게 되었을 정도였다.

3.2. 전차 개발


그가 개발한 전차 중 대표적인 것은 6호 전차 티거프로토타입 차체나 그 차체로 만든 구축전차 페르디난트/엘레판트, 초중전차 마우스 전차 등이다. 이중 엘레판트는 대체적으로 활약상과 카탈로그 스펙 자체는 굉장히 훌륭한 전차라고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전차 덕후들은 그의 업적을 딱히 높이 치지 않는다. 주로 그 빌어먹을 하이브리드에 대한 집착을 자동차뿐만 아니라 전차에까지 접목하려 했다는 것이 그의 폐단이었으며[5] 그가 만든 전차들은 기동성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다.[6] 히틀러와의 친분이 있었음에도 6호 전차 티거의 차체 결정 경합에서 그가 만든 버전이 떨어졌다는 것을 보면 얼마나 심각할지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VK 45.01(P) 항목에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타사 차량의 부품 문제를 해결하는 데 조언을 하기도 하는 등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4. 말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그는 프랑스에서 폭스바겐의 제조를 계속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러나 동년 12월에 포르셰는 전범으로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고, 1949년에 보석금을 내고 출소했다. 체포 후 그에게 은행은 돈을 빌려 주지 않았고, 회사 또한 미국의 엠바고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 그나마 아들인 페리 포르셰가 335의 생산라인 중 하나를 받아내고 비틀의 엄청난 로열티를 받아 가며 삶을 이어 갈 수 있었으며, 페리가 그렇게 모은 돈으로 보석금을 지급하여 페르디난트가 출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50년에 발작이 일어나 쓰러진 그는 회복하지 못하고 1951년 1월 30일에 사망한다.

5. 가족관계


페르디난트 포르셰는 슬하에 1남 1녀를 뒀다. 딸인 루이제는 폭스바겐 공장을 운영하던 안톤 피에히와 결혼했다. 루이제는 자기 아버지 이름인 페르디난트를 아들에게 붙여줬다.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포르쉐, 아우디 엔지니어를 거쳐 훗날 폭스바겐 그룹 회장을 역임했다.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2019년 8월 26일에 사망했다. 아들 페리는 아버지처럼 회사를 경영했다. 페리의 장남인 부치(풀 네임은 페르디난트 알렉산더 포르셰)도 포르쉐에서 일하다가 "포르쉐 디자인"이라는 명품 브랜드 회사를 설립하여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페리의 막내아들인 볼프강 포르셰는 현재 포르쉐 AG의 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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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전까지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 지역) 국적이었다.[2] 비슷한 경우로는 욘 라베, 오스카 쉰들러 등이 있다.[3] 이 사진은 1939년 4월 20일 히틀러의 50번째 생일에 찍은 사진이고.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히틀러에게 차를 선물했다.[4] 당연히 타트라가 폭스바겐에 소송을 걸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이 체코를 침공하면서 그대로 씹히고 말았다[5] 유도전동기가 아니라 직류모터라 그런 걸거다... 과거엔 반도체 소자가 발달하지 않아 인버터를 활용한 교류모터 제어 따윈 없었다.= 즉,직류모터라는건데 직류모터는 브러쉬를 자주 교체했어야했다. 그러므로 신뢰도가 바닥으로 떨어진, 전차병 모두가 감탄할 정도의 물건이 나왔을 것이다.[6] 초창기 티거 프로토타입을 만들던 당시 최고속도에서는 헨쉘 사의 시안보다 우수했으나 무게중심 문제와 여타 문제로 인한 '''기동중 문제가 발생하면서''' 탈락해버렸고, 그런 차대에다가 무게중심을 더욱 망가트리는 떡장갑과 묵직하고 큼직한 고정전투실을 얹어 만든 페르디난트는 말할 것도 없이 끔찍한 기동성과 엔진 내구성을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