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천하
나폴레옹 전쟁의 마지막 국면으로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라고도 한다.
프랑스어: "(나폴레옹의) 백일(les Cent Jours)"
("백일천하"는 일본식 역어이다.)
1. 내용
181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몰락했다. 퐁텐블로 조약에 의해 나폴레옹은 프랑스 제국 황제에서 퇴위되고 엘바 섬(이탈리아와 코르시카 섬 사이에 있다.)의 소영주로 강등되었다. 처음엔 샤르데냐 국왕이나 코르시카 영주로 봉하는 것이 고려되었으나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정도만 가져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작은 엘바 섬에 보내졌다.[1] 루이 18세는 나폴레옹을 포르투갈령 아조레스 제도로 추방하여 거기서 고생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연합국은 그 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 거부했다. 거기에 엘바 섬 영주 안을 지지한 러시아가 자기 입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냥 보나파르트 제국을 유지시켜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통에 결국 엘바로 가게는 됐으되... 말이 엘바 섬 영주지 사실상 엘바 섬에 유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약속한 자금 지원은 당연히 없었고 부르봉 왕조는 자꾸 암살자를 보내며 그를 도발했다. 그래도 나폴레옹은 탈출하기 전까지 영주 일은 제대로 했다. 엘바 섬 주민들이 '새 영주님 오시고 나서부터는 제대로 잠도 못잔다'(...)고 허구한 날 불평했을 만큼 이거만든다 저거만든다 하면서 수시로 부역에 동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워낙 작은 엘바 섬엔 돈 나올 곳도 없고 엘바 섬은 나폴레옹의 계속된 부역 동원으로 나폴레옹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강해 세금도 내지 않고 개겼다. 이에 나폴레옹이 기병대를 출동시켜 세금을 강제 징수했지만 그 세금이 기병대 보너스로 다 들어가는 등(...) 그냥 답이 없었다.
한편 나폴레옹을 엘바 섬으로 보낸 뒤, 오스트리아 제국 빈에서는 빈 회의가 열렸고, 빈 회의의 진행 가운데 프랑스는 부르봉 왕조가 복원되어 루이 18세가 프랑스 국왕으로 돌아왔다. 루이 18세는 의기양양하게 4월 29일 콩피에뉴에 도착, 5월 2일 생클루 선언으로 입헌군주제는 거부했으나 제헌의회는 보장함으로 절대왕정으로 돌아갈 일이 없음을 확언했다. 이로써 프랑스에 신체제가 확립되었고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고도 자신들의 재산을 보장받은 부르주아들은 만족했다.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왕좌를 세운 나폴레옹에 비교하면 동맹국이 옹립한 루이 18세는 카리스마 차이가 프랑스 국민들 눈에 너무 확연했고(...) 루이 18세는 동맹국 중에 오로지 영국에게만 고마워함으로 러시아의 분노를 샀다. 특히 거만한 루이 18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차르 알렉산드르 1세의 어그로를 끌었다.(...)[2] 거기에 수만명의 퇴역병사들은 자신들이 배신당했다고 분노하고 있었다. 게다가 처음에 루이 18세를 지지한 명사들도 루이 18세가 정교 협약을 폐기하고 교황권 지상주의자들이 주교구를 차지하게 함으로 자신들의 재산권에 다시 위협을 가하자 또 분노했다. 특히 루이 18세가 영국 상품을 프랑스 시장에 쏟아놓는 터에 상인들도 빡쳤다. 무엇보다 프랑스 내에 가득한 외국군의 존재에 프랑스인들의 자존심 상처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유배를 갔음에도 위엄 쩌는 일화를 하나 탄생시켰는데, 유배를 떠나는 당일 자신의 근위대와의 작별연설에서 "바이올렛이 만발할 때 다시 돌아오겠다" 고 약속했다. 그리고 약 9개월 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 루이 18세는 퐁텐블로 조약에서 지급하기로 결정한 200만 프랑의 연금지출을 거절해[3] 나폴레옹을 극도의 궁핍에 빠뜨렸고 오히려 암살자를 고용해 암살하려 했다. 거기에 마리 루이즈와 자신의 아들 나폴레옹 2세가 엘바 섬으로 당연히 올 것으로 생각했지만[4] 전혀 연락이 없자 분노했고 나폴레옹의 누이 폴린은 다시 황족을 하고 싶어 연일 탈출을 종용했다. 어머니 레티치아는 아들의 안정된 생활을 내심 반겼지만 나폴레옹의 결심을 꺾지는 못했다. 심다가 유럽 제국들의 밥그릇 싸움이 심각해지자 영국은 유리한 패를 가지기 위해 오히려 탈출을 방조해 나폴레옹은 1815년 2월 26일, 엘바 섬을 탈출할 수 있었다. 이때 프랑스에서는 한창 바이올렛 꽃이 만발하고 있었다.[5]
3월 1일에 칸 근처에 상륙한 나폴레옹은 파리로 진군을 시작했다. 루이 18세가 나폴레옹을 막으려고 토벌대를 보냈지만, 나폴레옹은 자신에게 총을 겨눈 병사의 총구로 더 다가가서 '''병사들이여, 병사들의 황제는 여기 있다. 어서 쏴라!'''라 호통을 치자 병사들이 대거 항복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르노블로 진군하던 나폴레옹의 병력이 길가에 제5보병연대가 포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주민들은 "신경쓰지 마세요. 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으나 측근들은 좀 걱정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우리가 속았는지도 모르겠군. 뭐 상관없지, 전진!"이라는 말과 함께 맨앞으로 나아가 제5보병연대를 정면으로 바라본 뒤 이렇게 말했다.
"제5보병연대여! 짐을 알아보겠는가?"
"예, 폐하."
"짐이 자네들의 꼬마 부사관(별명)이다. 자네들 중 짐을 쏘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여기 짐의 가슴이 있다!"
이에 병사들이 "황제폐하 만세!"를 외치며 백색 휘장을 떼어내고 황제의 손을 만지기 위해 달려나갔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이제 혼자 남겨진 그들의 지휘관을 향해 나아갔다.
"무슈 레자르, 짐은 자네를 잘 아네. 자네를 대령으로 만든게 누구인가?"
"폐하입니다."
"그러면 그 전에 자네를 중령으로 만든게 누구인가?"
"폐하입니다."
"그런데도 짐과 싸우기를 원했는가?"
"전 오직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이에 나폴레옹은 레자르의 칼을 돌려주고 항복한 제5연대를 규합해 그르노블로 전진을 재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영화 워털루에 이 장면이 묘사되었는데, 가히 나폴레옹의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다. 영화 워털루와,프랑스 드라마에서 재현한 장면[6][7]사랑하는 아내여, 우린 뙤약볕 아래 골프주앙에 상륙했소. 굉장해. 황제폐하가 가는 어디든 사람들이 달려나와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오.
황제폐하를 저지하기 위해 파견된 부대들도 그를 보자 감동에 못 이겨 우리와 합류했네. 황제폐하를 따라 전투에 임할 것이오. 황제폐하 만세 ! 프랑스여 영원하리라.
나폴레옹을 따라 엘바섬까지 갔던 44세의 근위대원 피에르 랑텔름이 그의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워털루 전투에서 전사했다.
2. 복귀와 "자유 제정"
어쨌든 나폴레옹의 복귀에 프랑스 국민들이 환호했고 프로방스 지역을 제외한 프랑스 전역에서 나폴레옹의 복귀를 환영하며 루이 18세가 보낸 토벌군들은 토벌은 커녕 오히려 나폴레옹에게 돌아서며 나폴레옹은 손쉽게 3월 20일, 파리로 귀환해 다시 황제에 즉위했다.
나폴레옹은 헌법을 수정해 소위 '''자유 제정'''을 실시했다. 이 시기 나폴레옹은 정치적 입지가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의 협력이 필요했고, 그래서 수정된 헌법에는 자유주의 사상을 매우 많이 반영하여 그의 집권기에 펼쳤던 정치와는 정반대로 당시 유럽에서 최고로 자유로운 헌법을 만들었다.(…) 비록 백일천하로 끝난 탓에 이 헌법은 사실상 실행되지 못하고 사장되었지만, 나폴레옹이 죽은 뒤에 평가가 상승하는 계기가 되었다.
2.1. 놀라운 언론플레이와 그 실상
당시 프랑스의 유력지는 그야말로 혀를 내두를 만한 변신을 보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미디어와 정치권력의 관계를 다룬 도서인 <언론, 그들의 변신>에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유명한 이야기지만, 어디까지나 도시전설이다. # 해외에서도 유명한 도시전설이라 실제로 당시 신문을 찾아봤는데, '''없었다'''고. 물론 황제라는 표현이 꺼려지고 위험한 찬탈자처럼 다뤄진 부분은 많지만 저렇게 극적인 변화를 보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리옹을 목전에 둔 이제르(Isère)주의 주도 그르노블(Grenoble)에 도착하면서부터 그는 최소한 대공대접을 받기 시작했다.이 당시의 프랑스의 유력지 '모니퇴르Le Moniteur Universel'는 지금도 권력 앞에 굴절된 언론의 고전적인 본보기로 자주 회자되고 있다. 원래 '모니퇴르'는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시민들을 옹호함으로써 최대 일간지로 떠올랐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권력자로 떠오르자 이번엔 적극적인 나폴레옹 지지로 돌아섰다. 나폴레옹이 민중의 기대를 배신한 채 황제에 오른 뒤에는 더욱 노골적으로 찬양하였다. 그러다 나폴레옹이 1814년 3월 연합군에 의해 파리를 점령당하고 패한 뒤 엘바 섬으로 유배된 후에는 다시 복고된 부르봉 왕조의 주구가 되어 나폴레옹에 대한 무서운 독설을 퍼부었다.
1815년 3월 1일.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하여 20일간의 여정끝에 파리에 입성했는데, 그 20일간 사태 전개 과정에서 보인 프랑스 최대 일간지 모니퇴르의 편집과 제목 그리고 기사는 두고 두고 가히 후세에 길이 남을 만한 조소(嘲笑)의 표본이 되었다. 나폴레옹이 접근할수록 변화하는 모니퇴르의 1면 헤드라인은 가관이다.
3월 9일 '식인귀(anthropophage)', 소굴에서 탈출
3월 10일 "코르시카 산(産) 오우거(Corsican Ogre)", 주앙(Juan) 만(灣)에 상륙
3월 11일 호랑이(tiger), 카르프에 나타나다
3월 12일 괴물(monster), 그레노블에 야영
3월 13일 폭군(tyrant), 벌써 리옹에 진입
3월 18일 찬탈자(usurper), 수도 100km 지점에 출연
3월 19일 보나파르트(Bonaparte) , 북으로 진격 중! 파리 입성은 절대 불가
3월 20일 나폴레옹(Napoleon),[8]
내일 파리 도착 예정3월 21일 나폴레옹 황제(Emperor Napoleon), 퐁텐블로 궁에 도착하시다
3월 22일 어제 폐하(his majesty)께옵서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대동하시고 튈르리 궁전에 납시었다.
이후 모니퇴르는 프랑스 정부의 공식적인 기관지가 되었다가 후에 관보로 흡수된다.
2.2. 귀환 후 나폴레옹 성명서
프랑스인이여, 카스틸리오네 공작의 변절로 방어 한번 못하고 리옹이 적의 손에 넘어갔다. 내가 믿었던 지휘관이 이끄는 군대와 그안의 수많은 대대들, 그 속의 용감하고 애국심 넘치는 중대들은 면전의 오스트리아 군대를 꾸준히 때려 부수고, 파리를 위협하고 있는 적의 뒤로 돌아갈 능력이 있었는데. 상포베르와 몽이라이, 샤토티에리, 보샹, 모르망, 모에로, 크란, 레임, 아르시쉬르오브와 생디지에에서의 승리, 로렌과 샹파뉴, 알자스, 프랑슈콩테와 부르고뉴에서 봉기한 용감한 농민들, 내가 적의 후위를 점하고 병기고와 예비군, 호위대 및 모든 장비와의 연결망을 끊어버린 덕에 적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프랑스군은 이보다 더 강할 수 없고 적의 정예부대는 공급원 없이는 패배만 할 뿐이다. 적이 그들이 잔혹하게 약탈했던 저 넓은 평원은 무덤 삼게 되기 직전, 라구사 공이 우리를 배신하고 수도를 내주었고 군의 사기는 꺾여버렸다. 그와 동시에, 조국과 그들의 군주, 곧 은인을 배반한 예기치 못한 이 두 장군의 행동이 전쟁의 향방을 돌렸다. 파리에서 빠져나오던 적의 상황은 피해막심해서 탄약도 없고 예비병력과도 연락이 끊긴 사태였건만... 이 새롭고 심각한 상황에서 나의 가슴은 산산이 찢어졌으나 나의 영혼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오로지 조국의 이익만을 고려했었다. 하지만 결국 바다 한가운데의 외딴 섬으로 추방당했도다. 나의 인생은 유용했고 여전히 그대들에게 유용하겠지만, 나의 운명을 함께 하고자 하는 수많은 시민들의 바람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의 존재는 프랑스에 중요할 것이며, 나는 그저 나의 근위병이 될 용감한 병사 몇 명만을 데려갔었다. 그대들의 선택으로만 왕위에 오를 수 있고, 그대들의 동의 없이 벌어지는 모든 일은 위법이다. 25년간 프랑스는 국가 정부와 이 새로운 상황에서 탄생한 왕조의 손으로 새로운 이득과 새로운 제도, 새로운 영광을 갖게 되었다. 그대들을 다스리게 될 군주는, 우리의 영토를 짓밟은 바로 그 자들의 힘으로 왕위에 앉게 될 것이다. 그는 봉건제도에 의지하는 것이 허사였음을 알게 될 것이고, 오로지 군중의 적이자 지난 25년간 국민의회에서 비난을 받았던 소수의 사람들의 권리만을 보장해 줄 것이다. 그대들의 평화로운 조국과 널리 퍼졌전 명성은 영영 사라질 것이다. 프랑스인들이여! 추방당한 동안 나는 그대들이 비탄하고 요구하는 것들을 들었도다. 그대들은 그대들이 뽑은 정부만이 합법적이라고 선언했었고, 오랜 잠에 빠졌던 나를 비난했으며 편히 쉬기 위해 대단히 중요한 조국을 희생시켰다고 꾸중했다. 나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넜다. 그대들 가운데 도착하여 그대들의 권리이기도 한 나의 권리를 되찾을 것이다. 나는 파리를 차지할 때까지 개개인이 행동하고 쓰고 말한 모든 것들을 무시할 것이다. 그 어떤 것도 그들이 나에게 어떻게 봉사했는지에 대한 기억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인간의 손실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이여! 아무리 작은 나라일지라도 잠깐의 승리를 거두었을 뿐인 적의 손으로 왕위에 오른 군주에게 복종하는 수치스러운 행동을 당연히 여기는 곳은 없다. 샤를 7세가 파리로 돌아와 헨리 6세의 짧은 지배를 종식시켰을때, 그는 영국 출신 섭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용감한 병사들을 통해 왕위를 얻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내가 지금, 그리고 언제나 모든 의무를 영광스러게 행하는 것은 오로지 그대, 용감한 병사 덕택인 것이다.
서명, 나폴레옹
황제에 의해:대육군의 소장 역할을 맡은 대원수 서명, 베르트랑 백작
3. 몰락
영국, 프로이센 등은 다시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나폴레옹도 이에 맞서 벨기에로 군대를 이끌고 갔다. 작년에 고갈된 인적자원이 한 해 만에 회복될 리 없으므로 병력을 아껴야 했고, 따라서 나폴레옹은 블뤼허의 프로이센군 12만과 웰링턴의 영국-네덜란드 연합군 9만을 분단시켜 각개격파를 시도했다.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한 리니에선 프로이센군을 격파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추격에 지체하는 바람에 결정타를 먹일 기회를 놓쳐버렸고, 콰트르브라에서 네와 싸운 웰링턴 군은 비교적 경미한 피해를 수습하면서 브뤼셀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았다. 결국 나폴레옹은 6월 18일에 워털루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며 마지막 희망마저 잃게 된다.
6월 22일, 나폴레옹은 다시 황제에서 퇴위했다. 한때 나폴레옹은 미국 망명을 시도하려고 항구도시였던 로슈포르로 오지만 영국 해군이 연안을 봉쇄하면서 실패했고, 프로이센의 추격과 루이 18세의 체포명령이 도피중인 그를 추적하자 바다에 있던 영국 해군의 전함 HMS 벨레로폰(3급함, 74문)에 승선하여 미국으로의 무사통과 혹은 영국으로의 망명을 부탁했지만 영국은 둘다 거부했고 그가 타고있던 전함을 일단 본토로 소환후 플리머스 항에 2주정도 상륙없이 계류시키면서 나폴레옹의 신병처분문제를 고민한후, 테메레르급 전열함 노섬벌랜드에 바꿔태워 콕번 제독[9] 의 지휘하에 대서양의 절해고도인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 보냈다.[10] 결국 나폴레옹은 죽을때까지 세인트헬레나 섬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6월 22일 나폴레옹은 퇴위할 때 칙령을 내려 그의 아들 나폴레옹 2세에게 양위한다고 선언했지만, 그의 퇴위 선언을 하고 도피한 당일 정권을 인수한 5인의 정부 위원회는 당연히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부 위원회는 즉각 루이 18세의 귀국을 요청했고, 7월 8일 루이 18세가 파리가 도착하여 복위식을 가졌다.
관례적으로 나폴레옹이 파리에 입성한 3월 20일부터 루이 18세가 복위한 날인 7월 8일, 혹은 그 전날인 7월 7일까지 백일천하라고 지칭하지만 실제로 나폴레옹은 6월 22일에 퇴위 선언을 하고 도피했기 때문에 프랑스 제1제정 2기는 6월 22일까지 거의 딱 석달 동안 지속되었다. 프랑스 상원은 나폴레옹이 퇴위한 당일 긴급 회의를 열어 프랑스 제정의 종식을 선언했다.
한편 이 때 나폴레옹의 양아들인 외젠 드보아르네는 나폴레옹이 첫 퇴위를 할 때, 나폴레옹과 협력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는 조건으로 장인인 바이에른 막시밀리안 국왕에게 항복한 상태였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복귀한 뒤에도 그와 협력하지 않았다. 평소 고결한 인품을 가졌고 나폴레옹의 몰락 당시 '황제(나폴레옹)의 별은 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충성해야 한다'라는 발언을 남길 정도로 양아버지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외젠의 면모를 보면 의도적인 '배신'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보다는 장인에 대한 맹세 문제와 주변 정세 등을 통해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을 가능성이 크다.