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데냐 왕국

 



'''사르데냐 왕국'''
'''Regno di Sardegna'''
'''Rennu de Sardig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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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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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 빈 회의 이후의 영역
1720년 ~ 1861년
표어
FERT, FERT, FERT
국가
사르데냐의 노래
위치
남유럽
수도
토리노
정치체제
입헌군주제
국가원수

주요 국왕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주요 총리
카밀로 카보우르
언어
이탈리아어, 사르데냐어
민족
이탈리아인
(사르데냐인, 피에몬테인)
종교
가톨릭
통화
리라 (₤)
성립 이전
사보이아 공국
통일 이후
이탈리아 왕국
1. 역사
2.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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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이탈리아어
Regno di Sardegna
사르데냐어
Rennu de Sardigna
프랑스어
Royaume de Sardaigne
독일어
Königreich Sardinien
영어
Kingdom of Sardinia

1. 역사


1324년, 혹은 1720년부터[1] 1861년까지 토리노를 수도로 하여 존재했던 이탈리아의 왕국이다.[2]
사르데냐 왕국이란 존재 자체는 14세기로 거슬러가지만, 이건 교황이 사르데냐에 간섭하기 위해 만든 왕국이라 아라곤이 교황의 허락을 받고 사르데냐를 정복한 이래로 사르데냐 왕은 아라곤 왕, 나중에는 스페인 왕의 당연겸직 작위에 불과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대동맹 측에 가담한 사보이아 공국은 1714년 위트레흐트 조약의 결과 스페인이 지배하던 시칠리아 섬을 얻는 데 성공하였지만, 1718년 이탈리아 영토를 탈환하려한 스페인에게 시칠리아를 빼앗긴다. 이로 인해 사국 동맹 전쟁이 발발하였고 결국 오스트리아의 도움으로 시칠리아를 되찾았으나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사르데냐를 다스리기 어려워한 오스트리아의 제안[3]으로 1720년 시칠리아 섬을 사르데냐 섬과 교환하였다. 이후에 사르데냐 왕국은 프랑스오스트리아 사이에서 교묘한 중립 정책을 펴[4] 차츰 영토를 늘려나갔다. 1748년 아퀴스그라나 강화조약으로 영토를 밀라노의 코앞까지 확장한 사르데냐 왕국은 오스트리아, 스페인과 함께 이탈리아를 3등분해서 세력을 나눠 갖는 국가로까지 발전하였다.
1796년 나폴레옹의 침입을 받은 사르데냐 왕국은 본거지인 피에몬테를 내주었으나, 1814년 잃었던 영토를 되찾고 추가로 옛 제노바 공화국의 중심인 리구리아 지방을 얻었다. 1847년 사르데냐 왕 카를로 알베르토는 사르데냐 왕국, 사보이아 공국, 피에몬테 공국 등 명목상 별개였던 사보이아 왕조의 영지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하였으며 19세기의 사르데냐 왕국은 이탈리아 통일전쟁의 중심이 되어 카보우르가리발디의 활약으로 이탈리아를 통일하고, 국명을 이탈리아 왕국으로 바꾸었다.

2. 역대 국왕


  •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1720년-1730년)[5]
  •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1730년-1773년)
  •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1773년-1796년)[6]
  •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1796년-1802년) [7]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1802년-1821년)
  • 카를로 펠리체(1821년-1831년)
  • 카를로 알베르토(1831년-1849년)[8]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1849년-1861년)
[1] 원래의 사르데냐 왕국은 14세기 아라곤의 지배 이후 계속 스페인의 지배에 놓여 있었으나, 1720년 사보이아 공국이 이 지역을 합병한 이후의 사보이아 왕조는 사르데냐 왕국이라고 불렸다. 사보이아가 중심이 된 합병이었음에도 사르데냐 왕국이라는 이름을 쓴 이유는 왕국인 사르데냐가 합병의 주체였던 사보이아보다 격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2] 사르데냐 자체의 수도는 칼리아리인데 어차피 스페인 국왕이 사르데냐 왕 직책도 가지고 있는 터라 여기를 수도 삼아 통치한 일은 없었다. 왕국이 사보이아 공국에게 넘어간 이후에는 나폴레옹 전쟁기에 본거지인 피에몬테 지역을 뺏기는 바람에 이곳으로 천도를 한 적이 있다.[3] 제안이라고 하지만 국력차를 앞세운 반협박에 가까웠다.[4]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프랑스에,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는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어 참전하였다.[5] 프티 도팽 루이펠리페 5세의 장인 어른으로 루이 15세페르난도 6세의 외할아버지였다. 또한 아내인 안 마리 루이즈 도를레앙이 루이 14세의 조카이니 루이 14세의 조카사위기도 했다. 참고로 증손녀 둘은 루이 15세의 손자인 앙주 공작(루이 18세)과 앙굴렘 공작(샤를 10세)에게 출가했다.[6] 루이 18세와 샤를 10세의 장인이었다. 참고로 이 두 명의 딸 중 큰 딸은 루이 18세에게, 작은 딸 마리 테레즈는 샤를 10세에게 시집갔다. 참고로 펠리페 5세의 막내 딸의 남편이었다.[7] 루이 16세의 여동생인 마리 클로틸테의 남편, 즉 루이 16세의 매형이다.[8] 여기에서 직계가 단절되고 분파인 사보이아-카리냐노 가문이 계승했다. 이 가문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준 왕족 대접을 받아왔다. 참고로 사보이 왕가의 계승법은 살리카법이라 13촌 관계로 왕위를 계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