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편추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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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절차
3. 주요 추방자
4. 폐지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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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민주정을 유지하기 위해 실시한 정치 제도의 일환으로,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 이후 집권한 클레이스테네스가 또 다른 참주정의 등장을 막기 위해 고안한 제도라고 알려져 있다. 독재자가 될 위험성이 있는 인물의 이름을 도자기 파편 조각에 적게 하는 방식이었기에 도편 추방제라는 이름이 붙었다. 여기서 뽑힌 인물은 아테네 국외로 10년간 추방되어야 했으며, 변론 혹은 항소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테네 시민권이 박탈된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아테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10년간 금지됐을 뿐이며, 10년이 지난 뒤에는 공직에 복귀하는 것도 허용됐고 페르시아 전쟁의 경우와 같이 국가의 존망이 걸려있는 경우에는 기한조차 단축됐기 때문에, 고대라는 시대를 감안하면 굉장히 온건한 정적 배제수단이었다고 평가받는다. 훨씬 후대 중세의 동로마 제국에서는 그저 죽이는 것보다는 인도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적의 코를 잘라버리기까지 했음을 생각해보자.[2]

2. 절차


자세한 절차를 모른다면 그냥 막무가내식으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적어 추방시키는 심각한 제도처럼 보일 수 있다. 나름대로 역인기투표가 되지 않도록 제도적 절차가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매년 1월에서 2월 사이에 정기적으로 열리던 민회에서 아테네의 시민들은 당년의 도편추방 투표를 실시할 지 여부를 결정했으며, 만약 결론이 실시로 내려진다면 투표는 2달안에 실행되어야 했다. 실시 여부의 결정과 투표일이 2달이나 차이가 나는 이유는 '냄비근성 방지 + 각종 토론/변론을 통하여 시민들에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3] 2500년도 더 전에 실시된 투표였음을 생각하면 상당히 선진화된 절차.
투표는 아고라에서 동시에 실시됐으며 시민들은 자신들의 견해에 따라 독재자로 발전할 위험이 있는 자들의 이름을 도편에 적어냈으며 개표는 투표 종료와 동시에 진행됐다. 투표 결과가 어떻게 도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고대 그리스의 사료들'''조차 의견이 엇갈리는데(...) 일단 학계에서는 당시 아테네 시민권 보유자의 수를 감안해서 ''''총 투표 가운데 6000표 이상을 득표한 자가 추방당한다.''''는 주장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4][5] 그리스에서 추방되는 것으로 결정된 자는 투표로부터 10일 이내에 아테네를 떠나야 했으며, 정당한 이유 없이 추방을 거부하거나 혹은 10년간의 추방기간 중 정당한 절차 및 사유 없이 아테네로 몰래 돌아왔다가 발각되면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3. 주요 추방자


  • 기원전 487년 : 히파르코스
  • 기원전 486년 : 메가클레스[6]
  • 기원전 485년 : 칼리크세노스
  • 기원전 484년 : 크산티포스[7]
  • 기원전 482년 : 아리스티데스[8][9]
  • 기원전 471년 : 테미스토클레스
  • 기원전 461년 : 키몬[10]
  • 기원전 460년 : 알키비아데스
  • 기원전 457년 : 메논
  • 기원전 442년 : 투키디데스
  • 기원전 416년(?)[11] : 히페르볼루스

4. 폐지


처음에는 본래의 목적 그대로 독재자의 등장을 막기 위해서 도편추방제가 실시되었지만 페르시아 전쟁 무렵부터 도편추방제는 북한마냥 정적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된다. 대표적인 경우로는 스파르타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장하다가 반대파에게 추방당한 테미스토클레스페리클레스가 주도하는 아테네 제국 정책을 반대하다가 추방당한 투키디데스. 결국 페리클레스 사후에 중우정치 시기가 되면서 말 그대로 개판이 되고 만다. 기원전 416년 혹은 417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와중에 히페르볼루스가 추방된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도편추방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도편추방제는 이 때를 전후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히페르볼루스를 추방시켰을 때의 상황은 도편추방제의 맹점을 그대로 드러냈다. 당시의 아테네 정계는 전쟁 방향을 놓고 니키아스의 신중파와 알키비아데스의 강경파가 대립하고 있던 상황. 두 세력의 크기가 비슷비슷했기 때문에 일관성 있는 정책의 실현이 불가능했고, 히페르볼루스는 이런 상황에 불만을 품고 둘 중에 하나라도 쫓아내려고 도편추방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가 연합(…)해서 역으로 히페르볼루스를 내쫓은 것이 사건의 전말. 확고한 적이 있을 때는 도편추방제가 효과만점이었지만, 내쫓아야 할 대상이 명확하지 않을 때는 협상으로 이런 식의 짓이 얼마던지 가능했던 것이다.
기원후 1세기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페리클레스의 사후 아테네의 중우정치에 질린 아테네인들이 자발적으로 도편추방제를 없앤 것으로 표현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패배한 이후,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강요에 의하여 과두정을 정치체제로 채택했고 과두정의 특성상 개인 독재자가 등장하기는 힘들었다는 점도 도편추방제가 사라지는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여겨진다.[12]

5. 여담


  • 페리클레스는 도편추방제를 가장 잘 활용한 정치가로 평가받는다. 30년 가까운 집권시기 동안 자신의 정적은 싸그리 도편추방으로 배제시켜 버리면서도 정작 본인은 한번도 도편추방제에 발목을 잡힌 적이 없다.
  • 현대 영어에서 Ostracism은 도편추방이라는 본래의 의미뿐만 아니라 왕따, 소외 등을 표현하기도 한다.
  • 오늘날 발굴된 그 당시 도편을 보면 실명 옆에 각종 조롱과 별명들도 적혀있다. 가령 '아리스티데스 멍청이' 이런 식으로(...) 물론 이런 조롱과 별명들의 유무에 상관없이 실명만 명확히 적여있으면 유효한 표로 인정됐다.
  • 최근 사회학에선 인터넷의 발달과 더불어 사이버 도편추방(Cyberostracism)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대표적인 사이버 도편추방의 사례는 바로 읽씹이라고(...)
  • 파이널 판타지 11 작중 등장 대통령 중 한명인 프리엔이 '철편추방'으로 대통령직에서 실각하였다는 공식설정이 있는데, 도편추방제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1] 위의 사진 속에 쓰여진 이름들은 굉장히 유명한 인물들이고, 맨 위의 페리클레스를 제외하면 실제로 도편추방을 당했던 인물들이다. 윗쪽부터 크산티포스의 아들 페리클레스,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 리시마코스의 아들 아리스티데스의 이름이 보인다.[2] 단 이는 시대가 다름을 감안해야한다. 아테네 시절은 도시국가 시절로 아테네에서 쫓겨나도 아테네로 오는 것만 금지되었다면 쫓겨나서 어디를 가든 마음대로였다. 여기에 주변 도시국가들은 문화적으로도 상당히 유사한 편이니 타향살이가 고달플 뿐 적응에는 큰 탈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 시절은 다르다. 고대 그리스 시절과는 달리 영토도 광대하니 도편추방제 같은 걸 하면 바로 이웃동네에서 지내도 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다른 도나 나라를 넘어 사는 수준이다. 여기에 찾아간 나라의 문화에 적응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특히나 그나마 고대 그리스 시절의 각 폴리스간에는 적어도 마케도니아 왕국 정도를 제외하면 '우리는 그리스인이다!' 하는 정서라도 있다. 동로마 제국의 이웃나라는 사산조 페르시아ㆍ이슬람권 국가ㆍ프랑크 왕국ㆍ신성 로마 제국 등인데, 이들을 한데 묶을 문화적 공통점이 얼마나 있는가? 페르시아나 이슬람권은 각각 조로아스터교ㆍ이슬람교, 서유럽 국가들도 동로마는 정교회, 서유럽은 가톨릭이라 종교부터 맞지 않다. 민족적으로도 제대로 일치하는 국가가 없다... 오스만 제국 치하 그리스의 경우 아예 명목상 같은 나라 사람인 터키인, 아랍인 등이 언어, 문화적으로는 그리스와 달라서 오스만 제국 밖으로 추방되지 않고 같은 오스만 제국 영토에서 귀양살이를 하더라도 현지 문화에 제대로 적응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대 그리스는 언어, 문화적으로 그리스와 일치하는 다른 나라가 키프로스 뿐이며 그 키프로스조차도 그리스 본토에 비해 터키풍이 강하여 나름대로 이질감이 있다. 결국 도편추방제는 철저히 고대 그리스 시절의 상황에 최적화된 제도였던 셈이다.[3] 아마도 변론 혹은 항소가 허용되지 않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듯하다.[4] 영문위키판에는 '일단 총 투표수가 6000표 이상이 되어야지 투표가 유효하다'는 가설도 서술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다른 출처의 글은 '최다 득표자가 추방당한다'는 말도 있다.[5] 한편으로는 이게 사실일 시 아테네의 시민은 6천명을 훨씬 넘었으며(참주가 될 가능성을 보이는 인물이 한둘은 아닐 테니 말이다.) 이게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을거라고 볼 수도 있다. 아테네와 더불어 그리스의 쌍벽이던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지 고작 80년 만에 시민이 10% 수준으로 급락한 것과는 대조적이다.[6] 히포크라테스의 아들인 걸로 유명하다.[7] 아테네의 황금기를 열어제낀 페리클레스의 아버지다.[8] 다음과 같은 일화로 유명하다. 도편추방제 선거 당일, 문맹이었던 어떤 시민이(그리스는 나름대로 하층민들에게도 선거권을 주기도 했다 하니 시민이라 해도 문맹자가 있었을 것이다.) '난 글자를 몰라서 그런데 아리스티데스의 이름을 써주실 수 있겠소?'라고 물었다. 이에 아리스티데스는 '그 자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했소?'라고 되물어봤다. 그러자 그 시민은 '아뇨. 그렇지만 주변에서 하도 아리스티데스를 칭찬해대니 진저리가 나서요.'라고 답했고 이에 아리스티데스는 묵묵히 자신의 이름을 도편에 써주었다. [9] 하지만 추방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해서 아테네로 다시 복귀하게 된다.[10] 이때 키몬의 추방을 뒤에서 공작한 인물이 바로 페리클레스. 키몬의 추방과 동시에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손에 들어갔고 이 시기의 아테네를 '페리클레스의 아테네'라고 부른다.[11] 정확한 연도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린다.[12] 하지만 이는 의문. 사실, 아테네는 과두정을 받아들인지 단 1년 만에 과두정을 뒤엎어버리고 다시 민주정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도편추방제로 인한 중우정치를 막지 못하면 외세에 의해 자신들의 정치체제가 바뀌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아테네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